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믿음의 결과와 불신의 결과 †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돌아오신 후에 유다 지역, 즉 남쪽의 요르단 강 주변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에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이 때에 주님은 세례자 요한과 비슷한 지역에서 세례자 요한과 함께 활동을 했습니다. 주님의 활동이 계속되면서 주님의 이름은 백성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주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숫자로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이러한 일을 보고 주님께서 세례자 요한이 베푼 호의를 무시했다고 분노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그에게 가서 이 사실을 보고하고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사역을 만류해 주기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주님을 높이고 그 분의 활동을 절대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이 때는 세례자 요한이 체포되기 바로 전의 상황입니다.
오늘복음의 원할한 이해를 위해 오늘복음과 어제복음 사이에 있는 성서 본문은 먼저 묵상하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께서 거두신 성공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일을 하는 일에 있어서 일반적인 원칙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느께서 맡겨 주신 임무와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께서 하느님이 허락하지도 않은 일을 탐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에게 맡긴 일을 하고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주님은 단지 하느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만일 주님이 성공을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성공을 허락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사용한 "하늘이..."란 말은 "하느님으로부터"란 말과 같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지 않으려고 하느님의 이름을 이렇게 우회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의 제자들과 같이 눈에 보이는 현상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활동 배후에 있는 하느님의 손길을 주목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몰려가는 것을 보고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세례자 요한은 영적으로 매우 탁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이며 또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들에게도 은사와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우리들이 복음전교 활동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은총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다른 사역자들의 성공을 보고 비난하거나 시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들은 각자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을 하고, 또 다른 사역 자들의 성공을 보고 축하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래 전부터 그가 설교해 왔던 내용을 그의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반복했습니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전에도 여러 번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 앞에 사명을 띠고 온 사람이라고 말하였는데 너희는 그것을 직접 들은 증인들이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의 제자들이 자기 스승이 메시아가 아니라 전령자였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면, 주님의 이름이 알려지는 일을 기뻐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인이신 주님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보고 기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증거하도록 부탁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위치와 사명이 무엇인지를 잘 알았고,주님의 위대하신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제넘게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종이며, 주님은 우리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전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이름을 전파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주제넘게 자신을 높임으로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서는 안되며, 오로지 주님만을 증거하고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 것을 보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명성이 작아져야하고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을 보고 큰 기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기쁨이 "결혼하는 신랑의 친구"의 기쁨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결혼식장에서 주인공은 신랑이지만 신랑의 친구들도 신랑을 보면서 함께 기뻐합니다. 유다인의 결혼 풍습에 따르면 신랑의 친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신랑의 친구는 혼인 절차의 세부적인 진행 사항을 모두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신랑의 친구는 신부를 신랑에게 인도하는 일을 맡았으며, 결혼식에서 친구의 역할은 신부를 신랑에게 인도하면서 종결되었습니다.
비록 신랑의 친구가 결혼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는 했지만, 그는 결혼식의 주인공은 아니었습니다. 결혼식에서 신부를 맞는 주인공은 바로 신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을 보고 그 친구들 역시 함께 기뻐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새로 신부를 맞는 결혼식장과 같았습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는 신부인 성도들, 즉 교회를 새로 맞이했습니다. 주님은 성도들을 아내로 맞이하는 신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신부인 성도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친구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은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주님과 함께 기쁨을 느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세례자 요한은 어렵게 자기를 추종하는 제자들을 만들었지만 그들에게 주님을 증거했으며, 주님을 따르도록 권했습니다. 그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커져야 하며 또 실제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힘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따르던 사람들이 줄어들어 자기가 사람들에게 잊혀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향했던 사람들의 시선이 주님께 향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자세는 참으로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주님을 주인으로 섬겼고, 철저하게 종의 자리에 서있었습니다. 그는 주님과 자신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항상 주님을 높이고 자신을 그 앞에서 낮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향하는 시선을 주님을 향하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커지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고 외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오늘복음의 묵상입니다.
