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7일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주교 학자

2009. 6. 27. 오전 6:3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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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6월 27일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주교 학자
St. Cyril of Alexandria
St. Cyril of Alexandria B, Doctor (RM)
San Cirillo d"Alessandria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Born: 376 at Alexandria, Egypt
Died: 444 at Alexandria, Egypt of natural causes; relics in Alexandria
Cirillo = che ha forza, signore, dal greco

 



성인들이 처음부터 그들의 머리 둘레에 후광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위대한 스승으로 알려진 치릴로는 충동적이고 때로는 난폭하기까지 할만큼 활동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412년 테오필로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대주교가 된 그는 노바시아노파의 이단 교회들을 약탈하고 폐쇄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한 데 대한 보복으로 유대인들을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신학과 교회 역사에서 치릴로의 중요한 점은
네스토리우스의 이단을 거슬러 정통 교리를 옹화하기 위해 투쟁한 데 있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가지 본성에 중점을 두었다.

그 중 하나는 마리아가 "하느님을 잉태한 자"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신성과 인성이 피상적으로만 결합된 그리스도 안에는 별개의 위격이 둘이 있다면서
"하느님을 잉태한 자"란 말보다는 "그리스도를 잉태한 자"라는 말을 주장하였다.

그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아니라 그저 인간 그리스도의 어머니일 뿐이며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신전일 뿐이라고 했다.
네스토리아니즘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이 단순한 가면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교황을 대리하여 회의를 주재한 치릴로는
네스토리아니즘을 단죄하고 마리아가 참으로 "하느님을 잉태한 자"
-참으로 하느님이고 참으로 인간이신 한 위격의 어머니-임을 선포했다.

그러자 혼란이 생기게 되었고 이로 인해 치릴로는 파면되어 세 달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나중에는 제2의 아타나시오-아리아니즘을 반박한 투사-로 환영을 받으며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오게 되었다.

치릴로는 네스토리우스와 같은 편에 서 있던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반대 의견을
누그러뜨리는 과정에서 자기가 교리의 용어만이 아니라 정통성까지 희생하면서
너무 지나치게 타협한다고 생각하는 자기 편의 몇몇 사람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가 죽기 전까지는 그의 완화 정책 덕분에 극단적인 파벌이 억제되고 있었다.
치릴로는 죽음 앞에서까지 압력을 받으면서도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기를 거부했다.

 



 

 

♬Salve Festa-monastic chants-christdesert(Benedi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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