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서 울다"를 읽고 (펀글)

2005. 1. 26. 오전 6:51:56

글자

전에 아니 아직도 관심을 갖고 있는 교회 (산울교회)의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독후감도 이렇게 깊은 (좋은) 내용이라면 본 책 한번 꼭 읽어 봐야

할것 같군요.

 

산울교회 홈페이지: http://my.dreamwiz.com/sanul/index.html

 

=========================================================

 

 

'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이런 질문 한번쯤 안해 본 사람이 있을까?
제럴드 싯처의 '하나님 앞에서 울다'를 읽으며 나는 다시 이런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상실이나 결핍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고통을 겪는다. 그런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 중에 그 누가 여기에 만족할만한 답변을 할 수가 있는가? 인간의 일생 중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란 아마도 고통에 대한 물음이 아닐까. 그것은 누구라도 묻기 이전에 이미 문제가 되어있었을 테니까. 야속하다고? 어찌할 것인가. 우리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는 답을 찾아 헤매일 때조차도 언제나 고통은 외딴 절벽처럼 다가오는 현실이었고 제기되는 문제는 언제나 그 다음 일이었다.

먼저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을 요약하는 것이 이해하기 편할 듯하다.
 
『정말 사랑하는 부부가 있었다. 하지만 결혼 하고 한참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둘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하여 10여년 만에 차례로 얻은 아이 넷... 부부에겐 더이상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이들에게 인디언 생활을 체험해주기 위해 함께 캠핑장에 놀러갔다 돌아오던 저녁. 이들 가족은 중앙선을 마주 달려오던 음주운전자의 차와 충돌했고, 이 사고로 남편은 아내와 딸, 어머니 3대를 한꺼번에 잃고 하루아침에 아이 셋과 홀로 남겨졌다.

사고가 있기 전날 밤, 아내는 성가대 연습을 마치고 밤 10시쯤에 집에 돌아왔다. 둘은 뜨거운 초콜릿을 함께 마신 다음 침대에 누웠다. 12시 30분쯤까지 아내는 오늘 하루 있었던 일과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를 나누며 감격에 마지 않았다. "여보, 지금보다 더 행복한 때는 없을 것 같아요. 하나님의 선하심이 이처럼 크게 느껴진 적이 없어요. 너무 놀라워요." 그리고...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서 아내가 죽었다.

슬픔이랄지, 삶의 의미랄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이 비극적인 사건은 대문짝만하게 신문을 장식했고, 남편은 중상을 입은 아이의 뒷치닥거리와 어수선한 주변의 일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장례식날, 나란히 놓인 세개의 관을 보는 순간, 그는 더도 덜도 아니고 딱, 죽고만 싶었다. 』

바로 저자 본인의 이야기다. 처음 이 글을 대하는 순간 나는 우선 가슴부터 탁 막혀왔다. 물론 이를 우리가 매스컴을 통해 늘상 대하는 사건이나 사고들 중의 하나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때마다 느끼게 되는 것은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한 당사자의 마음이나 그 내면의 모습은 어떤 것일지 궁금하곤 하였다. 하필 그게 왜 궁금했을까. 후에 깨달은 거지만 그 대답을 이 책을 통해 발견하게 됐다.
그는 말한다. 우리가 물어야할 물음은 '왜 하필 내가?'가 라는 물음이 아니라 '왜 내가 아닌가?'라는 물음이라고. 그래서였음인가, 제목부터가 마음을 깊게 할퀴고 지나간다.
'하나님 앞에서 울다'
그는 왜 울었는가. 그런데, 그게 '딱, 죽고만 싶었다'는 한 구절로 대변되는 것이었으니 난 그저 숨이나 턱 막혀올 밖에.

그러고보니 생각나는 게 있다. '지선아 사랑해'로 유명한 이지선 양의 오빠이야기다. 동생이 사고를 당한 날 새까맣게 타버린 몸을 차에 싣고 병원을 전전하다가 가망없다는 말에 오빠는 절망한다. 다시 차를 몰고 한강다리를 건너면서 그 순간만큼은 그대로 동생과 함께 딱 한강물에 뛰어 들고 싶은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같이 죽고 싶었다는 것. 오호라, 그것이 바로 인생의 막장에 다다른 자의 심정이 아닌가.  
 
