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연극의 흥미는 '연민'과 '공포'를 통해 관객들이 카타르시스 를 맛보는 데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더불어 그는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유발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 그중 인물들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꼽았다. 관객은 극중의 인물이 겪고 있는 심신의 고통을 보면서 연민의 감정을 느낌과 동시에, 그러한 고통이나 재난이 혹시 자기에게 도 닥쳐올지 모른다는 두려운 예감이 들어 공포의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일단 받아들여, 거기에다 인간의 근원적 본성 중의 하 나인 사디즘(sadism : 연민을 수반한다)과 매저키즘(masochism : 공포를 수반한다)의 심리 를 대입시키고 거기에 다시금 동양의 음양 사상을 적용시켜,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 효과 를 일종의 보음(補陰) 효과, 즉 다시 말해서 '타나토스(thanatos : 죽음 또는 파괴 욕 구)'의 충족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나는 카타르시스 작용을 일으키는 심리적 동인이, 꼭 연민과 공포에만 한정되는 것 은 아닐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을 줄곧 견지하고 있었다. 물론 인간 역시 적자생존의 법칙 을 따라 살아가는 동물의 일종이라고 볼 때, 강자가 약자에게 느끼는 연민의 감정과 약자가 강자에게 느끼는 공포의 감정이 인간의 실존을 지탱해 주는 가장 기본적인 심리인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컴퓨터 이상으로 복잡 미묘한 인간의 심리는 동물적 본성 이외에도 수많 은 감정 구조를 갖게 마련이기 때문에, 연민과 공포 하나만으로는 카타르시스 작용을 설명하 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연민과 공포를 통한 카타르시스 효과는 우선 비극이라는 장르에만 한 정되고, 주로 연극의 공연 행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연극이 주된 대 중 예술이었지만 대?와서는 그렇지가 못하다. 연극은 오히려 대중적인 공감을 얻지 못하 고 있고,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 또는 소설같은 장르가 대중 예술로서 폭넓게 파급되어 있 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억압된 감정의 대리 배설로서의 카타 르시스 효과를 현대에 있어서도 인정하긴 인정한다 하더라도, 카타르시스를 유발시키는 주 된 요소로서 고대 그리스 연극의 기준이었던 연민과 공포만을 생각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의 연극이나 영화 또는 소설 등의 장르에서 연민과 공포보다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 '질투'와 '선망'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연민과 공포는 물론 무 시할 수 없는 요소이긴 하지만, 복잡다단한 인간관계의 밀림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현대인 들에겐 질투와 선망의 감정이 더욱 크게 관극심리 또는 독서심리로 작용할 것 같다는 느낌 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시대는 귀족과 평민, 그리?노예 계급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이미 귀족이나 왕족으로 태어난 사람에게 평민이 질투를 느낀다는 것 은, 특별한 반골기질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좀 곤란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 나 현대 사회?어쨌든 겉으로는 계급의 구별이 없는 평등 사회이기 때문에, 질투심과 선망 의 감정이 사람들 상호간의 관계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른바 신분 상승 욕구, 다시 말해서 출세욕을 가지고 아둥바둥 설쳐대는 것도 다 주 변 사람들에 대한 질투와 선망때문이다. 대학 교육열이 이상적으로 점점 더 높아만 가는 것 도, 근본을 따져보면 결국 고학력자들이 누리고 있는 신분상의 혜택에 대해 질투와 부러움 을 느끼기 때문인 것이다.
영국이나 일본 등 입헌군주국의 정치가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들보다 더 안정 되어 있다는 사실도 위와 비슷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최고 통치자가 이미 결정되어 있 으므로, 그 사람에게 질투와 선망을 느끼고 자시고 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직 은 누구나 다 넘볼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강렬한 질투심의 대상이 되어, 여간 정치적 선 진국이 아닌 이상에는 언제나 정세가 불안할 수 밖에 없다.
