새벽을 열며(1/3)

2005. 1. 3. 오전 9: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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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월 3일 주님 공현 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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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요한 1서 3,22-4,6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느님께로부터 다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으며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명령받은 대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자기가 성령을 받았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다 믿지 말고 그들이 성령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십시오. 많은 거짓 예언자가 세상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알아보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예수께서 그런 분이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적대자로부터 악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자가 오리라는 말을 여러분이 전에 들은 일이 있는데 그자는 벌써 이 세상에 와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인 여러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왔고 거짓 예언자들을 이겨 냈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그분은 세상에 와 있는 그 적대자보다 더 위대하십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 세상 일을 말하고 세상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지만 하느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진리의 성령과 사람을 속이는 악령을 가릴 수 있습니다.


복음 마태오 4,12-17.23-25
그때에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셨다. 그러나 나자렛에 머물지 않으시고 즈불룬과 납달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가파르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 "즈불룬과 납달리, 호수로 가는 길, 요르단 강 건너편, 이방인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예수께서는 전도를 시작하시며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예수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지자 사람들은 갖가지 병에 걸려 신음하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과 갖가지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예수께 데려왔다. 예수께서는 그들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와 데카폴리스와 예루살렘과 유다와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온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랐다.





제가 신학생 때, 저는 등산을 무척이나 좋아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산을 가보았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많은 등산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부가 되어서는 산을 거의 가지 않습니다. 산이 갑자기 싫어진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산보다는 바다에 가는 것이 더 좋아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땀 흘리는 것을 싫어해서?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사연이 있답니다.

사실 저는 신학생 때까지만 해도 수영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물장구치면서 노는 정도일 뿐 맥주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바다에 가는 것, 그리고 수영장에 가는 것은 저의 약점을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해서 괜히 싫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산을 좋아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산이 얼마나 좋은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다녔던 것이지요.

하지만 늘 산만을 고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산보다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고, 등산보다는 수영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물론 물가에 놀라가자고 하는 사람이 가장 밉기도 했지만, 어떻게 그들을 탓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신부가 된 뒤에 어떻게든 수영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리고 수영장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저만 수영을 못하는 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했지만, 또한 수영실력이 도저히 늘 것 같지 않아서 긴장도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저도 남들처럼 수영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저는 어느 곳을 더 좋아할까요? 신학생 때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산만을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이제는 산도 좋고 바다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수영을 하게 됨으로 인해서 바다의 커다란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거든요.

지금 내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나를 구속하고 있는지도 함께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내가 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저 사람과 나는 코드가 다르다면서 거부하는 사람들, 그러한 고정관념으로 인해서 내게 유익함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발로 뻥 차버린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십니다. ‘갈릴래아’는 ‘이방인들의 지방’이라는 뜻으로, 유다인들은 이곳을 구원의 틀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확정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전도를 시작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인간적인 틀에 갇혀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 틀에서 벗어나서 보다 더 넓은 세상에서 그리고 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시길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먼저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는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할 차례입니다. 즉, 우리 역시 나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서, 구원이 없다는 장소와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을 찾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내가 없다고 하는 곳, 그곳에 바로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내가 못한다고 생각한 것들을 해봅시다.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은 수첩의 맨 앞에다 적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은 가슴에 새기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그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크게 눈을 뜨고 보고싶은 사람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눈을 감아야만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헤어질 땐 아쉽지만 돌아서는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함께 있는 순간에도 아쉬움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정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벅찬 느끼표(!)이지만,
사랑은 곁에 있을수록 확인 하고픈 물음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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