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3.8.목
| 루카 복음 16장 19-31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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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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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사랑 허찬란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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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로’란 이름 자체가 가난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의미입니다. ‘우리농촌살리기’ 운동을 할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번거로움과 병충해 처리문제, 가격 등을 이유로 관행대로 농사를 지었지만 라자로 형제님은 교회의 뜻을 따랐습니다. 빚도 많았고 몸도 안 좋았습니다. 하지만 라자로 형제님은 교회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결국 농토는 우리농촌살리기를 위한 기준을 채웠고 농산물도 잘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전국 생협과 우리농뿐만아니라 도시본당 직거래를 실시하였고 인기도 높았습니다. 우리는 목포로 배를 타고 건너와서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새벽 2시경 서울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강남대로를 한 바퀴 돌다가 잠잘 곳이 없어 결국은 일원터널 위나 양재로의 어느 대형 마트 주차장에서 잠을 잤습니다. 나와 라자로 형제, 곧 불쌍한 농사꾼을 받아주는 강남의 여관은 없었습니다. 복음의 부자, 아니 세상의 사람들이 갈 곳 없는 라자로, 상처가 박힌 라자로를 외면했듯이 라자로 형제와 저는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은 새벽까지 술에 흥청망청이었고, 잘 곳을 찾다 도로에서 시간을 다 보내고 기껏 두세 시간 자다 보면 청소차가 와서 잠을 깨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농산물을 받아주는 교회의 사랑에 깊이 감사했고 어디를 가든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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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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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들먹이며 우리 주변의 세계가 갖고 있는 지혜에 대해 문을 닫아버리는 것은 인간의 과오사전의 내용보다 더 지나친 영적 횡포이며 월권행위이다. 그것은 거룩함의 이름으로 삶을 감옥처럼 만들어 생각에 족쇄를 채우고 비전을 단죄해버린다. 그런 폐쇄적 태도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으로 만들며 영성에 관한 한 매우 유감스러운 핑계나 구차한 변명이 되어버린다. 종교가 저지르는 죄악은 다른 모든 종교가 공허한 것이고 알 수 없으며 부족하고 축복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삶과 지혜와 영적 비전을 통하여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모른 체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마음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것들에 대해 이같이 폐쇄적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 대해 우리의 마음을 닫는 것은 하느님께 대해 우리 마음을 닫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의미이며 깊은 영적 초대와 관련 있는 문제이다. 하느님의 현존에, 다른 이들이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열리는 것은 관상의 정수이다. 마음을 여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삶을 열어야 한다. 저녁식사 때 유색인과 한 번도 함께하지 않은 백인들의 집은 성장할 기회를 놓친 집이다. 백인을 절대로 신뢰해보지 않은 유색인들은 인류애를 확인해볼 기회를 잃어버린다. 동료로서 여성과 결코 일해보지 않은 남성은 아무리 유능한 간부라 해도 세계의 나머지 반의 모습을 볼 기회를 빼앗긴 셈이다. … 관상가가 되려면 우리의 삶의 팔을 열고 매일 우리에게 익숙치 않은 한 가지 경험, 한 사람, 한 가지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며 그것이 우리 자신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는지 물어야 한다. 그러면 궁극적 실제이시며 생명 그 너머의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이 우리의 깊은 곳에 온통 새로운 방식으로 오실 수 있다.
조안 치티스터 | <둘이나 셋> 제86호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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