어쨌든 우리는 영화나 소설을 볼 때 우선 질투와 선망의 심리로부터 흥미와 관심의 실마리 를 찾아낸다. 그래서 영화의 경우엔 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무조건 잘생기고 봐야 한다. 이것 이 바로 연극과 영화의 차이인데, 연극은 배우의 얼굴을 멀리서 바라볼 수 밖에 없기 때문 에 얼굴 생김새가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클로즈 업이 가능한 영화에 있어서는 배 우의 얼굴 생김새가 그대로 다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얼굴이 못생긴 배우는 관객들의 질투심을 유발시키기 어렵고, 따라서 타인에 대한 질 투심이 자기 자신에 대한 체념으로 변하여 생겨나는 선망의 심리적 메카니즘을 확보하기 어 려운 것이다. 배우의 미모에 대한 선망의 심리는 일종의 '탐미적 경탄'인 셈인데, 이것이 바 로 예술이 다른 일상사와 관련된 질투심과는 달리 질투심이 승화된 형태로서의 선망을 예술 적 감동의 핵심적인 요소로서 확보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명작소설이나 영화들이 비극적 결말로 끝나는 것은, 주인공의 죽음이나 몰 락이 우리의 질투심을 진정시켜 주어 통쾌한 감정(즉 카타르시스)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라 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따르면 비극적 결말이 주는 카타르시스 효과는 관 객이 주인공의 처지에 감정이입되어 연민과 두려움을 느껴서 생긴 결과라고 되어 있다. 하지 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비극적 결말이 주는 카타르시스 효과의 심리기제를 다음과 같이 본다. 즉 극중 인물에 대한 강렬한 질투심이 주인공의 몰락에 의해 잠시 진정되고, 그 것이 다시 선망의 감정으로 이행되면서 심리적 평정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관 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주인공의 높은 신분이나 미모, 또는 죽거나(뒤마 피스의 <춘희>의 경우) 비참하게 몰락하더라도 (소포클레스의 <외디푸스 왕>의 경우) 범인(凡人)들 처럼 평범하고 단조로운 인생이 아니라 우여곡절과 변화가 많은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내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강렬한 질투심을 느낀 경우는, 비비안 리이 주연의 <애수(哀愁) 원 제 : Waterloo Bridge>를 보면서였다. 비비안 리이가 너무나 매력적인 미모였고 상대역으로 나온 로버트 테일러 역시 지독한 미남이었다. 그래서 나는 로버트 테일러한테는 미칠듯한 질투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그가 미남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특히 그가 비비안 리이라는 미녀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결국 비비안 리이가 자살해 버리자 그 질투심이 조금 안정되면 서 후련한 카타르시스를 맛볼 수 있었다. 소설의 경우에는 레마르크의 <개선문>이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는데, 역시 여주인공 죠앙 마두가 총에 맞아 죽어 버리자 남주인공 라비크에 대 한 질투심이 가라앉았던 것이다. 그러고난 다음에는 계속 비비안 리이나 죠앙 마두에 대한 선망과 연모의 정이 내 가슴 속에서 물결치며 예술적 감동을 이끌어 내었다.
얼굴이 잘생겼다는 것 말고도 질투심을 촉발시키는 요인은 돈, 권력, 명예 등 많이 있다. 고 대 그리스의 비극은 대개 '영웅의 몰락'을 소재로 한 것이었는데, 그 당시에도 관객들은 요 즘만은 못하지만 역시 연민과 공포보다는 질투와 선망을 느꼈을 것이다. 영웅의 몰락 과정 을 지켜보면서 관객이 느끼는 안도감은, 절대로 "극중의 비참한 상황 속으로 감정이 이입되 었다가, 연극이 끝난 뒤에 그 이입 상태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얻어지는 안도감" 따위로는 설 명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양심상 꺼림칙한 질투심으로부터의 해방이요, 더 나 아가서는 부질없는 선망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
Ⅱ
질투 또는 시기심은 자기보다 더 잘 났거나 더 성공한 사람에 대해서 분개하는 태도라고 정 의할 수 있다. 질투심은 대개 자기가 바라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데 대한 욕구불만의 결과 로 온다. 질투심이 강한 사람은 여러 가지 행동을 통해서 이 감정을 나타낸다. 그는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의심이 많거나 고집이 세다. 그는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 에게 욕을 하거나 극단적인 경우에는 신체적 공격을 가하거나 모함을 하기도 한다. 질투심 이 강한 사람은 짜증을 잘내며 흥분하기 쉽고 매사에 과민하다. 자기 자신이 타인들의 수준 과 기대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타인을 중상하거나 모략해서라도 자기의 자존심을 높이려 한다.