어줍잖으나 그동안 과문한 책읽기 경험 가운데서도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상실과 고통을 토로해낸 책들이 꽤 되는 편이다. 그런 책들을 읽을 때마다 공통적으로 가지게 되는 느낌은 모종의 안도감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면 아직까지는 내게 그런 끔찍한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일말의 미안한 마음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나의 경우는 어떤가. 살아오면서 다소의 상실을 겪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이나 적어도 책을 통해 읽은 상실의 고통과 비견될만한 정도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나는 그것을 지금까지 감사히 여겨오고 있고 당연히 앞으로도 내게 그러한 경험이 없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미래의 어느 순간, 자신이나 그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상실의 고통에 필적할만한 혹은 그보다 더한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들어가는 말을 통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책은 독자들이 비극적인 상실을 회복하거나 잘 피해가는 요령에 대해 말할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서 '회복'이라는 의미가 상실 이전의 삶과 감정을 고스란히 되찾는 것이라면, 상실을 경험한 후에 원래대로 '회복'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런 생각은 오히려 자신을 해치는 기대심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믿고 있다. 대신 이 책은 상실을 안은 상태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상실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우리 삶을 확장시키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나쁜 경험을 통한 복된 결과'를 말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쓰는 일은 내가 경험한 황망함과 슬픔을 줄여주지는 못했다'고 고백한다. 또한 독자들이 겪은 상실과 비극을 그럴듯하게 해몽하고 정당화하는 이유를 제공하지도 않으며 온갖 나쁜 경험과 잘못된 것들을 제거하지도 좋게 해석해주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 누구도 고통을 줄여주거나 없게 하는 일을 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혹여,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했으므로 이제 그만 책을 덮을 생각을 하는 독자가 있을까. 그렇다면 그런 사태야말로 저자가 진실로 의도하는 바가 아닐 뿐만 아니라 그지없이 안타까운 일임에 틀림없다. 당신이 만약 지금 무언가의 상실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당신은 지금 자신의 깊은 고통에 동참하여 이해해주고 함께 울어줄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을 외면해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크던 작던 누구에게나 고통의 기억은 있다. 그런데 가령 고통이라는 것이 그 경중을 따질 수도 있는 문제일까? 그러다 문득 전혀 엉뚱하고 쓸데없을 것 같은 질문 하나 던져본다.
전쟁이나 혼란의 와중에 있을 때의 고통이 더 클까, 아니면 평화시의 고통이 더 클까.
아마도 열에 아홉은 후자 쪽에 더 비중을 두리라. 그러나 저자는 나의 이런 질문에 다음과 같이 쐐기를 박는다.

"우리가 겪는 모든 상실은 하나하나가 특별하고, 나름대로 고통을 준다. 미치는 방식이 다를 뿐이지 각각의 상실은 하나같이 고통을 준다. 내가 겪는 상실은 다른 아무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겪는 아픔 또한 다른 이들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반대로 나는 다른 이들이 겪는 상실과 그 고통을 결코 온전히 알지 못한다."  

그랬다. 하나의 생명이 온천하보다 귀하듯 한 생명이 당하는 고통 또한 그만큼의 무게로 다가오는 것이다. 반복하지만 누구나 상실의 아픔은 있다. 다만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이후의 과정에서 우리의 반응은 어떠했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의 문제이겠다.

그럴 때 정작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것은 삶에 자신이 있을 것만 같던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발견하는 일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좌절감, 기진맥진함 끝에 오는 우울증으로 오랫동안 시달리게 되는 과정은 차라리 공식과도 같은 것. 그러한 과정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어느 순간 세상을 대한 은근한 원망으로까지 이어진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지만, 세상은 내가 감당했던 많은 책임들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지 않았다"

"상실을 겪으면서 나는 하나님이 겁도 많고 수수께끼같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 나에게는 그분의 주권이 한겨울의 높은 절벽처럼 보였다.........그 것에는 내가 가까이 하거나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고통을 보시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시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돌아온 건 외로운 메아리뿐이었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이다. 그러기에 가장 예민한 부분이기도 하다. 삶이란 어차피 선택의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세상에 대한 복수 혹은 반항과 같은 위험하고 극단적인 생각도 해볼 수가 있다. 허나 대부분은 그러한 마음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다. 이럴 때 자연스레 자신의 내부로 향하여 나타나는 자아의 문제해결 방식이 우울증이라는 부작용으로 드러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저자는 여기에 어떤 치유 방법을 제시하는가.

