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감탄하려고 산다, 아닌가?

2012. 2. 27. 오후 1:5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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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감탄하려고 산다, 아닌가?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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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모든 행위 뒤에는 감탄의 욕구가 숨겨져 있다. 음악을 도대체 왜 작곡할까? 그림은 또 왜 그릴까? 먹고사는 것과 아무 상관없는 이런 종류의 다양한 인간의 행위는 도대체 왜 하게 된 것일까? 간단하다. 감탄하기 위해서다.

     왜 여행을 가는가? 에펠탑을 ‘보러’ 가는가? 아니다. 에펠탑을 보는 순간 모두 “와~!” 하며 그 꼭대기를 올려다본다. 에펠탑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에펠탑을 보고 ‘감탄하러’가는 것이다. 
   여름이면 다들 바닷가로 휴가를 떠난다. 왜 바닷가로 가는가? 바다 ‘보러’ 가는가? 아니다. 바다가 보이는 순간 모두를 한결같이 반응한다. “우와~!” 바다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바다 보고 ’감탄 하러‘ 가는 것이다.

    산에 모두들 열심히 올라간다. 도대체 왜 산꼭대기에 오르는가?

누군가는 폼 잡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산에 오른다”고. 또라이다. 왜 그렇게 산에 오르는지 자기도 모르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폼 잡고 이야기하는 거다.
산꼭대기까지 죽어라 오르는 이유는 건강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건강하려고 산을 오른다면 중간까지 왔다 갔다 하면 되지, 왜 그렇게 죽어라 하고 정상까지 올라가는가? 산에 오르는 이유는 산이 거기 있기 때문도 아니고, 건강을 위해서도 아니다. 감탄하기 위해서다.
산꼭대기에 올라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우와~!” 하며 감탄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 엄마가 날 보고 끝없이 반복해서 해준 그 감탄이 그리워서다. 나이가 들수록 아무도 나를 보고 감탄해주지 않는다. 감탄한 일도 없다. 그래서 한국 남자들이 죽어라 골프장에 가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한국 남자들만큼 골프에 미친 사람들이 없다. 전날 손바닥이 물집이 잡히도록 연습하고 새벽 네 시면 벌떡벌떡 일어난다. 도대체 왜 그럴까? 왜 우리는 그토록 골프를 좋아하는 것일까? 앞서 설명한 스토리텔링의 힘도 있지만 또 한 가지. 골프장에 가면 ‘감탄’이 있기 때문이다.
드라이버 한 번 치고 나면 모두들 외친다. “나이샷!”, “우와~!” 바로 그 맛이다. 그 감탄의 맛을 보고 싶어 몇 야드 더 나가는 드라이버가 나왔다면 바로 바꾼다. “나이샷!” 하는 그 소리를 듣고 싶어서. 그러나 사람 참 좋은 한일 시멘트의 허기호 사장은 드라이버만 치고 나면 매번 소리 지른다.  “뽀~올!”. 놀란 캐디들까지 쫒아나가며 옆 홀 사람들에게 다급하게 외친다. “뽀~올, 뽀~올!” 감탄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는 아무도 나보고 감탄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골프장에서는 감탄이 된다. 그것도 네 시간 다섯 시간 동안 계속된다. 그래서 골프에 그토록 미치는 것이다. 허나 그 다양한 삶과 문화의 영역을 제쳐두고 오직 산비탈 한구석에 모여서 자기들끼리만 감탄을 주고받는 것처럼 소외된 삶은 없다. 그래서 시간 나는 대로 음악회도 열심히 가야하고, 미술관도 아내와 팔짱 끼고 가야하고, 축구장과 야구장에 아이들 손잡고 가야 하는 것이다.

    여자들이 오래 사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감탄’ 때문이다. 찜질방에 가보면 안다. 옆자리의 아줌마들의 수다가 하도 시끄러워, 들고 있는 책에 도무지 집중할 수 없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면, 이야기 내용은 별게 없다. 그저 “맞아, 맞아, 그래, 그래”만 반복할 뿐이다. 서로 돌아가며 그 소리만 2박 3일 한다. 2박 3일 내내 감탄만 하는 것이다. 이 집중적 감탄의 효과는 수명 연장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나는 아내가 고등학교 동창들과 찜질방에 간다면 가능한 한 오래 놀다 오라고 한다. 유럽여행 가는 것보다 가격은 수십 배 싸고, 그 심리적 효과는 수백 배 높기 때문이다.