물론 어느 정도의 질투심은 경쟁 심리를 촉진시켜 그 사람을 성공의 길로 나아가게 한다. 그 러나 질투심이 굳어져 심각한 상태로까지 되면 정서적 곤란의 증상을 일으키기까지 하는 것 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극, 영화, 소설 등을 통해 억압된 질투심을 대리 배설시키고 그것 을 '적당한 선망'으로 이행시킨다는 것은, 인간의 정서 순화에 있어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하 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인간을 가장 괴롭히는 것이 바로 열등감이고, 열등감은 곧 질투심으 로 이어져 우리의 인격을 왜곡시킨다고 볼 때, 예술 작품을 통한 질투심의 유발은 일종의 면 역기능을 주어 각 개인의 행동이 파행으로 가는 것을 막아 주는 것이다.
만약에 사람들이 질투심을 표현할 수 있는 적당한 배출구를 일상생활에서 찾을 수만 있다 면, 잠재의식 깊숙이 숨어 들어가 있는 억압된 질투심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휴머니즘이 강조되고 도덕교육이 발달할수록, 질투심은 항상 억제되어야 할 대상으 로 간주된다. 그래서 질투심보다는 겸손의 미덕이 더 바람직한 덕목으로 권장되고, 타인에 대한 봉사나 헌신, 그리고 인내심과 극기가 거기에 다시 추가된다. 그러다 보니 어찌 보면 생존 경쟁을 해 나감에 있어 필수적인 심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강한 질투심'이 올바른 배 출구를 찾지 못해 인간의 심성을 더 이중적 은폐성 쪽으로만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버트란트 럿셀은 그의 저서 <행복의 정복(Conquest of Happiness)>에서, 질투심을 불행의 제 일가는 원인으로 규정하고, 겸손의 감정과 질투의 감정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 다.
<불필요한 겸손은 질투와 깊은 관계가 있다. 겸손은 물론 하나의 덕이라고 생각된다. 그러 나 극단의 겸손히 미덕이 될 수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겸손한 인간은 능히 할 수 있는 일 도 감히 해보려고 하지 않는다. 겸손한 인간은 자기가 늘 접촉하는 인간들이 자기보다 다 낫 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특히 부러워하는 마음이 많다. 또 부러워하는 마음 때문에 불행과 악의에 빠지기 쉽다.>
그러면서 그는 질투심을 선용할 것을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질투는 하나의 악이요 또 그 영향 역시 무서운 것이지만, 완전한 악마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질투는 어느 모로 보면 영웅적인 고통의 표현이 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훌륭 한 보금자리를 찾아서, 또는 죽음과 파멸을 찾아서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는 자의 고통이다. 이 절망을 벗어나서 인생의 정도를 발견하려면, 문명인은 정신을 확대했던 것처럼 심성을 널리 확대해야 한다. 자기를 초월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자기를 초월함으로써 우주의 자유 를 획득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극, 영화 등을 통해 질투심을 카타르시스 시킨다는 것은, 허구적이고 위 선적인 윤리로만 가득 차있는 이 세상에서 미쳐 발산시키지 못했던 질투심을 일시적으로나 마 마음껏 발산시키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질투심의 발산은 럿셀의 말대로 심정을 확대시키는 일이 되고, 그러한 심정의 확대는 건전하고 평정한 심리상태로 연결되는 것이 다.
질투와 선망의 심리가 열등감으로부터 기인한다고 볼 때, 아들러(Alfred Adler)의 심리학 이 론의 적용이 가능해진다. 아들러는 프로이트의 범성욕설(汎性慾說)을 거부하고, 인간의 성격 을 결정짓는 것은 성충동이 아니라 '권력에의 의지'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갖 는 정신적 외상의 주요 부분이 주로 어른들에 대한 열등감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보아, 프로 이트의 외디푸스 컴플렉스 이론에 반대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상 성격이나 노이로제 등의 병 인 역시 성적인 갈등에서만이 아니라 성 이외의 여러가지 열등감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주장 했다.
