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대축일입니다. 원래는 7월 5일인데 주일로 옮겨서 많은 신자들과 함께 경축하고 있습니다. 7월 5일이 축일이 된 이유는 김대건 신부님이 성인이 되기 전 과정인 복자품에 오른 날이 바로 이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오늘 축일을 지내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한국인 최초의 사제입니다. 오늘 순교자 대축일을 지내면서 한국 천주 교회의 역사를 잘 이해할 수 없는 분들은 즉시 의문이 생길 겁니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왜 신부님이 돌아가셨는지, 그것도 대역죄인이 되어 국문효수(國文梟首)까지 당하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실 것입니다. 신부님은 새남터 한강 백사장에서 목이 잘려 처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한국천주교회사를 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1784년, 지금으로부터 약 220여 년 전입니다. 개신교 보다 한 100년 일찍 들어왔지요. 천주교가 들어온 당시 우리나라는 유교 사회였습니다. 유교 사회는 양반과 평민, 쌍놈이 크게 구별되는 철저한 계급 사회입니다. 또 유교 사회의 큰 특징은 조상에 대한 깍듯한 예절이었습니다. 조상제사에 대한 사회적인 관습과 예절이 철저했던 이 시절에 천주교 교리는 이 신분 계급과 조상제사라는 두 부분이 모두 다 크게 달랐습니다. 하느님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이 천주교의 기본교리입니다. 양반과 쌍놈의 구분이 없고 남녀의 구분이 없다고 주장하는 천주교 교리는 당시 조선 사회에 놀라운 파장을 던지고도 남았습니다. 당연히 천주교는 사회의 관습을 혼란시키고 나라의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대역죄로 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상 숭배를 거부하는 천주교에서는 조상 제사를 모시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유교 사회에서 조상 제사를 거부한다는 그 자체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죄악이었고, 소문만으로도 파문을 불러일으켰으며, 그것을 실행하는 자는 대역무도한 죄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교리를 놓고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㰡’나는 천주교보다는 조상의 제사를 따르겠다.㰡“고 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들은 과감히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1791년 전라도 진산 땅에서 윤지충과 권상현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조상의 신주를 불살라버린 일이 생기고 이 때부터 조선에서는 대대적으로 천주교의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1784년 천주교가 들어오고 나서 1886년 한불통상조약이 맺어지기까지 100년 동안 한국 천주 교회에는 엄청난 순교의 행렬이 이어지게 됩니다. 이 때는 천주교를 믿으면 죽고 믿지 않으면 살았습니다. 간단했습니다. 조사며 취조가 다 필요 없이 천주교 신자로 발각되어 잡혀가면 관원들이 물어봅니다.
㰡’배교 하겠는가?㰡“
배교하면 살려주고, 끝까지 하느님을 믿겠다고 신앙을 고집하면 무조건 목을 쳐죽였습니다. 그렇게 수 만 명의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묵묵히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며 목이 잘려 숨져갔습니다. 쇄국 정책을 폈던 흥선 대원군 시절만 해도 대원군에 의해 죽은 사람이 무려 8,000명이 넘었습니다.
우리가 가끔 순례하는 절두산 성지의 원래 이름은 잠두봉, 양화진이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목이 잘려 한강으로 던져진 이후 이곳 이름이 절두산으로 바뀌기까지 한 것입니다.
