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교구 강영구 신부-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성탄 대축일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지난 4주간 동안 대림절을 지내면서 성탄 대축일 맞을 준비를 충실히 해 왔습니다. 그 준비는 또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연말이어서 그런지 사회의 모습이 어쩐지 어수선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모습도 어딘가 들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름대로 성탄 대축일과 연말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계획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은혜로이 받은 한 해를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 그리고 큰 기쁨과 희망으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보다 현명하고 지혜로워야 하리라 믿습니다. 외적인 화려함과 떠들썩함보다는 신앙인으로서의 지난 한 해에 대한 반성과 새해를 맞기 위한 새로운 각오와 다짐이 필요한 때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우리는 이미 마리아가 어떻게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었는지, 그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작은 마을에 살고 있던 이름 없는 처녀였습니다. 마리아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구세주 메시아의 내림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던 신심 깊은 처녀였습니다. 마리아는 어느 날 갑자기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구세주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줍니다.
루가복음 1장7절에 의하면 마리아는 천사의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기다리던 구세주 메시아가 시골의 한낱 이름 없는 처녀를 통하여 태어난다는 신비를 쉽게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구세주 메시아의 탄생은 한 아기의 출생이라는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구세주 메시아의 탄생은 인간의 역사와 인류의 운명을 바꾸어 놓게 될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런 엄청난 사건이 나자렛의 이름 없는 처녀 마리아를 통해서 성취된다는 사실을 마리아 자신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남다르게 뛰어난 가문의 출신도 아닙니다. 그리고 당시 여성들이 대부분 그러했겠지만 고등 교육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또는 돈 많은 부잣집 딸도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평범한 시골의 처녀였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하면서, 그 엄청난 일을 떠맡기로 작정했습니다.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의 제의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교만하거나 혹은 야심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참으로 겸손하였고 또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명하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온전히 비워서 하느님의 도구가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운명 모두를 하느님의 손에 맡기고자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상봉하는 대목을 들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자기를 찾아온 마리아에게 이렇게 인사합니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엘리사벳의 이 인사말을 오늘 우리도 성모송을 외울 때마다 바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여자들 중에서 가장 복된 여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복됨은 세속적인 의미의 복됨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잣집 딸로 태어나서 아쉬운 것 없이 호강하고 자라서 대학 졸업한 여자, 돈 잘 벌고 지위 높은 신랑을 만나서 똑똑한 아들을 두고 여유 있게 사는 여자들을 복된 여자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런 여자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마리아의 일생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고 십자가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엘리사벳으로부터 그리고 오늘 우리로부터 복된 여인으로 칭송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복됨은 무엇입니까?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말대로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리라 믿었기에 복된 여인이 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주장하거나 내세우려 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을 비워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기에 복된 여인이 된 것입니다. 마리아가 구세주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된 것은 예쁜 얼굴과 단정한 용모, 남다른 재능과 재주 흑은 상당한 재력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당신 구원 사업의 도구로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은 마리아가 이런 것들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과 겸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마리아의 이 겸손과 믿음이, 닫혔던 하늘의 문을 열게 하여 이 땅에 구세주 그리스도의 내림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 땅에 성령의 시대를 열게 하여 인류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게 하였습니다. 마리아의 복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곧 성탄 대축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대림절을 지내면서 주님의 재림과 성탄 대축일을 준비해 왔습니다. 과연 우리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주님의 재림과 성탄 대축일을 기쁘게 맞을 수 있겠습니까? 과연 어떤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 복되다고 칭송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사람들의 가슴속에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새로운 시대가 열리겠습니까?
마리아와 같이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신을 비우는 겸손한 사람, 그리고 하느님의 손길에 자기 자신을 모두 내맡길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마리아의 믿음과 겸손을 통해서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듯이, 이 땅에 광명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 신앙인들의 믿음과 겸손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 인간은 참으로 별 볼일 없는 나약한 존재이지만, 믿음으로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게 됩니다. 성조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믿음으로 이집트의 재상이 될 수 있었고, 모세는 믿음으로 이집트 파라오를 굴복시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킬 수 있었습니다. 소년 다윗은 믿음으로 골리앗을 쳐 이겼습니다. 마리아 역시 믿음으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어 이 땅에 새 역.사의 문을 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믿음을 가질 때 무한히 강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면서 하느님께 귀의함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참된 믿음을 지닌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인간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겸손한 사람이 하느님께 귀의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믿음과 겸손을 지닌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시어 역사하십니다.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믿응과 겸손으로 자신을 가꿀 때 하느님의 사랑받는 복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과 겸손은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 현대인들은 믿음도 없고 겸손함도 없습니다. 신(神)은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 대신에 돈과 권력을 섬기는 사람들도 많고, 자기들 스스로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아는 양 1992년 10월 종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첨단 과학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도 없고 겸손함도 없는 인간들 가운데 하느님은 언제나 침묵하고 계십니다. 인간들이 자신을 주장하고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하는 곳에 하느님께서 하실 일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기고만장한 인간들의 오만함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오만과 불신앙이 초래한 불행한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스스로 하느님과 같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하다가 죄를 지어 낙원에서 쫓겨났고, 오만함으로 바벨탑을 쌓았던 인간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소돔과 고모라는 불신앙으로 유황불을 뒤집어쓰고 멸망했습니다. 이러한 불행은 하느님께서 내리신 벌이라기보다 인간들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입니다. 향락과 안일을 추구하면서 돈과 재물의 위력을 믿고 과학 문명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 믿는 오만한 현대인들 가운데서 이러한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을까 우리는 염려하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곧 성탄 대축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구세주의 어머니로 선택하신 이유를 다시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서 마리아가 복된 여인으로 칭송받는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작고 약한 어린 아기로 탄생하셨는지 그 신비를 묵상해 봅시다. 지금은 믿음과 겸손으로 우리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실 자리를 마련하는 시간입니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