아들러의 학설을 따른다면 인간의 정서 가운데 가장 억압되어 있는 부분이 질투심이라는 결 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질투심과 선망(부러움)은 항상 표리 관계에 있다. 말하자면 애 증병존(愛憎竝存)의 상태라고도 볼 수 있다. 부러움이 '애(愛)'라면 질투심은 '증(憎)'이라 고 할 수 있는데, 부모와 자식의 관계든 남편과 아내의 관계든 모든 인간관계는 애증병존의 심리에 기초하고 있게 마련이므로, 이러한 상극된 감정의 유발이 관객을 우선 흥미로 이끌 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치 우리의 인생에 있어 '삶에의 욕구(Eros)' 와 '죽음에의 욕구(Thanatos)'가 잠재의식 안에서 서로 티격태격하면서 긴장감을 이끌어내듯이, 연극 등 의 예술 장르를 통해 관객들은 질투와 선망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며 드라마틱한 긴장감과 감 정이입의 재미를 맛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는 작품이란, 질투와 선망 중 어느 한 쪽에 지나치게 기울어지 지 않으면서 양자를 묘미있게 조화시켜 나간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이른바 <신데렐라 스토리> 같은 것이 좋은 예다. 만약에 신데렐라가 처음부터 부잣집 딸이나 공주로 나왔다면 관객은 오직 적개심 넘치는 질투의 감정밖에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신데렐라는 일단 계모의 학대를 받으며 비참한 나날을 보내다가 왕자의 눈에 들어 왕자비가 된다. 말하자면 여자 관객들에게 나도 남편만 잘 만나면 저렇게 될 수도 있다는 식의 은근한 희망을 주어, 질투심보다 한층 순화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 선망 쪽으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다. 그러면서도 물론 근본적 질투심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것은 신데렐라가 갖고 있는 빼 어난 미모에 대한 질투심이다. 못생긴 여자가 고생 끝에 출세했다면 관객은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한다. 질투심은 전혀없이 오직 선망만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관극(또는 독서)의 흥미는, 작가가 관객(또는 독자)의 마음속에다 질투와 선망의 감정을 얼마나 교묘 하게 '양다리 걸치기'해 줬느냐, 못해 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Ⅲ
질투와 선망이 연민과 공포보다 더 큰 관극 심리로 작용하게 된 것은 역시 텔레비전 드라마 와 영화의 발달때문이라 하겠다. 과거의 연극은 주로 큰 극장의 대형 무대에서 공연되었기 때문에 시각적인 면보다는 청각적인 면에 의존하게 되는 수가 많았다. 말하자면 배우의 얼굴 이나 의상보다는 대사에 의존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연극이나 소설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 었다. 둘 다 장황한 대사나 사설을 통해서 나오는 작가의 주제 의식이나 교훈적 메시지가 관 객의 이성에 전달되어, 감성 또는 본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 레스가 언급한 그리스의 비극들은 '초월적 체념'을 공통된 주제로 내세울 수 있었고, 세익스 피어의 비극 역시 '대자연의 연쇄적 질서'가 주제였다.
그런데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의 경우에 있어서는 주제 의식도 물론 중요하지만 순간순간 의 시각적 영상미가 주는 '감각적 흡입'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이성의 개입이 어려워지고 원초적 감성들만이 활개치게 된다. 그래서 관객들은 스토리나 대사보다도 주연 배우의 얼굴 이 마음에 드느냐, 안 드느냐에 따라 그 작품이 재미있고 없음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 러므로 현대의 영상매체 예술에서 관객의 흥미를 유발시킬 수 있는 가장 큰 심리적 요소는 역시 '외모 컴플렉스'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가진 열등감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인 열등감 은 아무래도 외모(신장, 체격 등을 포함한) 컴플렉스라고 할 수 있으므로, 주인공은 어쨌든 잘 생기고 봐야 한다.
그 한 예를 샤로트 브론테의 소설 <제인 에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인 에어>는 서구 문 학 사상 제일 처음으로 미인이 아닌 여자를 여자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화제가 된 작품이다. 이전까지는 어떤 종류의 소설이든 여주인공은 무조건 미녀여야만 했는데, 제인 에 어는 왜소하고 못생긴 여자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 리얼리티에 한층 접근하고 있다는 평 가를 받았다.
그러나 영화로 만들어진 <제인 에어>에서 제인 에어 역으로 나온 여배우들은 하나같이 다 미 인이었다. 흑백영화로 만들어진 최초의 영화에서는 당대의 미녀 스타 죤 폰테인이 제인 에 어 역을 맡았고, 1970 년대에 만들어진 천연색 영화에서도 역시 미녀 배우 스잔나 요크가 주 역을 맡았다. 영화에서 제인 에어는 대사에서만은 "좀 못생긴 여자"로 나온다. 하지만 화면 에 비쳐지는 여배우의 얼굴은 정반대였다.