    예술을 통한 가장 중요한 정서적 경험을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장엄함’ 이라고 했다. 입이 쩍 벌어지는 엄청난 자연의 풍광 앞에서, 폭풍우 치는 바다나 은하수 가득한 밤하늘을 보면서, 우리는 말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그 벅찬 느낌을 그저 숨 막히도록 감탄할 뿐이다. 칸트는 바로 이 ‘숭고함’ 혹은 ‘장엄함’의 경험이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궁극적 경험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예술, 종교의 목적은 바로 이 숭고함과 장엄함이라는 궁극적 경험을 추
구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칸트식 ‘장엄의 미학 Aesthetik des Erhabenen'에는 현대심리학의 결정적 한계로 지적되는  ’인지와 정서‘, 혹은 ’감정과 이성‘의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인지적 능력으로는 개념화할 수 없는 이 초월적 영역은 숭고함이라는 미학적 정서적 경험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의 구체적 생활을 자극하고 변화시킨다. 숭고함의 경험을 통해 감정과 이성이 화해하게 된다는 것이 칸트 미학의 핵심이다.

    감탄은 이 숭고함과 장엄함의 구체적 반응이다. 말로 형언할 수 없고 개념화할 수 없으나,  사람의 가장 궁극적 경험이 우리에게 와 닿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감탄이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감탄으로 양육한다. 감탄이 사라지는 순간, 더 이상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땅의 사내들은 나이가 들수록 이 감탄의 욕구를 채우지 못해 어쩔 줄 모른다. 아무도 자신을 보고 감탄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에 가면 감탄은커녕 책임만 늘어간다. 집에 오면 아내는 돈 이야기밖에 안 한다. 아이들은 클수록 내 곁에 오지 않는다. 아직 아이들이 어릴때는 놀러 가자면 흥분해서 따라 나서고, 내가 조금 늦기만 해도 전화를 해, “아빠, 지금 어디야?“ 했다. 그런 그 애들이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함께 놀러 가기는커녕, 얼굴 보기도 힘들다. 어쩌다 말을 걸어도 대답이 우물 쭈물, 영 신통치 않다. 대화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느낌이다. 어디서도 이 감탄의 욕구는 채워지질 않는다.

    충족되지 않는 감탄의 욕구는 욕구좌절이 되고 만다. 욕구좌절은, 심리학적으로 뒤집어져 분노가 된다. 적개심이 되고 공격성이 된다. 모두들 ‘어디 한번 건들기만 해봐라’ 하는 표으로 거리를 헤맨다. 아, 그러나 이 아저씨들에게 감탄을 연발해주는 곳이 단 하나 있다. 룸살롱이다. 화려한 화장을 한 젊은 아가씨들은 밤마다 끝없이 외친다
    
“어머, 오빠!”, “오빠는 왜 이리 멋있어?”
이 싸구려 감탄에 환장한 사내들은 넥타이를 풀어헤친다. 지갑까지 풀어헤친다. 정말 슬픈 이야기 아닌가?

    내 삶이 어려운 이유는 간단하다. 경제가 어려워서가 아니다. 정치가 개판이라서가 아니다. 
이 감탄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문화적, 예술적, 종교적 체험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에게는 감탄이 존재하지 않는다. 서양 사람들은 ‘원더풀wonderful’이라는 단어가 아예 입에 붙어 있다. 가만히 살펴보라. 별일이 아니어도 ‘원더풀’을 끝없이 반복한다. 독일어로는 ‘분더바  wunderbar'다. 정서적으로 거칠고 한없이 무뚝뚝해보이는 이 독일인들도 매일 ‘분더바’를 연발한다.
    유학시절, 아르바이트로 식당에서 음식 나르는 일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음식을 식탁 위에 올려 놓으면 독일 사람들은 이렇게 중얼거린다. “분더바!”, “수퍼!”, “아우스게짜이흐네트!”…. 자기 돈을내고 받아먹는 음식조차 놀랍다고, 감동스럽다고 감탄하는 것이다.

     일본사람들도 감탄을 아주 잘 한다. ‘스고이’, ‘스바라시이’, 정말 별일 아닌데도 민망할 정도로  ‘스고이’를 연발한다. 세계 어디서나 빠지지 않고 매일 반복하는 이 감탄사가 한국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대체 ‘wonderful'이 한국말로 어떻게 번역될 수 있는가? 내가 억지로 번역 했다. 이렇게 번역된다. “오, 놀라워라!”

     원래 우리나라에는 감탄사가 많았다. “지화자!”, “니나노!”, “얼쑤!‘ 등등. 100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인들의 입에 매일같이 붙어 다니던 단어들이다. 그러나 이 수많은 감탄사들이 모두 사라졌다. 이젠 아무도 이런 감탄사를 사용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감탄사가 욕으로 변했. 사람들은 맘에 안 드는 사람이 못마땅한 짓을 하면 그런다. “얼~씨구!”
 
