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천주교회에서 내포(內浦)교회가 지니는 역사적 위치는?>
내포(內浦, 내륙의 항구) 지역 = 일반적으로 충청도 서북지역을 지칭.
가야산 자락 10여 고을 = 당진, 신창, 덕산, 예산, 해미, 홍주, 결성, 면천, 태안, 서산을 말함.
교회사에서의 내포 교회는 : 더 넓은 초기 천주교회의 관할 지역을 말함.
내포 지역의 특성
열려 있는 물길로, 개방적인 물화 유통과 풍요로운 농경지 ->조선후기 천주교가 전래되는 통로 역할을 담당.
내포지역 교회의 간략한 역사 :
1784년~1785년 : 이존창에 의해 설립, 그의 고향인 여사울에서 시작되어 여타 내포지역으로 빠르게 확산
1801년 신유박해 : 교회조직이 무너짐
1839년 기해박해 이후 1850년대 : 평온이 계속되면서, 평야 지대에 다시 숨겨진 신자들 공동체가 형성됨.
1853년 최초로 성직자들의 사목 중심지가 설정됨.
공주의 둠벙이(다블뤼 신부), 덕산의 황모실(매스트르 신부), (진천의 배티(최양업 신부))
1861년 지역 본당 설정(베르뇌 주교님)
덕산 홍모실(랑드르 신부), 보령 판서골(다블뤼 주교), 공주 진밭(리델 신부) 둠벙이(죠안노 신부)
1864년 목천 소학골(칼레 신부) 추가.
내포지역 초기 순교자들의 시성시복운동 추진 : 신해박해 여파로 순교자가 발생하면서, 순교자들 기록 나타남.
1791년 신해(辛亥)박해 : 원시장 베드로(홍주, 충청도 지역 최초의 순교자)
1797년 정사(丁巳)박해 : 박취득 라우렌시오, 배관겸 프란치스코(이상 해미) 이도기 바오로(청양)
정산필 베드로, 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이상 덕산) 원시보 야고보, 방 프란치스코(이상 홍주)
이존창은 순교 행적의 증거가 불충분해 보류됨.
1866년 병인(丙寅)박해 당시, 전국 순교자 8,000여명 중에 내포교회 순교자는 2,600여명 정도로 추정.
당시 전국 교우 수는 23,000여명. 내포 교회 교우 수는 전국의 32.6%인 7,500여명 정도로 추정,
(당시 순교자들은 천주중심 신앙에 대한 절대적인 충실성을 강조했으며, 순교의 형벌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나눔의 실천과 교회 조직을 보호하려는 열정도 강했으며, 배교와 공범자에 대한 고발을 거부하였다.)
초기 내포교회의 특징 :
① 평민들에 의해, 농촌(평야) 지역에 건설된 민중교회로서,
② 1801년 신유박해 이후에도 (상당 수) 숨겨져서 존재했다고 판단되는 지하교회
-내포지역 출신 최초의 교우는, 사대부로는 홍낙민(덕산), 평민으로는 이존창(여사울은 당시 천안 소속).
-초기 로마교회의 비밀 선교 방식과 같다는 특징을 따서, ‘신리 교회=조선의 카타콤바 교회’라고도...
-사대부, 중인층의 교우 없이, 평민(농민)층들이 스스로로 조직하여 출발한 교회가 내포교회이다.
(*중국 교회의 선교사 없이, 조선인이 스스로 조직하여 출발한 교회가 조선교회라는 사실과 잘 대비된다.)
-곧, 이존창(천안), 박취득(해미), 원시장(홍주) 같은 평민들의 영성-삶의 방식들을 토대로 성립된 교회이다.
(*이들은 당시에 보통 ‘두민(頭民)’으로도 불렸던, 그 ‘지역 토착민 중에서 평민 상층에 속하는 유력자’였다.)
① 원래 ‘호랑이’ 등등 강한 성품의 평민층 지도자
② 입교 후에는 아주 온화한 성품으로 바뀜
③ 재산 분배 등 지역 주민들을 위한 복지에 힘씀.
(이런 유형의 내포교회 기록은 '다블뤼비망기'에 근거한 듯)
-천주교 관계 서적들의 한글 번역,
십자고상과 같은 성물 보급,
성인-의인-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조선적 교리 체계를 통한 선교 방식들도,
이곳 평민교회(민중교회) 성립과 관련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