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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세바스띠아노(sebastian)
골 지방의 나르본느 태생인 성 세바스챤은
283년경에 로마에서 로마 군인이 되었고,
마르첼리아노와 마르쿠스를 격려하여,
죽음으로써 신앙을 지키도록 격려했던 열렬한
크리스챤이었다. 그는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는데,
그들 중에는 재판장인 니코스트라투스가 있었고,
그의 아내 조에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조에는
벙어리였으나, 그의 기도로 완쾌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간수 클라우디우스, 로마의 집정관
크로마시누스와 그의 아들 띠부르시우스등이다.
그는 또 황제 디오클레시아노로 부터 친위대
대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그가 크리스챤인줄
몰랐다고 한다. 세비스챤이 신자임이 드러난 것은
막시미안의 크리스챤 박해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는 즉시 처형될 입장이 되었다.
그는 화살을 맞고 쓰러졌으나, 성 까스뚤로의
미망인이 그의 시신을 찾으러 가서 보니,
아직 살아있음을 보고 극진히 간호하여 회복시켰다.
그 후 세바스챤은 황제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여
크리스챤에 대한 그의 잔인성을 고발하자,
황제의 명으로 즉시 사형에 처하였다.
그는 군인, 운동 선수 그리고 궁술가의 수호성인이자
전염병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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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우티미오(대)- euthymius
아르메니아 밀리테네에서 어느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그곳의 주교 밑에서 공부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그는 교구 내의
수도원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29세 되던 해에
자신도 예루살렘 교외의 파란 라우라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411년경에, 그는 그곳을 떠나
동료들과 함께 예리코 근교의 어느 동굴에서
은수자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 옴으로 그는 이곳의 원장으로 테옥티스토를
임명하고, 자신은 더 한적한 곳으로 물러났다.
이곳에서도 많은 제자들이 생겼고, 또 수많은
아랍인들이 포함된 개종자를 얻었다. 이리하여
예루살렘의 총주교 유베날은 그를 주교로 축성하여
아랍 개종자들을 사목토록 배려하였고,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는 길목에 그를 위한
수도원을 세워주었다. 그는 수많은 군중들에게
설교하여 개종자를 얻었는데, 그들 중에는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미망인인 에우독시아도
포함되어 있다. 그녀는 에우티미오의 권고를 듣고
아리아파에서 물러났고, 459년에 정통 가톨릭으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그는 사막에서
66년을 살다가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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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파비아노(Fabian)
로마의 평신도이던 파비아노는
236년 1월 10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는데,
선거를 실시하는 동안 비둘기 한 마리가
그의 머리 위에 내려 앉았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의 업적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이단 문제로 인하여
아프리카의 람베사의 프리바투스 주교를 단죄하였고,
가다꼼바에서 행한 놀라운 복원사업 등이 돋보이며,
데치안의 크리스챤 박해 초기에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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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페친(Fechin)
성 페친은 콘노트의 레니에서 태어나
성 나티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 후 그는
포바르에 수도원을 세웠고, 많은 수도자들을
양성하였다. 또한 그는 무서운 페스트를
아일랜드에서 몰아냈던 위대한 성인으로
공경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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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에우스토키아 칼라파토(Eustochia Calafato)
시칠리아(Sicilia) 섬 지르젠티
(Girgenti, 오늘날의 아그리젠토)의
마태오(Matthaeus, 2월 3일)가 메시나에서
설교할 때 칼라파토(Calafato)의 젊은 백작부인인
마틸다(Matilda)가 그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그녀는 그 후 자신의 재산을 모두 포기하고
작은 형제회의 재속 3회원이 되었다.
얼마 동안 그녀에게는 자식이 없었으나 하느님께
열렬히 기도드린 응답인지 딸 아이 하나를 갖게
되었는데, 어떤 행인이 백작 부인을 만나서
그 아이는 구유에서 낳아야 한다고 일러 주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 아이를 낳고 보니 너무나 귀엽고
아름다운지라 이름을 스메랄다(Smeralda)로 지었다.
어릴 때부터 열심이던 이 아이는 아버지
베르나르두스(Bernardus)가 적임자를 골라 결혼
서명까지 하였으나 그녀 자신은 동정서원을 발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결혼 상대자는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 후 부친이 사망하자
스메랄다는 바시코(Basico)에 있는 산타 마리아
(Santa Maria) 수도원에서 클라라회 수도복을 받고
이름을 에우스토키아(Eustochia)라고 하였다.
성녀 에우스토키아는 귀족 출신이면서도
가난 정신이 뛰어났고, 우리 주님의 수난에 대한
신심과 통회 정신이 극히 열렬하여 전 수녀회의
귀감이 되었다고 한다. 바시코에서 11년을 살고난 뒤
그녀는 더욱 엄격한 규칙을 원하였는데,
교황 칼리스투스 3세(Callistus III)가 성 프란치스코의
규칙을 따르는 수도회 설립을 인가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몬테 베르지네(Monte Vergine)에
수도원을 세우고 회원을 모집하였으나 초창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성녀 에우스토키아는 35세에
선종하였고, 1782년부터 공경받기 시작하였다.
그 후 1782년 교황 비오 6세(Pi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8년 6월 1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Joannes Paulus II)에 의해 메시나에서 시성되었다.
그녀는 에우스토키움(Eustochium)으로도 불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