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의 섭리와 안배를 기리며,
성탄 축하드립니다.
일할 때마다 임지에서 느끼는 것은 ‘나보다 능력 있고 더 좋은 신부님이 오셨으면 이 분들에게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바람입니다. 일처리에 미숙하고 대인관계에 원만치 못한 제 모습을 자평하면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비단 이런 감정은 저뿐만 아니라 여러 수도자들의 소망에서도 듣게 됩니다. “나를 당신의 도구로 쓰시고자 하시면, 그에 걸맞은 능력도 주시지.” 그런가 하면, 어떤 평신도 지도자들은 평신도 봉사자들의 자격과 조건에 대한 교회법의 내용에 자신들이 부적합하다고 읍소합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라는 자위성 표현을 자주 보고 듣습니다. 이 표현을 표출하게 되는 인간의 불완전성과 나약성은 가끔 죄스러운 감정마저 동반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기도할 때마다, 주님과 관련된 순수하고 겸허한 마음을 가질 때마다 저도 모르게 샘솟는 부끄러움입니다. 그리고 저 못나서 그런 것인데 누구를 탓하랴 싶습니다. 그런데 최근 다른 한 면을 발견합니다. 아니, 다 아는 사실인데도 새삼스럽게 다시 새겨집니다. 그동안 아니라고 자신을 억압하고 우기면서 부인했던 스스로를 다시 발견하고 인정한 덕분이라고나 할까. 정말 겸허하게 우리 자신을 표현한다면, 이 불완전성과 나약성은 우리의 죄가 아니라,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주는 원천이기도 합니다. 나약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아니 우리 자신의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겸허히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것 때문에 주님께 더욱 더 희망을 둘 수 있게 된 것을 기쁨과 감사로 여깁니다.
사도 바오로는 율법과 은총을 비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입니다.”(로마 7,15.17) 그러면서 그 원인을 하느님에게서 찾으며, 인간의 불완전성과 나약성에 대해 죄책감을 안겨주기 보다는 희망을 찾도록 안내합니다.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로마 8,20) 그리고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24-26절)라고 하면서 우리의 불완전성과 나약성이 오히려 희망을 간직하도록 하는 원천일 수 있으며, 이 희망을 찾아나서는 우리에게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해 주시고,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에게 하느님 사랑의 섭리로 열매를 맺어주시리라고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28절)
못나고 싶어서 못난 것도 아니요, 못난 짓을 계속하고 싶어서 못난 짓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도, 못난 것에 대해 아파하고 못난 것을 극복해야만 하는 과제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의 현주소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희망을 채워주고 이루어주시기 위해 2011년 새벽을 열고 다시 오시는 아기 예수님께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 저희를 굽어보시고,
불완전하고 나약한 저희를 어여삐 여기시며,
못난 저희를 헤아려 주시어,
저희가 살면서 저지르는 모든 과오를 용서해주시고,
저희를 새롭게 일어서게 해 주시고,
주님께 향한 희망의 불씨가 사그라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가 희망을 향해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서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희가 살면서 다 하지 못하는 모든 것을 채워주시며
주님 영광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불완전하고 나약한 우리를 통해서도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시는 주님 찬미받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