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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현재 옥스포드 대학의 초빙교수로 영국에 나가 있는 김창남 기자가 영국의 축구 문화에 관한 글을 <오마이뉴스>에 보내왔습니다. 김창남 기자는 앞으로 월드컵이 끝날 때까지 축구의 본고장 잉글랜드에서 유럽 프로축구와 월드컵 소식을 <오마이뉴스> 독자에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또 축구 뿐만 아니라 오늘날 유럽사회가 겪고 있는 사회·문화 문제도 섬세하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 주> |
| 한국 사람이 영국에 산다는 것은 일단 몇 가지 문화적 차이에 익숙해짐을 의미한다. 하나는 시간에 대한 관념의 차이다. 뭐든 '빨리 빨리' 해결되고 끝장을 보아야만 하는 한국인의 성정으로 영국의 느리고 답답하기 짝이 없는 행정 절차와 일 처리 방식에 적응하려면 속 터지는 기간을 다소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서는 단 한 번의 전화통화 아니면 길어야 하루 나절에 해결될 일이 며칠, 혹은 몇 주일 걸리는 경우가 예사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전화가 가설되기까지 2주일이 걸렸고(지역에 따라서는 전화 가설에 한 달이 넘게 걸리는 경우도 있다) 그로부터 인터넷이 연결되기까지 다시 1주일이 걸렸으며, 우리 아이가 학교를 배정받아 입학하기까지는 꼬박 3주가 지나야 했다. 뭐든 기다리는 것, 그것도 불평 없이 속을 삭이며 기다릴 줄 아는 것이야말로 영국서 살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 덕목이다. 슈퍼마켓 계산대 앞에 늘어선 줄이 아무리 길어도, 기차가 아무리 연착을 해도, 심지어 가던 길을 거꾸로 되돌아가서 내려주며 다음 기차로 갈아타라고 해도 아무 소리 없이 기다리는 게 영국인들이다. 이건 단지 시간에 대한 관념의 문제라기보다 가능하면 주어진 조건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조용히 사는 것, 뭐든 급격한 변화보다는 늘 있던 대로 하던 대로 사는 것에 익숙한 영국인들의 삶의 방식에 기인하는 것일 터이다. 영국인들은 다른 사람들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런 서구적 개인주의야 우리도 익히 들어 아는 바이지만 때로 그런 개인주의가 이해할 수 없는 비효율성을 불러오기도 한다. 우리 아이 학교 배정을 신청하고 3주쯤 후에 편지를 한 통 받았다. 편지엔 당신 아이가 어떠어떠한 학교에 배정되었는데 집에서 3마일 이상 떨어져 있으니 통학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며 통학 서비스 담당자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외국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서툴기 짝이 없는 영어로 전화를 해서 뭔가를 해결해야 하는 일만큼 진땀 나는 일은 없다. 겨우 담당자와 연결이 되어 한참을 더듬거리며 설명을 하고 났을 때, 담당자는 내게 자신의 주소를 불러주며 그리로 내가 받은 편지를 복사해 보내라고 했다. 역시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전화로 알파벳과 숫자를 받아 적는 일도 영어 서툰 자의 고통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그 고통을 무릅쓰고 겨우 받아 적어 놓고 보니 그가 불러준 주소란 것이 내게 편지를 보낸 바로 그 사무실의 주소가 아닌가. 그러니까 바로 같은 사무실에 앉은 두 사람이 각기 따로 내게 편지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영국식 시스템인 걸 어쩌겠는가. 광적인(?) 영국 축구팬들 영국인들의 축구에 대한 열정도 영국에 살기 위해 익숙해져야 할 문화 가운데 하나다. 축구에 대한 영국인들의 열정은 다소 기괴할 정도다. 축구 좋아하는 거야 유럽 대부분의 국가가 다 그렇지만 영국인들은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예컨대 경기장을 찾는 관중 수만 보아도 프리미어리그의 관중 수는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등 다른 빅리그에 비해서도 게임당 평균 1만 명 이상 더 많다. 이는 TV 화면만 보아도 확인할 수 있는데 예컨대 이탈리아 세리아A나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경우 아무리 빅 매치라 해도 관중석에 빈자리가 적지 않게 눈에 띄지만, 잉글랜드의 경우 프리미어리그는 물론이고 2부 리그인 챔피언십 리그나 3부에 해당하는 리그 1까지도 빈자리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잘 알려졌다시피 영국에는 아무리 작은 동네라도 축구 클럽이 조직되어 있고 이들은 모두 크고 작은 지역 리그에 소속되어 시즌 내내 경기를 펼친다. 5년 전 처음 영국에 왔을 때 머물렀던 작은 동네를 방문했는데 때마침 축구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경기장 규모도 작고 관중도 많지 않았지만 잉글랜드식 축구 열기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경기 양상도 과격해서 난투극과 함께 선수 한 명이 퇴장당하는 상황까지 연출되었으니 나 같은 국외자에게는 뜻밖에 만난 더할 나위 없는 구경거리였던 셈이다. 