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과 신앙 |
| 공의회는 과학이 독자성을 지니면서 신앙과 양립할 수 있음을 재차 천명하였다.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인간이 스스로의 재능과 힘으로 만들어낸 것을 하느님의 권능에 배치된다거나 이성을 가진 피조물을 창조주의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인류의 승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증거요,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의 결실이라고 확신한다.”(사목 34) “모든 과학 분야의 탐구는, 그것이 참으로 과학적 방법을 따르고 윤리 규범을 따라 이루어진다면, 절대로 신앙에 대립될 수는 없다. ... 오히려 겸허하고 항구하게 사물의 비밀을 탐색하는 사람은, 의식하지는 못해도, 만물을 보존하고 만물의 존재를 규정하시는 하느님의 손에 인도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학문의 정당한 자율성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대립과 논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신앙과 과학은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하게끔 만들어놓는 정신 태도는, 간혹 신자들 가운데에도 없지 않았지만,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사목 36) 그런데 과학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독자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과학자들이 탐구해낸 결과들을 인간의 보다 광범위한 요구에 부응시켜야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과학 역시 봉사일 뿐이지 목적이 아니며 과학은 수단이지 최종 목표가 아니다. 과학자가 밝혀낸 객관적 사실과 진리나 자연 현상을 더 잘 설명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모든 과학이 이용하는 방법론 따위는 문제시될 수가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과학을 진리의 유일한 원천으로 간주하는 철학과 이데올로기와 세계관들(과학주의)이다. 이런 ‘과학주의’의 관점들은 돌이킬 수 없는 배타주의의 특성을 지니는데 종교는 예컨대 인간적 욕망들의 투사, 무의식의 창출, 단순한 사회 체계, 경제에 의해 확정되는 단순한 상부 구조, 지배 계급의 권력의 표현에 불과하다고 단정짓는다. 이 과학주의는 18세기부터 19세기 초엽까지 근대인에게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에도 새롭고 미묘한 형태로 되살아나고 있는 정신적 유산이다. 과학이 독자성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모든 학문과 마찬가지로, 배타적인 이데올로기로 짜여져 있는 모든 세계관을 배격하는 복음의 심판을 모든 세계관을 배격하는 복음의 심판을 모면할 수는 없다. 아울러 과학과 그 기술적인 응용들은 윤리에 의해 판단받아야 한다. 과학적 탐구와 기술적 응용은 다양한 목적에 이용될 수 있는 수단들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면서 작용하는 것들만이 합당한 것이 될 수 있다. 과학은 인간을 단편적으로만 구제할 수 있으며 인간을 목표에 가까운 지점까지만 인도할 수 있을 뿐이지 진정 결정적인 구원을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 과학 기술뿐 아니라 과학적 탐구도 선 또는 악의 방향으로 이용될 수 있으므로 항상 애매모호함을 지닌다. 사람들의 삶을 주도하는 것은 참다운 지혜에 속하는 일이다. 또한 이 일은 예언적 직분을 맡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서 영유하는 엄청난 잠재력을 규제하는 것이 오늘의 당면 과제이다. 성장이냐 파괴냐 하는 것을 결정지어주는 것은 윤리 규범들이다. 기술 발전의 모든 새 가능성을 이용하는 방법들과 목적들을 결정하는 장본인은 구인가? 모든 이가 다 함께 책임감을 갖고 대답해야 할 중요한 의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절대적 가치 곧 하느님과 복음적 행복 선언의 정신 위에 바탕을 둔 것인데 모든 이에 의하여 존중되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기 위한 방안을 찾으려면 자연과 역사를 피상적으로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것들을 점차로 계시되는 무한한 신비를 조금씩 드러내 보이는 표지로 생각하면서 계속 연구하고 탐색해 나가야 한다. - 이태리 주교회의. [주여, 당신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중에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