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4.10.화
| 요한 복음 20장 11-18절 | ||
|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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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 무덤 김유철 신부 | ||
|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 그것도 기존의 육신보다 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 보통의 생각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일 것입니다. 계속된 가르침과 기적의 예표를 통해서도 제자들은 이해하질 못하였습니다. 하물며 마리아 막달레나와 같은 여인들에게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이라기보다는 누군가가 시신을 흠집 낼 요량으로 훔쳐갔다 라는 생각의 방증이 되었을 것입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굴 찾느냐?”(20,15)라는 이 물음에 극적인 반전이 일어납니다. 알지 못했던 부활을 알게 되고 더 나아가 장한 자신감으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20,18). 바로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이뤄지는 극적인 반전인 것입니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도 예수님을 만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혹자는 말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신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여기, 지금, 이 순간 우리와 함께 호흡하며 옆에 서 계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을 찾아 나섰기 때문입니다. 조금씩이라도 읽으려 노력하는 성경 속에서, 매일 드리는 짧은 기도 속에서, 거룩한 성찬의 전례를 표현하는 미사 속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힘은 나를 새롭게 살게 해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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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아버지 | ||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시댁으로 하룻밤 자러 갔다. 시댁은 문경 시골이다. 대문에 들어서자 시아버님이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군불을 때고 계셨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끝내자마자 아버님이 아래채에 불 때 놓았으니 가서 쉬라고 하셨다. 가방을 챙겨 아래채로 건너갔다. 문풍지를 발라 놓은 미닫이문을 여니 작은 장롱이 덩그러니 놓여 있고 바닥엔 두툼한 솜이불이 깔려 있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꼭 민박집에 여행을 온 기분이었다. “몇 해 전에 외양간을 개조했어. 시멘트 블록으로 된 방이라 좀 추울 거다.” 남편은 그렇게 말하고는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머리만 내밀고 누웠는데 숨 쉴 때마다 입김이 나오고 코가 시렸다. … 춥고 긴장해서 그런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때 방문에 그림자가 어렸다. 또 아궁이 여는 소리가 났다. 아버님이었다. 아마도 아궁이에 불이 꺼졌나 확인하고 나무를 더 넣으시는 듯했다. “시게 추울 텐데….” 이렇게 중얼거리시는 듯도 했다. 잠시 뒤 설핏 잠이 들었다가 더워서 깼다. 아랫목이 펄펄 끓었다. 더워서 이불을 젖히면 이번엔 한기가 들었다. 다시 이불을 덮으면 덥고…. 땀 때문에 목덜미가 끈적였다. 그때 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아버님이었다. 혼잣말 소리와 아궁이 여는 소리, 아버님이 새벽까지 몇 번이나 아궁이를 열어보며 불을 때실 때마다 나는 잠이 깨고 더위와 추위를 오가며 흠씬 땀을 흘렸다. 이튿날 아침, 이불을 개고 보니 아랫목 장판이 둥그런 모양으로 시커멓게 탔고, 요도 검게 그을려 있었다. 허마터면 불이 날 뻔했다. 방문을 열고 나갔다. 마당에 계신 아버님이 새 며느리 눈을 바로 못 보시고 “잘 잤냐?” 하고 묻고는 대문 밖으로 휘이 나가셨다. 가끔 신혼 첫날의 밤새 군불 때던 아버님을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늘 며느리 눈을 바로 보지 못하셨던 수줍음 많은 아버님이 계신 저 하늘은 춥지 않은지 괜한 걱정 때문이다. 윤세희 | <작은숲> 2007년 3월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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