절두산, 새남터, 명동, 솔뫼, 배론 등 전국 각지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죽어갔고 이렇게 10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1784년에 이승훈 베드로 단 한 명으로 시작된 천주교는 100년의 박해 속에서 공식적으로는 만 명, 비공식적으로 수 만 명의 순교자를 냈습니다. 수 만 명이 목숨을 잃으면서도 지켰던 신앙이 바로 우리가 지금 이 시간에 고백하는 천주교 신앙입니다. 놀라운 것은 천주교를 믿으면 목숨을 잃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끊임없이 순교자들이 줄을 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상식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믿는 그 자체가 죽음이라고 했을 때 지금 이 자리에 남아있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끝없이 순교자는 늘어나기만 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순교자들의 놀라운 신앙이 살아 계신 하느님을 증거 했기 때문입니다. 곧 목이 잘리는 그 순간에 두려움에 떨며 살려 달라고 애걸해야 될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그리면서 하느님과 함께 말할 수 없는 평온함을 보일 때, 그 모습을 바라보는 교회 밖의 사람들은 처음으로 이 세상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엄청난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좌절하고 불평 불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의 목을 치는 휘광이와 관원들을 위로하고 찬미하는 신자들의 신앙을 보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신자들의 신앙이 목을 자르는 극형이 셀 수 없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계속 신자들을 탄생시키는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 순교의 현장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이 함께 하셔서 한국 천주교를 이끌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와중에 프랑스로부터 선교사들이 끝없이 조선으로 들어왔습니다. 프랑스는 지금도 비행기로 14시간을 가야하는 먼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 쪽배를 타고 조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파란 눈의 선교사들은 오로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소명으로 낯선 땅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다 죽어갔습니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사목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 생김새 등이 우리 조선인과 너무나 달랐기에 조선인 신부가 있어야 한다는 절대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 신학생으로 뽑힌 분이 바로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최양업 토마스 성인이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821년 솔뫼에서 태어나 15세의 젊은 나이로 이렇게 신학생으로 뽑혀 신학을 공부하러 떠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를 가로질러 중국 대륙을 지나서 남방 마카오 섬까지 수 만리를 걸어가는 고행의 유학 길이었습니다. 갖은 시련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10년 만에 사제로 수품됩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와서 성무를 집행하고 신자들을 사목 하시게 되었는데 사목을 하다보니 많은 신자들이 간절히 갈구하는 하느님에 대한 갈증을 혼자서는 채워주기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부님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에 선교사를 청하러 다시 가시다가 그만 관원에 의해 체포가 되고 말았습니다.
신부님은 1846년 10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십니다. 그 때 목이 잘려 대나무에 걸어 놓은 신부님의 시신을 수습해서 150리 길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메고 간 신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부님 곁을 떠날 수 없었던 이민식 빈첸시오는 신부님의 유해를 모시고 밤에만 산 길을 걸어 일 주일 만에 고향인 미리내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부님은 미리내에 안장되었습니다. 놀라운 신자들의 신심이고 놀라운 김대건 신부님의 모습입니다.
한편 김 신부님의 죽음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는다고만 해도 사형을 받던 그 험난한 박해 시절에 오로지 눈에 보이는 하느님은 김대건 신부님 한 분뿐이었고 10년 간을 사제가 되기 위해서 어렵게 기도하고 준비하고 노력했는데 사제로 탄생된 지 단 1년 만에 잡혀서 돌아가시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켜본 신자들에게 그것은 얼마나 큰 시련이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㰡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㰡‘하고 많은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회의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들은 하느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바램이 얼마나 다른지 다시 한번 체험합니다. 당시의 그 시련이 한국 교회에 더할 수 없이 풍요로운 결실의 은총이었음을 후손인 우리들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죽음은 그 당시는 한갓 대역무도한 한 인간의 죽음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 그 분이 태어나신 솔뫼, 그 분이 돌아가신 새남터, 그 분이 묻히신 미리내는 모두 거룩한 성지가 되었습니다. 거룩한 성지이고, 하느님 승리의 장소이고, 인간의 뜻과 하느님의 뜻이 전혀 다르다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우리에게 전해주신 값진 신앙의 역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뜻과 하느님의 뜻은 이렇게 다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더러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신앙을 소흘이 하기도 합니다. 내가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애를 쓰는데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닥쳐오는가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습니다. 갑자기 자녀에게 사고가 생기고, 부모에게, 또는 사업을 하는 중에 생각지도 않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우리는 좌절하고 감당하기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은 우리를 뛰어넘습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나의 작은 생각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는 그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세상의 일에 갈등이 생길 때, 나의 욕망과 하느님의 길이 다를 때,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을 오늘 명확히 깨닫습니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고, 세상의 길을 갈 때 이익이 되고 잘 살아 남을 것 같지만 아니라는 겁니다. 순교자들의 신앙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길을 가는 것이 바로 생명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더 큰 은총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오늘 하느님의 또 다른 계획과 섭리하심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는 순교자들의 삶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삶은 누구에게나 똑같습니다. 시련기가 있을 수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고, 생각지도 않은 난관에 쓰러져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희망을 가지고 기도할 때 더욱 풍요로운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나의 욕망과 세상의 일 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언제나 우리 한국 교회와 우리들을 위해 간구 하여 주실 것을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