내게 더욱 놀랍고 흥미로웠던 것은 관전하는 관중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내가 평소 보았던 영국인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시종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삿대질을 해댔으며 심지어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선수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질 즈음에는 관객들이 운동장에 뛰어들어 집단 패싸움이라도 벌이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소리를 질러댔다. 평소 바로 옆 사람의 일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사람들이 이 순간만큼은 분명하게 우리 편끼리의 짙은 연대감 속에 있는 듯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경기가 끝난 다음이었다. 경기 내내 그 난리를 치던 사람들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얌전해지면서 굿바이 어쩌구 인사를 나누며 각자 헤어져 돌아가는 것이었다. 축구장 안에서 보이는 모습과 축구장 밖의 일상에서 보이는 모습이 이토록 다르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영국의 축구 문화, 혹은 영국 사회에서 축구가 지니는 문화적 의미를 이해하는 단서가 아닌가 싶다. 19세기 후반 자본가들의 장려로 확산 원래 19세기 초반까지 주로 학교에서 행해지던 축구가 영국 사회에서 대중화된 것은 19세기 후반 잉글랜드 중부와 북부의 공장 지대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에게 확산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노동자들에게 축구를 하도록 장려한 자본가들이 많았는데 그들로서 축구는 노동자들의 여가 시간을 조직하고 육체적 정서적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수단으로 여겨졌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축구(혹은 다른 무슨 스포츠든)를 그저 노동계급에게 제공된 오락 거리이며 이를 통해 사회에 대한 불만을 없앰으로써 결과적으로 체제를 유지하는 도구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그렇지만, 축구장 안과 밖에서 극명하게 달라지는 영국인들의 모습을 보면 그런 도식적 설명이 제법 그럴 듯하게 느껴진다. 하루 앞을 예측하기 어렵고 일주일이 멀다 하고 큰 이슈가 터지는 한국 사회와 비교하면, 영국 사회는 거의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만큼 정적이다(물론 상대적인 의미에서다). 좋게 말하면 예측 가능한 사회이고 나쁘게 말하면 정체된 사회인 셈이다. 우리의 시각에서 보면 답답할 정도로 느려터진 그들의 시간관념이나 주어진 조건을 불평 없이 받아들이는 순종적 태도,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개인주의 같은 것도 그렇게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한 사회에서 형성된 삶의 방식일 터이다. 어쩌면 축구장은 이 예측가능성으로 꽉 찬 사회에서 거의 유일하게 예측불가능한 공간이며 영국인들이 개인을 벗어나 집단의 일원으로서 자신을 느끼며 일상의 변함없는 리듬을 흔들고 뒤집는 거의 유일한 일탈의 시간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것으로 인해 축구장 밖의 삶의 방식과 일상의 리듬이 조금이라도 다치거나 변화하는 일은 없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3월 1일이 월드컵을 꼭 100일 앞둔 날이라고 한다. 영국에서 월드컵 D-100일의 특별한 움직임이나 징후를 찾기는 어렵다. 정규 시즌이 아직 한창 진행 중이고 프리미어리그와 UEFA 챔피언스리그의 중요한 경기가 즐비하게 남아 있는 마당에 월드컵은 아직 이들의 큰 관심사가 아니다. 물론 정규 시즌이 끝나고 월드컵이 다가오면 이들의 관심은 당연히 월드컵에 쏠릴 것이다.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월드컵의 시간 속에서 축구를 통한 이들의 일탈적 경험과 집단 정체성은 1년 내내 계속되는 정규 클럽 경기의 그것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게 마련이다. 그 변화를 지켜보는 것도 각별한 즐거움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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