만약에 정말로 못생긴 여배우가 영화에서 제인 에어 역을 맡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도 관객들은 흥미를 잃어버렸을 것이 뻔하다. 여배우가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 다.
이와 비슷한 예를 빅토르 위고의 소설 <빠리의 노트르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원작 소설 에서나 영화화된 것에서나, 남주인공인 콰지모도는 지극히 못생긴 꼽추로 나오고, 여주인공 에스메랄다는 천하 절색으로 나온다. 이러한 관례는 현대 소설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제 인 에어> 이후로 여주인공을 못생기게 설정한 작품은 거의 없다. 프랑스 자연주의 작가 에 밀 졸라나 미국의 자연주의 작가 테어도어 드라이저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고생에 찌들어 지 내는 밑바닥 인생들을 그리고 있지만, 적어도 여주인공만은 다 빼어난 미녀들인 것이다.
다시 아들러의 심리학 이론을 원용해 보자면, 아들러는 모든 여성들은 근본적으로 남성들에 대해 힘과 권위의 면에서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영화나 소설에서 남 자 주인공이 혹 못생겼다 하더라도, 여성 관객이나 여성 독자들은 무조건 열등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여자 주인공이 못생기게 나오면 남자 관객들뿐만 아니라 여성 관객들까지도 흥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여자가 남성의 힘과 권위를 억누를 수 있는 유 일한 무기는 역시 미모뿐이라는 인식이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여성 관객들은 근본적으로 남자주인공을 질투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남자 주인공의 외모는 별 문제가 안되고 오로지 여자 주인공의 외모가 질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남 성 관객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일단 모든 여성들에 대해 근본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 으므로, 아주 예쁜 여주인공이 등장하지 않으면 질투심이 사그라들어 버린다. 이럴 경우 남 자 관객들이 느끼는 질투심은 '미녀를 차지한 남주인공'에 대한 질투심이요, 힘있는 남성의 보호 아래 별다른 노역(勞役) 없이 편안한 매저키즘을 즐기는 여자 주인공에 대한 질투심이 다. 또는 남자들이 할 수 없는 화려한 화장이나 옷차림 등을, 여자들이 마음껏 할 수 있다는 데 대한 질투심일 수도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수컷이 암컷보다 화려한게 정석으로 되어 있지만, 인간의 세계에서는 남성을 노동과 전쟁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그들의 ‘미적 욕 구’를 억압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영화나 텔레비전의 발달은 모든 문학작품들을 영상으로 극화(劇化)시켜 압축처리하는 결과 를 낳았다. 마가렛트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것도 원작 소설은 안보고 영 화만 본 사람들이 많고,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같은 것도 그렇다. 영상 언어의 특징은 그 것이 <깨어 있는 꿈꾸기>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인데, 특히 영화의 경우가 더 그렇다. 극장 안이 무조건 캄캄해야만 상영이 가능하므로, 관객들은 마치 잠을 자는 것과 같은 편안한 상 태에서 멍청하게 백일몽을 즐기는 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스크린은 꿈처럼 화려하 고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면 안되기 때문에, 실제적 리얼리티에 신경쓰기보다는 '미학적 의장 (意匠)'이 더 중요한 요소로 간주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영상 언어가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것이 <프레임(frame)의 장난>이요 <환상의 조작>이라 는 점에 있다. 따라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연극이나 소설에 있어서 보다 한층 더 질투심 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아무리 리얼리즘 기법으로 촬영된 영화라 하더라도 '표현주의적 과 장' 또는 '탈(脫) 현실'의 요소가 반드시 끼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상투적인 삶에 지쳐있게 마련이고, 늘 현실을 떠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게 마련인 것이다. 그 래서 마치 우리가 길몽이든 악몽이든 꿈을 깨고 난 다음에 그 희미하면서도 애틋한 잔영(殘 影)을 추적하면서 아련한 노스탤지어에 빠져들 듯이, 영화의 스크린은 비록 그것이 잔인한 장면이거나 괴기스러운 장면이라 할지라도 관객들에게 현실을 탈출하고 싶은 충동과 몽환경 (夢幻境)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감정은 영화가 끝난 후까지 지속되어, 연극의 경우와는 다르게 관객들로 하여금 줄 곧 현실에 대한 짜증과 스쳐지나간 꿈에 대한 찝찝하고 안쓰러운 미련을 느끼게끔 만들어 주 는 것이다. 그런데 연극은 프레임의 장난이나 몽타주 기법같은 것이 있을 수 없고, 언제나 진짜 살아서 움직이는 배우들의 동작을 전경(全景)으로만 바라보게 되기 때문에, 막을 내림 과 동시에 극적 환상은 아주 간단히 깨어져 버린다. 그래서 질투와 선망의 여운도 영화보다 짧을 수 밖에 없다.
