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릉에서 드리는 편지 5

2007. 1. 28. 오후 11:07:02

글자

오랜만에 인사 드립니다. 매디슨을 잊고 사는 건 아닌데, 소식을 전하는 것이 늦었습니다. 다가오는 음력 설을 맞아 축복의 한 해를 기도 드립니다.

 

저희 세 식구는 연말 연시를 잘 지내왔습니다. 다만 작년 늦가을에 건강검진을 받으신 어머니께서 건강에 자신감을 잃으시고 좀 우울해하시기도 했는데, 주변의 격려와 재검 결과가 나쁘지 않았던 덕에 다시 마음의 평화를 찾으신 것 같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느낍니다. 데레사는 생각 이상으로 힘든 직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잘 버텨내다가 그저께 밤부터 몸이 좋지 않다고 하더니 주일인 오늘은 침대에서 등을 떼지 못했습니다. 저만 별 탈 없이 잘 지내는 것 같아 식구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제 직장 얘기를 좀 들려드리겠습니다. 2주 전쯤에 원장님과 보직자분들, 그리고 원내의 모든 박사들이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원내의 의사결정과정에서 생겼던 문제점과 앞으로의 방향, 그리고 당면한 여러 과제들에 대한 토론회가 하루 종일 진행됐는데, 사회자만 있었을 뿐이지 완전한 원탁회의였습니다. 대화에 성역이 없고 누구를 대상으로도 성토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누구의 얘기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얘기인지가 중요하다는 회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고 뿌듯하게 느껴졌습니다.

 

어쩌다 보니 우리 사회에 존재해왔던 많은 권위와 성역이 몇 년 사이에 상당히 허물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도 수직적 의사소통이나 직언이 사실상 불가능한 위계조직이 많습니다. 광부들이 지하 탄광에 들어갈 때 카나리아를 데리고 갑니다. 부지런히 울던 카나리아가 입을 다물면 유독가스가 탐지되고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에 갱을 탈출한다고 합니다. 어느 사회, 어느 조직이든지 카나리아의 경고가 사라지기 전에 위기를 자각하고 변화를 실행에 옮겨야 할 것입니다.

 

좀 이색적인 경험도 했습니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이한 전국 고교생 경제경시대회의 출제를 맡게 돼서, 7 8일간 모처에 감금된 상태로 문제를 냈습니다. 오후에 잠깐씩 주어졌던 감독자 동반 하의 오솔길 산책은, 마음 내키면 언제든 할 수 있던(그래서 시간이 있어도 잘 하지 않던) 산책을 권리 수준으로 인식하게 했습니다. 교우님들께서도 산책이나 운동이나 기도나 묵상이나 독서를 권리로 생각하고 달콤하게 즐겨보십시오.

 

합숙 마지막 밤에는 작업용 프로젝터를 이용해 천하장사 마돈나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그영화에는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고등학교 1학년생 오동구가 나옵니다. 씨름부에 들어가 주장의 냉대 속에도 땀을 흘리는 동구의 목적은 씨름대회의 우승상금으로 수술비를 마련해 여자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권투선수였던 아빠는 부상으로 운동을 그만 둔 후 자기혐오에 빠진 알코올중독자입니다. 엄마는 아빠에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이 실직자에다 술 퍼먹고 소리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지는 게 싫어. 그런데 당신이 진짜로 싫은 이유가 뭔지 알아? 당신이 자기 자신을 미워하기 때문이야. 적어도 우리 동구는 자기를 미워하지는 않아.

 

영화의 엔딩 씬은 동구가 여자 옷을 입은 무대가수가 되어 마돈나의 Like a virgin을 율동과 함께 열창하는 장면입니다. 무대 아래에서는 동구를 응원하는 엄마와 씨름부 선배들이 감격스런 환호를 보냅니다. 그러나 동구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이해 받고 인정 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엄마도 동구에게 앞으로 더 큰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이해 받고 인정 받고 사랑 받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며 그런 희망을 갖는 것은 과욕입니다. 오늘 미사시간에 읽은 루카복음을 생각합니다. 나자렛 회당에 가신 예수님에 대해 경탄과 시기와 의혹과 분노의 감정이 섞인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갔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어떤 기적을 행하셔서 그들에게 외경심을 갖게 하시지도 않으셨고, 감동적인 웅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고향 사람들로부터 이해 받고 인정 받고 그들 모두를 자신의 팬으로 만드는 데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복음사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셨다.

 

주변 사람, 특히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이해 받거나 인정 받지 못해 상처입고 괴로울 때, 예수님을 따라 그 고통과 답답함의 돌무덤을 그냥 가로질러 떠나는 결단과 용기를 배우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성당 게시판 주보 메뉴에 흐르는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매주 그때그때 어울리는 좋은글과 음악을 고르는 예쁜 짓에 열심일 도미질라 자매님이 떠오릅니다. 매디슨 공동체를 위해 애써 주시고 구성원이 되어 지켜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지금도 매일 아침 매디슨 성당 게시판을 들러 자양분을 얻고 있습니다. 한국 오시면 꼭 연락 주십시오.

 

김 아우구스티노 드림

댓글 8

  • 2007년 1월 30일 오후 1:55

    반가운 소식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항상 그렇듯 따스함이 가득한 형제님의 글입니다. 가족분들 모두 건강하시기를....

  • 2007년 1월 30일 오후 2:09

    드디어 제 5편의 방영이군요, "Heesam's Life in Korea"라는 드라마... 다음 씨리즈도 계속 기대할게요. 드라마는 역시 중독성이 있다니까요, 안보면 안되는...

  • 2007년 1월 30일 오후 2:10

    늦었지만, 건강하시고 좋은 해 되세요.

  • 2007년 2월 2일 오전 12:00

    생각하게 만드는 삶의 이야기를 잊지않고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있는 영화평두요. 모두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 2007년 2월 2일 오후 12:02

    자애로운신 어머님, 유머짱인 데레사 자매님께 안부전해주세요. 언제 한번 뵈요. 여름에 리드비나가 오면 1구역 한국지회 모임 한번 할까요?

  • 2007년 2월 3일 오전 5:09

    오랜만에 듣는 소식 반갑습니다. 가끔씩 들려오는 소식이지만 매일 아침 자양분을 여기서 얻어가신 다는 소리에 기분이 좋네요.. ^^

  • 2007년 2월 7일 오전 1:38

    소식 올려주셔서 늘 감사해요. 물리적 거리가 무색하리만큼 형제님의 가까운 마음이 느껴져서 참 행복해집니다. 늘 건강하세요.

  • 2007년 2월 11일 오전 6:17

    반가워요! 그런데 왜 예수님은 고향사람들을 포기(?)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