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발씻김[류해욱신부님]

2007. 3. 27. 오전 8:52:15

글자

발 씻김 (베드로의 노래Ⅳ)



보랏빛 어둠이 눈처럼 내리는 저녁


우리는 이층 다락방에서 만찬을 나누었지

그분은 알고 계셨으리라

그것이 이별의 만찬이라는 것을


그분의 얼굴을 바라다보며

눈을 들여다보며

우리도 느낄 수 있었네

사랑해 주시는 마음 너머

이별의 아픔이 배인 고요


그분은 아셨지

당신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맡겨주셨다는 것

아버지께로 가야 할 시간이

도둑처럼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분은 고요히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셨지

가만히 무릎을 꿇으시고

우리들의 발을 씻기 시작하셨다네


사위는 어둠 속에 잠기고

등잔불이 방안의 숨을 죽이는데

감히 침묵을 깨고 여쭈었지

정녕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그대 지금은

나의 행동을 모르지만 훗날 알게 될 것이오


그분의 깊은 뜻은 헤아리지 못하고

나는 덤벙거렸지

“안됩니다

제 발만은 결코 씻지 못하십니다“

나는 속으로 외쳤지

“알고 계십니까?

발을 씻는 것은 종들의 몫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가 아니십니까?

그것이 제가 드린 고백이지 않습니까?“


그분은 슬픈 눈빛으로 말씀하셨지

“그대 정녕 알고 있는가?

그대 고백의 의미를.

내가 그대를 씻어주지 않으면

그대는 이제 나와 나눌 수 없게 됩니다“


그대는 이제 알게 되리

내가 그대의 발을 씻어줌은

영원히 그대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임을


그분이 내 발을 씻기실 때

나의 가슴으로 한줄기 바람이 불어왔지


그대 들어본 적이 있는가?

가슴을 씻어내는 맑은 바람

강물을 따라 내려오는 푸른 외침


그분의 손이 내 발에 닿을 때

나는 알았네

그분의 마음, 크고 깊은 사랑을


그분이 우리에게 행하신 발씻음

그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사랑

그것이 바로

당신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


그분이 이제 떠나셔도

언제나 내 가슴에 남아있으리

그분의 사랑 가득한 눈망울

내 발에 새겨진

지울 수 없는 사랑의 손자국



  오늘 성 목요일을 맞아 세족례의 의미를 되새기며 제자들 발 씻김의 말씀(요한13,1-20)으로 기도하기로 해요. 이 대목은 예수님이 지니신 사랑의 마음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 있는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사가는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의 그 극진한 사랑이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베푸시는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묵상하면서, 늘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기로 해요.

 

  장면은 이층 다락방입니다. 방 안에서 느껴지는 따뜻함과 사랑의 분위기를 음미하며 천천히 바라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이 둘러앉아서 저녁을 들고 계십니다. 빵과 포도주, 양고기 그리고 몇몇 나물들이 놓여 있는 식탁의 모습을 그려 보십시오. 창문으로는 어둠이 서서히 밀려오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제자의 한 사람으로 그 자리에 함께 있다고 상상하시면서 예수님 곁에 앉으십시오. 식사가 끝나자 예수님께서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십니다. 예수님은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는 손수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 곁으로 다가오십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아주 천천히 바라보면서 그분의 행동을 따라가 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누는 대화를 떠 올리며 귀 기울여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은 당신 옆에 앉았던 요한을 시작으로 한 사람 한 사람씩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그분은 사랑하는 제자 요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요한의 샌들을 벗기시고 아주 정성스럽게 그의 발을 씻기십니다. 이 모습을 천천히 바라보십시오. 요한은 처음에는 당황하지만 곧 주님이 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가만히 맡겨드립니다. 천천히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그분께 대한 사랑과 깊은 신뢰로 모든 것을 맡겨드리는 요한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마음을 헤아려 보십시오. 이 모습에서 느껴지는 감동이 있다면, 거기에 잠시 머물러도 좋습니다. 사실 예수님과 요한의 모습은 우리에게 기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두 사람은 서로 별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순간 예수님의 사랑과 요한의 받아들임이 공존하며 일치를 이루고 있지요. 이처럼 기도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하는 사랑을 있는 그대로 느끼면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가슴 깊이 받아들이는 일치의 순간입니다.