이상과 같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이어서 나오는 오늘복음(요한 3,31-36)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간단한 언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이 누가 한 말인지에 대해서 학자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부분을 세례자 요한의 증언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이 부분을 예수님께서 하신 말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학자들은 이 부분을 사도 요한의 말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기록이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마무리하면서 사도 요한이 주님에 대해 관상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기록이 사도 요한이 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기록에는 주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묵상과, 주님의 증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그 결과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위로부터 오신 증인
사도 요한은 주님을 가리켜 "위에서 오신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주님의 기원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성령을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하늘에 속한 분이셨습니다. 주님은 위로부터, 즉 하느님으로부터 오셨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해서 분명하게 증거할 자격이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 사람들을 "세상(땅)에서 나온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부모를 통해서 출생했습니다. 그들은 땅에 속한 사람들이었으며,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과 달리 하늘에서 오셨으며, 하느님을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하늘에서 당신이 보고들은 것을 사람들에게 증거할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모호한 사상이나 남의 말을 전달하지 않으셨으며,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일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하신 증언은 탁월하고 신뢰할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증거에 대해 자기 귀를 막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일로 인해 하느님께 크게 단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보고들은 증거를 받지 않았기에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주님의 증거를 받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증거를 진리로 알고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의 증거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참되시다는 것을 확증하는 사람입니. 즉, 그들은 하느님께서 진실하신 분이라고 인정했으며 그 사실에 대해 믿음으로 도장을 찍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문서를 작성한 후에 그 문서에 봉인을 찍었습니다. 이 도장은 그 문서가 도장이 찍힌 사람의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했으며, 때로는 그 문서가 사본이 아니라 원본이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주님의 증거를 받는 사람들은 문서에 도장을 찍듯이 하느님께서 참되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도 요한은 앞에서 주님을 "위에서 오신 분"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그는 34절에서 주님을 가리켜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두 표현은 결국 같은 의미를 다르게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하느님은 주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주님은 세상에 와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주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진리)을 전할 수 있도록 성령을 한없이 부어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에서 성령을 한없이 받는 사람은 주님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성도들에게 성령을 무제한으로 부어주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성도들에게 필요한 성령의 은사를 주어 교회를 섬기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복음에서 보듯이 성령을 한없이 받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주님은 하느님께서 한없이 부어주시는 성령으로 인해 하느님에 대해서 분명하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님의 증거는 신뢰할 수 있는 증거였습니다.
3. 아들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운명
하느님은 아들을 사랑하여 모든 것을 그 손에 맡기셨습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셨으며, 그 손에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하느님은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셨으며, 사람들을 구원하는 모든 일을 주님께 위임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젭트 왕 파라오가 요셉을 총리로 세우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긴 것과 같습니다. 그때에 이집트 사람들은 양식을 얻기 위해서 모든 일을 요셉과 의논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도 구원에 대한 모든 일을 주님께 위임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얻기 원하는 사람들은 주님께로 가야만 합니다. 주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생명과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이미 당신 아들을 믿는 자의 죄를 용서하고, 그를 자기 아들로 삼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믿고 따르는 자는 하느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께서 구원을 위해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의 아들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아들을 통해 주신 은총과 선물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최대의 선물이며,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위에는 하느님의 진노와 심판이 머물게 될 것이며, 영원토록 하느님의 진노와 심판을 지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복음의 묵상마무리입니다.
주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토마에게“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면에 세례자 요한은 보지 않고도 주님을 완전히 믿으면서 스스로 작아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예에서 볼 때 토마와 같은 부류라고 분류되어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신앙이란 눈으로 보고 싶어하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기도를 열심히 바치고 매일 미사에 참례하지만 그 믿음의 무게가 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믿는 신앙인 안에도 불신이 가득 들어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토마를 나무랄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너무나 빛나고 가슴을 훈훈하게 해 줍니다. 그는 보지 않은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거침어뵤이 용감하게 증언을 했습니다. 우리도 세례자 요한과 같이 담대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확실하고 분명하게 주님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주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남에게로부터 전해듣는 간접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대로 믿습니다. 독도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무조건 믿는 것입니다. 왜내하면 우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한마디로 온전히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깊은 신뢰심으로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남들이 그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워하지 말고 일어나 그대의 길을 가십시오! 어떤 문제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면 ‘일어나 너의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대의 두려움을 껴안고 문제를 향해 걸어가십시오! 그것을 움켜잡으십시오! 그러면 주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란 말은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던 토마의 마지막 고백입니다. 무조건 믿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토마의 마지막 말과 같이 그렇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
-두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