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3주간 화요일 -
-노영찬 신부-
저는 ‘제대로 된 인간성숙’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제대로 된 인간성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겠지만, 결국 세상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인간성숙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건조한 선박이 온 세상의 바다를 다니면서 뛰어난 성능을 발휘한다고 할 때, 그 선박은 시공의 경계를 넘어서서 훌륭한 선박으로 평가되는 것처럼, 사람도 어느 시대를 살았든지, 피부색이 어떻고 사용하는 언어가 무엇이든 이른바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인격의 성숙도가 있는 법입니다.
저는 이렇게 사람으로 태어난 존재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인간성숙도의 기준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기준 중의 하나는 ‘개방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개방성이란 새가 공중을 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특성입니다. 물론 새장에 갇혀 주는 모이나 먹으며 사는 새도 새이기는 하지만, 새의 본성을 구현하지 못한 불행한 새인 것처럼, 개방성을 망각하고 사는 인생은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과의 교류능력을 갖지 못하는 자폐증이라는 정신질환이나, 북한과 같이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는 국가의 운명이 개방을 거부하는 태도의 결과를 말해줍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바로 참된 인간성숙을 위한 개방적 태도에 대해 떠올렸습니다. 마르꼬가 전하는 이 이야기는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와서 사람을 보내어 만나자고 부르는데도 얼른 응하기는커녕 냉정하고 단호한 태도를 보입니다. 이 장면을 예수님을 중심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은 집 밖에 서 있고, 생면부지의 군중들은 예수님 둘레에 앉아 있습니다. 즉 밖에서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과 ‘앉아서 편안하게 얼굴을 맞대는 사람들’이 구별됩니다. 인간성숙의 측도인 개방성이 미약한 사람들에게는 ‘앉아서 편안하게 얼굴을 맞대는 사람들’의 범주에 혈연으로 엮어진 인물들이 자리 잡습니다. 가족, 친지 등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 범위를 벗어나 있으면, 다시 말하면 밖에서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제대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세상을 대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이런 사고방식과 행동양상이 다양한 형태의 인종차별을 낳고 지역감정을 만들고 문화적 충돌을 조장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인간 상호갈등의 최악의 형태인 전쟁은 숙명처럼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일그러진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이런 차별하는 마음, 닫힌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라고 하시면서 육친의 관계를 가리키지 않고 바로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 인간적 기준으로 가까움의 측도인 혈연으로는 남인 사람들을 보시며 이르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
사람이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삶의 경계를 넓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계란 내가 누리는 자유를 제한하는 선입니다. 사람은 이 자유를 더 많이 누리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소유권의 확대는 자유의 확대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좁은 방에 사는 것보다 넓은 방에 사는 것이 육체의 활동과 안락을 위해서는 더 좋은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물질적 소유와 나이가 많아지는 것에 반비례하여 마음과 정신의 경계는 더욱 좁아지는 모습을 흔히 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경향에 주의를 주십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인간이 그은 경계선이 보이지 않으며 모두가 하느님의 자비로 창조된 귀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면, 바로 이런 하느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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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인간이 그은 경계선[노영찬신부님] /2007.01.23
2007. 1. 23. 오후 11: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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