    그래도 인간이라면 감탄사가 있어야 한다. 한참을 생각해봤다. 아, 한국인들에게도 감탄사가 있긴 있다. 딱 하나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죽인다!”
감탄사라고 기껏 하나 있는데, 그게 ‘죽인다!'다. 정말 죽이지 않는가?

      
     내가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가의 기준은 아주 간단한다. 하루에 도대체 몇 번 감탄
하는 가다. 사회적 지위나 부의 여부와 관계없다. 내가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다 할지라도, 하루 종일 어떠한 감탄도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내 인생이 아니다. 바로 그만두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내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그 돈으로 매개된 감탄이 없다면, 그 돈은 내 것이 아니다.  일정 수준의 돈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어떤 한도를 지나치게 되면 돈은 내게 더 이상 감탄을 주지 않는다. 걱정과 불안의 원인이 될 뿐이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필요한 일정 수준의 재산이 넘어가면, 다양한 방식의 기부를 생각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내 회사가 지금 잘 돌아가는가 안 돌아가는가의 기준 또한, 감탄의 유무에 있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 나와 일하는 직원들이 도대체 하루에 몇 번 감탄하는가를 살펴보라. 
커피 자판기 앞에서, 혹은 점심식사 후, 사무실 책상에 앉으며 “와~!”, “이야~!” 같은 감탄사를 연발한다면 그 회사는 성장할 수밖에 없다. 직원들의 정서적 자아실현이 이뤄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연봉이나 인센티브가 이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감탄을 가능케 하지 않는다. 아무리 월급을 많이 줘도 감탄은커녕 한탄만 나온다면, 그 회사는 5년 내에 망하게 되어있다. 자발적 노동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창의성은 자발적 노동에서 나온다.

       
     내 가족이 행복한가 아닌가의 기준도 마찬가지다. 내 아내, 남편, 우리 아이들이 나와 있을
때 도대체 몇 번 감탄하는가가 행복의 척도다. “아빠, 으와~!”, “이야~!”와 같은 감탄사가 우리 아이들의 입에서 끊이지 않고 나온다면 우리 가족은 정말 행복한 가족이다.
      얼마 전,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올 때의 일이다. 아이들의 선물을 사느라 하루 종일 진눈깨비를 맞고 다녔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저녁에 호텔에 돌아오니 열이 나고, 기침이 나고,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침대 속에서 끙끙거리며 생각했다. ‘이토록 아이들의 선물에 집착하는 내 심리적 동기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감탄 때문이었다. 내가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는 것을 사다 주면 아이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내 주위를 맴돌며 그런다.  “아빠, 으와~!”, “이야~!”

       큰놈 걸로는 캐나다 단풍잎이 새겨져 있는 빨간 잠바를 샀다. 작은 놈 건 새로 나온, 쥐똥만한 포켓몬스터 자동차를 샀다. 아니나 다를까. 큰놈은 “아빠, 으와~!”를 연발하며 거울 앞을 왔다 갔다 한다. 몇 날 며칠을 그 잠바를 입고 나가며 으스대며 내 어깨를 툭 친다.
     “아빠, 죽이지!”
저녁에 돌아오면, 작은놈은 그 포켓몬스터 자동차를 가지고 놀며 계속 내 주위를 맴돈다.
가 담요 깔아놓고 퍼팅연습이라도 할라치면, 골프공 사이로 자동차를 몰고 다니며 계속 방해한다. 그래도 하나도 싫지 않다. 아니, 너무 좋다. 그놈이 계속 “아빠, 이야~!” 하는 감탄사를 연발하기 때문이다. 행복하다. 이 작은 감탄을 맛보고 싶어, 나는 몸이 욱신거리는 것을 참으며 진눈깨비 내리는 퀘붹의 거리를 헤맸던 것이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다. 우리 부부관계가 좋다면 내 아내, 내 남편이 나와 있을 때, 끊임없이 감탄해야 한다. “여보, 와~!”, “당신, 이야~!” 그러나 젠장, 감탄은커녕 서로 한탄만 한다.

       “내 참, 어휴~.”

      아! 그래도 우리가 계속 함께 사는 이유는 감탄하고 감탄 받고 싶어서다. 서로 살을 부대끼는 관계 속에서 그 작은 감탄을 얻고 싶어 가족을 꾸리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가족만큼은 지키고 싶은 것이다. 감탄하고 감탄 받고 싶어서, 아닌가?
      누가 나보다 더 분명하게 우리의 삶의 목적을 설명할 수 있다면 나와보라!

      우리는 감탄하려 산다.

 

                                                                    
   


                                                          [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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