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가는 길
나는 몇 해 전 한 단편영화를 제작하기 위하여 전국의 우물을 조사하고 다닌 적이 있다. 영화의 주요 소재인 한국의 전통 우물을 찾는 일이 생각보다 무척 어려웠다. 그러던 중 한 동료로부터 강화도에 내가 찾고자 하는 모양의 우물이 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다음 날 나는 아침 일찍 강화행 버스에 올랐다. 마침 출근시간을 막 넘긴 후라 버스는 비교적 한산했다. 내가 찾으려는 우물이 곧 발견되리라는 부푼 희망을 가지고 피곤한 몸을 뉘여 차안에서나마 선잠을 청하려하는데, 줄곧 아까부터 흐느끼는 앞좌석의 두 여인에게 자꾸만 신경이 갔다. 한눈에 보아서 모녀 관계로 보이는 젊은 아낙과 중년을 훨씬 넘긴 아주머니는 서로 부둥켜안고 아주 작고 나즈막한 소리로 흐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맑고 고요한 아침에 대관절 무슨 사연이 있기에.... 아름다운 저 풍광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오히려 더욱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두 모녀의 낮은 흐니낌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던 내 선잠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나는 느린 속도로 이 모녀의 슬픔에 점점 감정이 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이 슬퍼하는 원인에 대해서 혼자 상상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일까? 아니면 오빠이면서 동시에 아들인 사람이 죽었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내가 선잠에서 깨어나 종점인 강화읍에 다다랐을 때 안타깝게도 앞좌석은 이미 비어 있었다. 앞뒤를 훑어보았지만 그 모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세월이 흐른 뒤, 나만의 휴식 시간인 선잠마저 깨우려 드는 주위의 흐느낌 소리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짜증스러울 때 나는 가끔 그날, 강화 가는 길에서 만난 두 연인에 대해서 그들의 슬픔을 상상하며 마음속 깊이 그들을 위로했던 생각을 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속 깊은 위로란 바로 그들과 한마음이 되려는 순진한 상상에서 비롯하는가 보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로마 12, 1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