아무튼 영상 표현은 인물이든 주변 배경이든 '아름다움'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연민과 공포> 보다는 <질투와 선망>의 심리가 한층 더 뿌리깊게 관객들 마음속에 자리잡게 된다. 설사 괴기 영화가 주는 공포감이라 할지라도 거기엔 대게 미녀가 양념으로 등장하게 마련이고(<드라큘라>시리즈를 상기하라), 또한 그리스의 비극같은 것이 갖는 철학 적 대사의 사족이 없으므로, 권태로운 일상속에 빠져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격심한 열등감 과 함께 스크린 속에서 이루어지는 무서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달착지근한 <상상적 현실> 에 대한 질투심 내지는 부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Ⅳ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과 공포의 개념을 오로지 비극에만 적용시켰고, 희극에 관해서는 별 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체로 고대 그리스의 희극은 비극과는 달리 귀족이나 영웅 이 아니라 평민 또는 천민들이 등장해야 하고, 따라서 관객들은 극중 인물에 대해 우월감을 느낌과 동시에, '경멸과 조소'의 느낌을 통해 각자의 실수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지혜 를 얻게 된다는 것이 희극 이론의 골자였다.
이러한 고대의 희극 이론은 현대엔 잘 들어맞지 않는다. 희극에도 얼마든지 귀족이 등장할 수 있고, 관객들의 감정 역시 단순한 경멸과 조소가 아니라 작가의 예리한 풍자나 냉소적 인 간관에 대한 지성적 공감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18세기의 극작가 호레이스 월폴 (Horace Walpole)은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고, 느끼는 자에겐 비극이다"라는 유명한 말 을 남겼다. 현대의 희극에서는 주로 사회적인 질서와 가치 체계, 그리고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시험해 보며, 종종 이성적인 가치 체계에서 벗어난 괴팍한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일탈적 무질서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현대의 희극에 있어서는 더욱 더 질투와 선망의 관극 심리가 극적 긴장감의 유발수 단이 될 수 밖에 없다. 관객은 극작가의 냉철한 지성과 교묘한 말솜씨에 대해서 질투를 느끼 기도 하고, 기존의 윤리를 조소하며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게 일탈 행위를 되풀이하는 극중 인 물에 대해 부러움을 느끼는 것이다(채플린의 코메디 영화가 좋은 예다).
또한 결말 부분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을 일단 희극으로 상정한다면, 더욱 그래서 앞서 언급한 '신데렐라 스토리' 같은 경우에는 작가나 주인공의 지성에 대한 질투가 아니라, 단 순히 여주인공의 미모나 결혼을 통한 급격한 신분 상승에 대해 질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본 희극 영화는 버나드 쇼의 희곡인 <피그말리온(Pigmalion)>을 뮤지 컬 영화로 만든 <마이 훼어 레이디(My fair Lady)>였는데, 나는 거기 나오는 오드리 헵번의 청초하면서도 요염한 미모에 부러움을 느꼈고, 그러한 미녀를 차지한 귀족 신분의 대학교 수 렉스 해리슨에 대해서 질투심을 느꼈다.
그러므로 연민과 공포가 비극에만 적용되는 것과는 달리, 질투와 선망은 비극이든 희극이든 어느 것에나 두루 적용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남는 문제는, 연민과 공포가 주는 카타르시스만큼의 대리 배설 효과를 '질투 와 선망'이 감당해 낼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를 의학적인 의 미로 사용하여, 정신에 축적된 감정의 불순물들을 설사시킨다는 뜻으로 썼다. 나는 그것을 결국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대리 배설로 보았는데, 그렇다면 과연 '질투와 선망' 역시 그러 한 작용을 해낼 수 있는 것일까.