그것은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에 대한 자각이다. 저자는 훗날 그 치유의 과정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가장으로서 언제까지나 슬픔에만 잠겨 있을 수 없음을 알고 우선 시급하게 해결해야할 일들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점차 그 일이 그 이전부터도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를 깨닫는다.

"우선 나는 일상의 삶이 얼마나 놀라운지 알고는 충격을 받았다. 단순하게 말해서 산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신성한 것이 되었다. 시험 문제를 내면서, 강의실로 가는 도중에 학생들과 잡담을 나누면서, 잠들어 있는 아이에게 담요를 덮어 주면서, 나는 내가 무언가 신성한 것을 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 이 평범한 일상의 매순간들에 대해 나는 그때까지도 완전히 깨어있지 못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얼마나 심중한 것들인지 흐릿하게나마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빅터 프랭클의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을 다시 찾아 읽으며 전혀 새로운 안목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의미를 찾아가게 된다.  

"어떤 식으로든 삶에 의미가 존재한다면, 고통 속에서도 의미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은 우리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일부분이다. 운명이나 죽음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고통과 죽음 없이는 인간의 삶은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

저자가 사고 이전까지 터득하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그 실체가 바로 고통과 죽음 없이는 인간의 삶이 완전해질 수 없다는 역설이었다면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불가해할수록 삶은 아름답고, 결국 삶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신성하다고 말해야 하는가? 이른바,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단독자'로서의 인간 실존은 이 지점에서 극에 달한다. 그러기에 한동안 고통의 통로를 지나고 극심한 심적 우울증의 상황에까지 직면하였던 저자의 경험은 고귀한 것이 된다. 하여 그가 그런 현실 속에 매몰되지 않고 견뎌낼 수 있었던 믿음을 가지게 된 비결이 없을 수 없다. 그것을 밝힌 장면은 참으로 애처롭지만 환상적이고 그래서 더욱 은혜롭다.

"화해는 내게 백일몽의 형태로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말똥말똥한 눈으로 침대에 누워 있다가, 나는 새로운 빛 속에서 그날의 사고를 보게 되었다. 나는 사고가 있었던 곳 근처 벌판에서 세 아이들과 함께 있었다. 우리들 네 사람은 모퉁이에서 커브를 도는 우리의 미니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날 사고가 일어났을 때 처럼, 마주 달려오던 차가 중앙선을 넘어 뛰어들었고, 우리 벤과 충돌했다. 우리는 마치 현실에서 그것을 경험하는 것처럼, 아주 생생한 느낌으로 그 폭력과 대혼란과 죽음을 목격했다.

갑자기 아름다운 빛이 사고 현장을 감쌌다. 그 빛은 주위를 밝게 비추었다. 그 빛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게 부서진 사고 현장의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빛 때문에 우리는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때 사고가 일어난 그곳에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천국으로 맞아들이기 위해 거기에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또 우리를 위로하시려 거기에 계셨다. 그분은 사고에서 살아남은 우리를 새로운 삶의 길로 보내려고 거기에 계셨다.

백일몽을 경험하고 나서도 나는 '왜 사고가 일어났는가'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또 그 사고가 내게 유익했다는 확신도 얻지 못했다. 사고로 인한 나의 슬픔을 씻고 행복을 대신 얻지도 못했다. 그러나 평화를 얻었다."

스테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어갈 때 본 환상이 바로 그런 것이었을까.
아니면 옛날 옛적 에녹이 그런 환상 속에서 홀연 하늘로 들려 올려진 것일까.
순간 나는 마침내 눈물이 핑 돌고 만다. 그가 본 환상을 나는 한낮 개꿈이요 백일몽에 불과한 것이라고 차마, 아니 결코 말할 수가 없음인 게다. 허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일상이 아니요 믿는 자들이 마지막날에 볼 환상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다만 영광의 그 날에 이르기까지는 소망 가운데 견뎌 내야만 하는 것이 인간의 옷을 입은자로서의 삶의 현실이다. 그러기에 상실은 견뎌내는 것이지 극복되지 않는 것이라는 저자의 통찰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어떻게 견디는가.  

