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언젠가 작가 최인호 선생께서 세례받을 무렵의 에피소드를 써 놓은 글을 보고 한참을 웃은 일이 있다. 말하자면 사모님께서 세례명을 정하면서 "여보, 과부도 아니고 순교도 안 당하고 평생 행복하게 산 성녀의 이름을 찾아 줘요" 했다는 것이다. 그 때 최 선생께서 "여보, 이 세상에 그런 성녀는 한 사람도 없어" 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다. 농담처럼 가볍게 한 말이었지만 가슴이 뜨끔했다. 거기에는 많은 그리스도교의 진실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묵주기도를 할 때 '고통의 신비'에 이르면(비단 '고통의 신비'에 대한 일만이 아니다) 성모송을 외우기가 몹시 송구해진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을 묵상합니다" 해 놓고,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하려면 염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성모님께서 그 당시 아드님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십자가 밑에 서 계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차마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하는 게 끔찍하지 싶다. 만약 내가 그런 처지인데 누가와서 "마리아야 은총이 가득하구나, 기뻐하여라!" 한다면,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해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우리에게 그 신비의묵상 속에서 송모송을 바치라고 한다. 가끔 발현하신 성모님의 말씀에도 그 기도를 기뻐하신다고 들었다. 왜 그럴까? 그리스도교는 무조건 고통을 기뻐해야 하는 이상한 종교라서?
가브리엘 대천사는 마리아에게 와서 기뻐해야 하는 까닭을 가르쳐 준다.
그것은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는 이유 때문이란다(루가 1, 28). 처녀의 몸으로임신해 찾아온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은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다"라고 말한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 때문이라고 한다(루가 1, 39-45 참조). 이 두가지 단순한 이유 때문에 마리아는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신 분'이되었다. 천사를 한 번 만난 일 이외에는 특별한 은사나 계시를 받은 일도 없고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하지도 못했다. 평생을 가난하게 소외되고 살다가 하나뿐인 외아들의 죽음을 면전에서 목도하는 고통도 겪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몸을 의탁해 여전해 가난한 채로 쓸쓸히 돌아가셨다. 그런데도 그분이 복되신 분이라는 것....
돌아보면 하느님은, 내가 그분을 거부할 때에도 나와 함께 계셨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이미 나에게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은총이 가득했던 것이다.
그러니 내가 복되어지기 위해서 할 일은 실은 하나뿐이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는 것" 이다. 너무 쉬운 일이라서 허망하기도 하지만, 이처럼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믿음은 은총이라는 생각이다.
주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믿음은 어림없는 것, 기도도 어림없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건 더더욱 어림없는 것, 그래서 우리는 늘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처럼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라고 기도해야 하는가 보다. 기도는 쉬운데 마음은 어렵다. 이것이 지극한 신비라는 생각이 든다.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을 위하여 부디 빌어 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수밖에.
- <공지영 마리아/소설가, 지금 그대 어디에 2005년3월호, 서울대교구 발행> 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