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제1 독서는 이스라엘 임금들의 신앙생활과 치적을 말하다가 별안간 엘리야 예언자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문제는 아합(기원전 874-853 재위)이라는 임금 때문이었습니다. 아합 임금은 하느님 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저버리고 가나안의 토착신을 섬기는 것은 물론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그보다 더한 짓을 하여 그 이전의 어떤 이스라엘 임금보다 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분노를 돋우었기”(1열왕 16,33)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가뭄을 예언하도록 하시고 사렙타 마을에 들어가 그곳에 머무르면서 한 가난한 과부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게 해주십니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엘리야아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던 사렙타 마을의 과부는 엘리야가 누구인지, 엘리야가 믿는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17,12). 이 여인은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신의를 지키시는 분이시며, 억눌린 이들에게 올바른 일을 하시며, 굶주린 이들에게 빵을 주시는 분이심을(시편 146,6-7)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서 우러나온 사랑으로 엘리야 예언자에게 융숭한 대접을 했기 때문에 엘리야는 하느님의 힘을 빌려 비가 오는 날까지 과부의 밀가루 단지가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오늘 제2 독서에서는 구약의 율법에 의해 임명된 대사제가 봉헌한 제사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효과가 없고 오로지 신약의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만 유효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유일하고 유효한 제물을 마련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드님을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로마 8,3; 2코린 5,21 참조). 구원의 제사를 완성하신 뒤에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인데 그 때에는 인간의 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심판관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며,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흠잡을 데가 없도록 해주실 것이라는(1코린 1,8 참조) 희망을 전해줍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마르코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가르침들 가운데 마지막 공적인 직무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헌금함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여자들만 앉는 자리의 한 구석에 세 개의 헌금을 넣는 궤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맞은편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정작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해야 할 율법학자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는 잘 보이려하고, 기도는 길게 한다는 말씀을 하신(12,38-40) 뒤에 이루어진 일이라서 많은 대조를 보입니다. 자신들에게는 엄격하게 율법을 적용해야 할 율법학자들이 오히려 자신들에게는 관대하고, 온갖 대우를 받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율법학자들이 저지른 일들은 궁핍하고 가난한 이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돌보는 이들에게 자비로워야 하는 율법학자들의 온갖 교만과 사악함을 예수님께서는 비난하십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제자들에게 당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들이 많은 액수의 헌금을 했다고 말하지만 궁핍한 과부의 헌금은 정확하게 그 액수가 나타납니다. 렙톤은 가장 작은 동전으로서 두 닢이라면 가난한 이들의 하루 생활비에 해당되는 돈이었고, 이렇게 모아지는 헌금은 궁핍한 이들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이 헌금하는 것을 보신 뒤에 즉시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셨다고 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복음 말씀에서 마음과 생각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한꺼번에 많은 액수의 헌금을 한 사람들보다 비록 작은 액수라 할지라도 열정과 자비심이 가득한 사랑의 헌금을 더 귀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 역시 이 헌금의 혜택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예물이지만 자기도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용기에서 우러나온 고귀한 사랑의 행동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더욱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아합 임금이 그랬듯이 힘 있는 사람들의 악행으로 인해 힘없고 가난한 이들이 겪어야 할 아픔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은 기근이라는 각박함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에 희망을 걸고 사는 이에게는 축복이 함께 했습니다. 율법학자들이 그렇듯이 교만하고, 겉치레에 매달리는 이들은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지만 아주 작은 희생일지라도 마음과 생각,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축복이 함께 합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혹시 자신에게 엄격하기 보다는 늘 관대하고 상대방에게 관대하기 보다는 늘 엄격한 것이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따뜻한 사랑으로 이웃을 잘 대해주기 보다는 오히려 대우를 받으려고 애를 쓴 적은 없는가를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과 직무가 하느님과 공동체를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고 자기 체면을 유지하려고 직분과 직무를 이용하기에 급급한 것은 아닌지를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세상 끝 날에 새롭게 오실 대사제이신 예수님의 심판은 축복이 아니라 기근보다 더 각박하고, 엄중한 단죄를 통한 아픔이 더 할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사랑일지라도 헛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가치 없는 자선행위란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10년 전에, 수원신학교 상주교수로 떠나기 전에 서둔동 본당에서 1년 동안 실천했듯이, 이제 우리 본당에서도 한 달에 한 번, 한 주일의 헌금을 모두 가난한 이들의 몫으로 돌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
[강론] 연중 32주일 - 방효익 신부님
2006. 11. 16. 오전 10: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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