"내 아이들은 아직도 슬픔을 느낀다. 나도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내내 슬픔을 느끼며 살기를 기대한다. 묘지를 갔다 온 다음 날 한밤중에 데이비드가 나를 보러 위층으로 올라왔다. 녀석은 울고 있었다. 내 무릎 위로 올라오더니 잠시 동안 거기에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러더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다고 캐더린도 최근에 어떻게 하면 엄마 없는 여자가 될 수 있는 거냐고 내게 물었다. 존은 툭하면 책꽂이에서 앨범을 꺼내놓고 자기 어릴 때 사진을 훑어본다. 그러면서 애타는 표정으로 말하곤 한다. "엄마가 보고 싶어." 우리 집에서는 이러한 슬픔이 거의 정기적으로 표현된다. 그 슬픔은 소란스러움이나 흥겨운 말다툼처럼 아주 일상적인 부분이다. 상실은 우리 가족의 일부분이다."

마지막 인용구절, 상실을 가족의 일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지, 그것이 어느 정도의 깊이를 지니는지 지금의 나로서는 가늠할 수가 없다. 감히 그런 표현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로되 자신의 상실을 직접 체휼하고 삭히고 품어내지 못하고서는 내어놓을 수 없는 소리가 아닌가. 더구나 현실에 대한 지극한 긍정과 앞으로 부딪칠 수 있는 그 어떠한 상실까지도 품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신과 용기가 필요한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안과 흥분과 기대를 동반한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무한히 열린 희망의 바다로 항해해 나가야할 여정이기도하다.  

기실 상실의 회복불가능성은 무시로 우리를 절망하게 한다. 지금까지 이를 극복하고 만회해 보고자하는 인간의 노력 또한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한 여러 시도들 가운데 가장 과학적인 접근법이 아마도 세간의 생명복제 논의가 아닐까 여겨진다. 상실의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음미해 볼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론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 오죽하면 그런 시도까지 하랴 싶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음인가. 이미 그 실현도 목전에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 기대되는 효과는 아직 증명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윤리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도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슬픔을 대신하기 위해 그와 똑 같은 유전자를 이용하여 동일인을 복제해낸다는 것이 복제를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 할 것이나 그것은 인간 욕망의 무상함을 더욱 크게 일깨워 줄 뿐 사실상 말이 안 된다고 본다. 그렇지 않은가. 흘러간 시간이 그리울지언정 붙잡을 수 없고 나의 사랑하는 이 또한 광대한 시간 속에서 잠시 스쳐지나간 유일무이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기에 사랑은 고귀한 것이 되며 때론 애절한 것일 수 있음이다. 그리고 사실상 복제를 한다하더라도 그것은 또 하나의 생명체인 것이지 이전과 똑같은 생명체일 수도 없다. 애시당초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인간의 차원이 아니었듯 唯一無二의 상황을 唯一有二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방법이 아니라 또 다시 상실을 체험하게 되더라도 다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용기인 셈이다. 이런 깨달음을 통해 저자는 '가장 큰 상실은 다시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 영혼의 죽음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그런 사랑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저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능히 그러실 수 있는 분 이셨다. 상실을 당해 상심의 극한에 있을 때 같이 상심하며 함께 울어 주셨고 고통 당할 때 함께 고통 당하고 괴로워했으며 사랑하는 이가 죽음을 당하였을 때 능히 함께 죽어주신 분이셨다.

그것으로 끝이었는가? 아니다. 그분은 죽음을 이기신 분이셨고 부활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셨다. 그리고 그 빛 가운데 모이기를 마다하지 않은 모든 이들과 함께 영광 중에 부활하실 것이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그런 하나님을 신뢰한다. 저자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깊이 깨닫고 감격해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본질상 하나님'(p262)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다시 처음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우리가 고통받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책을 정독하고 다시 살펴보는 이 순간까지 나는 그 대답을 찾지 못한다. 이제야 고백하건대 이에 대한 대답은 분명 우리 인간이 답해야하는 영역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안타깝지만 나는 그러한 물음이야말로 인간의 전적인 무능에 대한 최후의 몸부림이자 비탄에 빠진 자의 울부짖음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무언가 마무리를 위해서는 그 답을 내려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이 나를 짓누른다. 그렇지만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그런 대답을 할 자격조차도 없는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 답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그 고통받는 자와 함께 계셨다'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결론인 셈이다.

하지만 나는 만족하지 못한다. 흔한 말로 믿음이 부족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로서의 나는 '하나님은 늘 나와 동행하시는 친구이자 부모가 되어주시며 내 삶의 주인이시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기에 우리의 미래까지 책임져 주실 분이심'을 믿을 수밖에 없다. 이를 누가 부정할 수 있는가. 그것이 이른바 믿는자로서의 특권인 이상.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