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오월의 보리밭을 떠올리면 귓가에 저절로 맴도는 가곡이 하나 있다. 박화목 작시, 윤용하 작곡 '보리밭'이 그것이다. 보리밭은 우리 모두 고향의 노래다. 보리피리 불며 유년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던 사람이라면 벌써 마음은 고향으로 달려가 함께 뒹굴고 뛰놀던 친구 녀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밟혀올 것이다.
보릿대가 허리 높이까지 차올라 한창 클 때의 아이들의 모습처럼 연초록에서 진초록으로 빛깔이 한층 선명해지고 봄바람에 초록바다의 보리밭은 그야말로 눈부시다. 햇빛과 바람의 방향에 따라 제 스스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보리는 다채로운 색의 향연을 펼친다. 보리는 5월 중순 이후부터 서서히 황금빛으로 물들어 6월 초 수확기를 맞는다.
이렇듯 보리는 우리 민족에게 생명의 빛으로 작용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절절한 비애가 담겨 있기도 했다. 보리떡, 보리죽 등 보리와 관련된 음식들 속에는 가난과 배고픔이 함께 배어있다.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의 신세나 미련스러움의 극치 '쑥맥(콩과 보리)'은 소중하면서도 대접받지 못한 보리의 존재를 단편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찰기가 없고 입속에서 겉돌던 꽁보리밥, 그 것이라도 배불리 먹는 게 소원이었던 때를 살았던 이들에게 하얀 '이팝(쌀밥)'은 늘 꿈이었다. 조금 잘 살게 되면서부터 보리를 밥상에서 제일 먼저 물리친 것도 어찌보면 진저리쳐지는 가난에 대한 기억을 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남자는 고추를 많이 먹어야 보다 남자다워 지고, 여자는 보리를 많이 먹어야 여성스러워지며 아들도 잘 낳고 예뻐진다고 해서 보리밥을 많이 먹기를 강요받았던 시절도 있었다. 쌀이 부족한 시대에 남성위주의 사회의 단층을 보여주고 있어 입맛이 씁쓸해져 온다. 하지만 이 같은 속설은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다. <본초강목(本草綱目)>을 보면 보리는 안색을 좋게 하고 피부를 곱게 하고 매끄럽게 한다고 적혀 있다. 뿐만 아니라 피를 맑게 하고 핏속의 독기를 해독하며 혈맥을 젊게 하여 풍기를 예방한다고 했다. 우리나라와 중국 등 맥식문화권에서 심장질환이 적은 것에 착안, 보리가 혈맥 속에 콜레스테롤이 덜 끼게 작용을 한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다시 보리의 존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천덕꾸러기의 신분에서 건강식, 다이어트식 등 별식으로 크게 격상되어 꽁보리밥 전문점이 여기저기 생겨나고 점심 때면 줄지어 설만큼 인기를 얻고 있는 걸 보면 사람이나 곡식이나 인생유전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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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물결로 일렁이는 남녘들판
2006. 5. 11. 오전 9:5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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