 

  계속 안드레아, 마태오, 토마에게로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지켜보십시오. 안드레아는 예수님을 따랐던 첫 번째 제자였지요.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돌아가 자기 형 베드로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고백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안드레아의 첫 만남을 기억하시며 사랑스러운 눈길을 보내십니다. 안드레아는 자신이 고백했던 메시아 바로 그분이 지금은 종처럼 자기 발을 닦고 계시는 그 모습을 바라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건네시는 주님의 말씀을 상상해 봐도 좋습니다. 마태오에게 가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3년 전, 그대는 나에게 마음의 아픔을 털어 놓았었지요. 이제 내가 이렇게 하듯이 아픈 사람의 발을 만져주는 사람이 되시오.”

  토마에게도 말씀하십니다.

  “토마, 내가 당신이 지닌 열정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오? 당신의 이 발이 그 열정으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기 바라오.”

 

  마침내 베드로입니다. 이 사건의 절정이지요.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처럼 처음부터 묵묵히 그분의 발 씻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예수의 대화에 귀 기울이며 두 사람이 교감하는 사랑에 머물러 보십시오. 그는 예수께서 무릎을 꿇고 앉자 예수님을 일으켜 세우며 말합니다.

  “주님, 제 발을 씻으시려고 하십니까?

  안됩니다. 주님, 제 발은 안 됩니다. 발을 씻기는 것은 종들의 몫입니다.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제가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베드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당신의 발을 씻으려는 거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은 나와 함께 나눌 수 없게 됩니다. 내가 가야 하는 이 길을 당신도 따라가야 하기에 그것을 위해 지금 나는 당신의 발을 씻기려는 거요.”

  “주님, 그렇다면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어주십시오. 저는 무엇이든지 주님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의 몫이 바로 제 몫이 되게 하고 싶습니다.”

  극진한 사랑과 신뢰의 표현으로 천천히 베드로의 발을 씻기시면서 예수님은 마음속으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 이 순간을 잊지 마오. 내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 주오.

 

  예수님은 조금은 지친 모습으로 이 모두를 지켜보던 여러분에게 다가오십니다. 드디어 여러분의 차례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 앞에 오셔서 여러분의 발을 씻기시려고 무릎을 꿇으십니다. 마음 안에서 어떤 느낌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요한처럼 그분의 손에 모든 것을 맡겨드리십시오. 예수님의 손이 여러분의 발에 닿을 때의 느낌에 머물러 보십시오. 그분은 내 발을 씻기시듯, 나의 삶을 씻겨주십니다. 과거 우리의 생애를 통해 있었던 아픔을 위로해주시고, 앞으로 걸어 가야할 여정에 축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발 씻김을 통해 예수님의 몫을 나누게 됩니다. 우리도 이제 그분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빛으로 건네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너도 이 사람들과 똑같이 내 사람이다. 나의 힘, 나의 발이 되어다오.”

 

  발을 씻기시며 그분이 건네시는 말씀, 침묵 가운데 전해지는 마음 안에 머물러 보십시오. 눈물이 날 수도 있습니다. 혹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작은 깨달음이 올 수도 있습니다. 기도의 열매이지요. 그 열매를 통해 주님 제자로서의 삶에 대한 약속을 그분께 드리는 것도 좋습니다. 이제 마침기도로 발 씻김을 통해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그분이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를 뜻을 헤아리며 천천히 바치십시오. 기도는 비록 끝나지만 그분의 사랑은 여전히 우리의 발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그분이 이제 떠나셔도 / 언제나 내 가슴에 남아있으리

  그분의 사랑 가득한 눈망울 / 내 발에 새겨진 / 지울 수 없는 사랑의 손자국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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