강자가 약자에게 느끼는 연민은 확실히 새디즘에 가깝고, 약자가 강자에게 느끼는 공포는 확 실히 매저키즘에 가깝다. 그러나 질투와 선망은 아무래도 둘 다 약자 쪽에만 속하는 감정이 어서, 굳이 새도매저키즘의 개념을 적용시킨다면 매저키즘 쪽에 더 가깝다고 할 것이다. 그 러니까 현대의 관객들은 연극이나 영화 등을 통해 남녀를 불문하고 새디즘보다는 매저키즘 의 쾌감을 무의식중에 맛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영화의 경우에는 그러한 가설의 입증이 더욱 가능한데, 캄캄한 영화간 안에 갇혀있는 관객들은 마치 동굴 속에 갇혀진 처지와도 같아서(또는 모태의 자궁속으로 되돌아간 처지와 도 같아서), 완전히 수동적으로 되어 일방적으로 지나가는 스크린의 화면을 무작정 쫓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연극의 경우에도 극장 내부가 어두운 것은 마찬가지만, 요즘은 '마 당극'이나 '거리극'같은 것도 종종 시도되어 캄캄한 극장 내부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고 있 다. 또 더 나아가 고대 그리스의 연극처럼 환한 대낮에 노천극장에서 공연한다거나, 극장 안 에서 공연한다 하더라도 실내의 불을 켜고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특히 브레히트는 그의 소외 효과(疏外效果) 이론에서 관객들의 감정이 무대 위의 공연행위 속으로 이입되거나 함 입(含入)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므로, 브레히트가 창시한 서사극의 양식에서는 관 객들이 더욱더 새디스트의 입장에 선다고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일단 영화 예술 하나만 가지고 볼 때, 현대의 관객들은 질투와 선망의 감정을 통 해 억압되어진 매저키스틱한 욕구들을 카타르시스 시키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 러므로 영화가 현대의 대중 예술 가운데 가장 큰 관객을 확보하고 있는 장르라는 점을 고려 한다면, 현대인들은 누구나 잠재적으로 매저키스트가 되고 싶어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첨 단 과학 문명의 발전과 인구의 급증과 함께 찾아온 바쁘고 복잡다기한 현대 사회는, 그 안 에 살고 있는 인간들로 하여금 능동적인 행동 양식보다는 수동적인 행동 양식을 취하도록 하 여, 책임감도 의무감도 필요없는 <안락한 피보호(被保護)>의 상태, 즉 매저키스트로서의 상 태를 갈구하게 만들어 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질투와 선망의 심리를 꼭 매저키즘의 카타르시스 효과에 연결시키지 않는다 하더라 도, '질투와 선망'이 대중 예술 전반에 걸쳐 관객 또는 독자의 감상 욕구를 형성하는 기본 동기라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고대 영웅 소설에까지도 충분히 적용 가 능한 얘기이고, <춘향전>이나 <구운몽> 역시 그렇다. 소설이 비극적 결말로 끝나든 해피엔딩 으로 끝나든, 독자들은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출중한 미모나 높은 신분 등에 질투와 부 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흥부전>의 경우라면 흥부가 어쩌다 제비 다리 한 번 고 쳐주고 크게 횡재를 한 것에 대한 질투와 부러움이 된다.
또한 현대 영화뿐만 아니라 현대 소설까지도 그런데, (요즘 유행하는 미국 작가 시드니 셸던 의 소설류가 바로 좋은 예라 하겠다.) 셸던의 소설은 하나같이 여자 주인공이 빼어난 미모 를 밑천으로 크게 성공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예술은 우선 대중 예술과 순수 예술의 경계가 없어질 것이고, 특히 영화 와 연극 그리고 소설의 경우에는 상호간의 교섭이 더욱 활발해져서, 과거의 예술이 주무기 로 삼고 있던 <연민과 공포를 통한 비극적 장엄미>의 표현 기능이 <질투와 선망을 통한 일상 적 스트레스로부터의 도피 기능> 쪽으로 바뀌어 질 것이 틀림없다.
