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학순 주교님을 기억하며...
* 한국에서 제일 큰 교구는?
김영진 바르나바 신부/원로사목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있던 시절 뉴욕에서 교포사목 중이던 나는 교포들의 한 모임에서 황당한 질문을 받았다.
“신부님, 한국에서 원주교구 다음으로 큰 교구가 어느 교구입니까?”
생각조차 안 해보았던 질문이라서 당시에 나는 어리둥절해 하며 안동교구인가? 제주교구인가?를 생각하면서 망설였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다시 ‘원주교구 다음으로 큰 교구가 서울교구인가. 부산교구인가를 묻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한국천주교 교구 상황을 말씀드리며 원주교구는 아주 작은 교구라고 설명드렸더니 그 사람도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 사람이 한국에서 원주교구가 가장 크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에 대한 소식을 많이 접했기 때문이다.
지학순 주교님께서 교구장 취임 인사 때 하신 말씀처럼 “가난하고 척박한 땅에서 돌담 속에 피어나는 한 송이 꽃 같은” 원주교구를 한국에서 제일 큰 교구로 인식시킨 것은 지 주교님의 삶 때문이었다.
지 주교님은 머리로만 살지 않고 가슴으로 사셨고, 입으로만 살지 않고 행동으로 사셨다.
부정한 권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으셨고, 억울해 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막지 않으셨다.
또 가난한이들, 소외된 이들을 위하여 손을 내밀어 주는 것을 망설이지 않으셨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원주교구는 한때 한국에서 제일 큰 교구였다.
나에게는 세월이 흘러도 가끔 뭉클한 사연 하나가 있다.
1986년 한 여름 아침 시간에 당시 내가 사목하던 탄광촌 사북 성당 사제관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라고 전화를 받으니 아무 소리가 없어 끊으려 했다.
그 순간 ‘나 주교다’ 하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왔다. 주교님 목소리였다. 음성은 차분하면서도 약간 떨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당시 나는 탄광촌 광부들의 억울함을 들어주고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회사 측과 어용노조 그리고 경찰 측과 민정당 청년당원이라는 지방 건달패들에게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수많은 청년 광부들이 정선, 영월, 평창에 있고 경찰서 유치장에 잡혀 있었고, 나를 도와주던 가톨릭 광산상담소 직원조차 서울 가던 기차 안에서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유치장에 있었다.
그래서 주교님의 전화가 반가우면서도 혹시 나를 꾸짖는 전화가 아닐까“ 본당을 너무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전화하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런데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주교님의 말씀은 나도 모르게 내 무릎을 끓게 했다.
주교님은 단호하신 목소리로 ”김 신부! 힘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네 목숨을 던져라“라고 하셨다.
그리고 수화기를 통하여 주교님께서 울고 계신다는 것을 느낄 만큼 흐느낌이 전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끓고 ”알겠습니다. 주교님! 하고 울먹이고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이 시간에도 나는 주교님의 그 목소리를 듣는 둣 가슴이 벅차 오른다,
주교님의 말씀대로 살지는 못했지만 주교님의 그 짧은 말씀 한마디는 기나긴 내 사제 생활에 함께 하고 계셨다.
주교님은 가셨지만 주교님 말씀이 나를 붙잡고 이끌어 주셨으니 나는 행복한 신부다.
그분이 심어 놓으신 커다란 나무가 가지치기를 많이 당해서 슬프고 안타깝지만 나무뿌리가 왕성하여 여러 곳에서 새로운 나뭇가지로 터져 나오니 이 또한 감격이 아니겠는가!
내가 꾸는 꿈이 있다. 여러분도 이 꿈을 같이 꾸어주길 바란다.
그것은 지학순 주교님과 비숫한 시기에 지 주교님처럼 사셨던 엘살바도르 오스카르 로메로 주교님이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고 복자와 성인품에 오르신 것처럼
지학순 주교님도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고 복자와 성인품에 오르시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