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를 제거하기 위한 저항운동에 참여했다가 히틀러가 자살하기 3주 전인 1945년 4월 9일 히틀러에 의해 목숨을 빼앗긴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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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는 말하기를, "사람들은 그들의 위기 속에서 하느님께로 다가간다. 인간들은 도움을 간청하고 행복과 먹을 양식을 구하려하고, 질병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간구(懇求)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소원들은 그리스도인이나 이교도들이나 모두가 다 하는 짓들이다. 그러나 진실로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려운 처지에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삶을 돌아다본다. 같은 인간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살면서, 집도 식량도 없는 헐벗은 사람들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다가서는 인간들이야말로 비로소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죄와 허약함과 비록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인간들이라고 해도 그의 삶이 하느님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선다면 하느님도 그의 곁에 서있다."
본회퍼 목사는 미친 선동으로 독일 국가를 몰아가던 히틀러 집권 이틀 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지도자가 자신을 우상화하기 위해 국민을 현혹하고, 국민이 그에게서 우상을 기대한다면, 그 지도자상은 조만간 악마의 상으로 변질되고 말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한다.
라디오 강연이후 본회퍼는 본격적인 나치의 감시를 받게 된다. 이때부터 본회퍼의 신학은 광영(光榮)의 신학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한 고난 속에서 신을 인식하는 길을 찾아 나선다.
나치의 박해가 갈수록 심해지자 미국의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등이 본회퍼를 미국 유니온 신학교로 초청해 신학공부를 하게 도움을 준다. 그러나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키는 히틀러 군사체제의 반인권적인 독일의 상황은 본회퍼에게 번민을 일으켰고, 안전한 미국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니버에게 편지를 썼다.
"저는 독일의 기독교인들과 같이 독일의 어려운 시기동안 내내 함께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심했습니다. 독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저도 이 시대의 시련을 나누지 않는다면, 전쟁이후에 독일에서 기독교인으로의 사회적 삶의 재건에 참여할 권리가 저에게는 없다고 스스로 판단했습니다."
미국의 친구들이 그의 신변의 위험을 염려해 그가 미국에 남을 것을 강력하게 권유했지만 결국 그는 미국을 떠나 독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온 1940년(34세), 히틀러 지배체제의 당시 독일의 상황은 야만(野蠻)의 시간이었고 밀고와 투옥, 강제추방과 살육이 공공연한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독일 군 정보부의 정보부장 부관으로 일하고 있던 그의 처남 한스 폰 도나니(Hans von Dohananyi)와 같이 반 히틀러 저항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히틀러 암살 음모는 그의 처남과 군고위층의 반 히틀러 세력들이 군 정보부와 함께 시도했던 것인데, 본회퍼도 여기에 적극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제 본회퍼 목사는 가능한 모든 정치적 군사적 방법을 동원하여 나치에 대항해 투쟁하는 것을 행동의 목표로 삼았다.
"제 정신을 잃은 운전자가 폭주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해치고 있다, 이 폭주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는 미친 사람이 모는 차에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것만이 목사로써 나의 과제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미친 사람의 운전을 중단시키는 것도 바로 나의 과제다."
이런 본회퍼의 행동주의적인 신학은 히틀러를 제거하는 것만이 독재정치로부터 고통 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일차적으로 구하는 것이며 반 나치 저항운동에 가담하여 히틀러를 없앰으로써 국가의 공동체를 악으로부터 건져낼 수 있을 것이라는 명확한 판단으로 그는 과감하게 히틀러의 독재정권과 싸우게 된다. 그러나 히틀러 제거 계획은 실패하고 그는 그 이전인 1943년 4월 5일 게슈타포에 의해 이미 체포를 당하고 만다.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이나 내가 매를 맞는 것, 또 내가 죽는 것 까지도, 이런 것들은 어쩌면 나에게는 그렇게 심한 고통이 아니다. 나를 참으로 고통스럽게 하고 괴롭히게 하는 것들은 내가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동안에 감옥 밖 세상이 너무나 조용하다는 사실이다."
히틀러 암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후 히틀러는 전쟁에서 패색이 완연했지만 '반란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 버릴 것을 최후로 명령한다. 히틀러 반란자들 대부분은 처참한 고문을 당했고, 엉터리 제국재판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약 7,000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체포되었으며, 이 중 약 5,000명의 사람들이 사형에 언도되었고, 거의 대부분이 갈고리에 매달려 교수형에 처해진다. 당시 히틀러는 이런 처형모습을 가리켜 '푸줏간의 돼지' 같다고 말했다. 불과 그가 자살하기 3주전에 일어난 일이다.
본회퍼는 서른아홉 살 젊은 나이로 삶을 끝냈다.
하지만 그는 죽기 전 보낸 편지에서 "죽음은 제게 마지막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했다. 그는 부당한 권력에 의해 죽음을 당했지만 온갖 종류의 억압과 차별이 있는 세상 곳곳에 그의 '말씀'은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사후 51년만인 1996년 베를린의 법원은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에 대한 나치법정의 사형선고를 공식적으로 무효화하는 판결을 내렸다.
"본회퍼 목사가 1943년 군 고위장교들과 함께 히틀러 암살을 모의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은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본회퍼는 결코 국가를 위태롭게 한 사실이 없고 오히려 나치의 폐해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구출한 인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