마광수 ( 연세대 국문과 교수)
Ⅰ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연극의 흥미는 '연민'과 '공포'를 통해 관객들이 카타르시스
를 맛보는 데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더불어 그는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유발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 그중 인물들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꼽았다. 관객은 극중의 인물이 겪고 있는
심신의 고통을 보면서 연민의 감정을 느낌과 동시에, 그러한 고통이나 재난이 혹시 자기에게
도 닥쳐올지 모른다는 두려운 예감이 들어 공포의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일단 받아들여, 거기에다 인간의 근원적 본성 중의 하
나인 사디즘(sadism : 연민을 수반한다)과 매저키즘(masochism : 공포를 수반한다)의 심리
를 대입시키고 거기에 다시금 동양의 음양 사상을 적용시켜,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 효과
를 일종의 보음(補陰) 효과, 즉 다시 말해서 '타나토스(thanatos : 죽음 또는 파괴 욕
구)'의 충족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나는 카타르시스 작용을 일으키는 심리적 동인이, 꼭 연민과 공포에만 한정되는 것
은 아닐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을 줄곧 견지하고 있었다. 물론 인간 역시 적자생존의 법칙
을 따라 살아가는 동물의 일종이라고 볼 때, 강자가 약자에게 느끼는 연민의 감정과 약자가
강자에게 느끼는 공포의 감정이 인간의 실존을 지탱해 주는 가장 기본적인 심리인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컴퓨터 이상으로 복잡 미묘한 인간의 심리는 동물적 본성 이외에도 수많
은 감정 구조를 갖게 마련이기 때문에, 연민과 공포 하나만으로는 카타르시스 작용을 설명하
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연민과 공포를 통한 카타르시스 효과는 우선 비극이라는 장르에만 한
정되고, 주로 연극의 공연 행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연극이 주된 대
중 예술이었지만 대?와서는 그렇지가 못하다. 연극은 오히려 대중적인 공감을 얻지 못하
고 있고,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 또는 소설같은 장르가 대중 예술로서 폭넓게 파급되어 있
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억압된 감정의 대리 배설로서의 카타
르시스 효과를 현대에 있어서도 인정하긴 인정한다 하더라도, 카타르시스를 유발시키는 주
된 요소로서 고대 그리스 연극의 기준이었던 연민과 공포만을 생각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의 연극이나 영화 또는 소설 등의 장르에서 연민과 공포보다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 '질투'와 '선망'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연민과 공포는 물론 무
시할 수 없는 요소이긴 하지만, 복잡다단한 인간관계의 밀림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현대인
들에겐 질투와 선망의 감정이 더욱 크게 관극심리 또는 독서심리로 작용할 것 같다는 느낌
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시대는 귀족과 평민, 그리?노예 계급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이미 귀족이나 왕족으로 태어난 사람에게 평민이 질투를 느낀다는 것
은, 특별한 반골기질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좀 곤란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
나 현대 사회?어쨌든 겉으로는 계급의 구별이 없는 평등 사회이기 때문에, 질투심과 선망
의 감정이 사람들 상호간의 관계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른바 신분 상승 욕구, 다시 말해서 출세욕을 가지고 아둥바둥 설쳐대는 것도 다 주
변 사람들에 대한 질투와 선망때문이다. 대학 교육열이 이상적으로 점점 더 높아만 가는 것
도, 근본을 따져보면 결국 고학력자들이 누리고 있는 신분상의 혜택에 대해 질투와 부러움
을 느끼기 때문인 것이다.
영국이나 일본 등 입헌군주국의 정치가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들보다 더 안정
되어 있다는 사실도 위와 비슷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최고 통치자가 이미 결정되어 있
으므로, 그 사람에게 질투와 선망을 느끼고 자시고 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직
은 누구나 다 넘볼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강렬한 질투심의 대상이 되어, 여간 정치적 선
진국이 아닌 이상에는 언제나 정세가 불안할 수 밖에 없다.
어쨌든 우리는 영화나 소설을 볼 때 우선 질투와 선망의 심리로부터 흥미와 관심의 실마리
를 찾아낸다. 그래서 영화의 경우엔 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무조건 잘생기고 봐야 한다. 이것
이 바로 연극과 영화의 차이인데, 연극은 배우의 얼굴을 멀리서 바라볼 수 밖에 없기 때문
에 얼굴 생김새가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클로즈 업이 가능한 영화에 있어서는 배
우의 얼굴 생김새가 그대로 다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얼굴이 못생긴 배우는 관객들의 질투심을 유발시키기 어렵고, 따라서 타인에 대한 질
투심이 자기 자신에 대한 체념으로 변하여 생겨나는 선망의 심리적 메카니즘을 확보하기 어
려운 것이다. 배우의 미모에 대한 선망의 심리는 일종의 '탐미적 경탄'인 셈인데, 이것이 바
로 예술이 다른 일상사와 관련된 질투심과는 달리 질투심이 승화된 형태로서의 선망을 예술
적 감동의 핵심적인 요소로서 확보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명작소설이나 영화들이 비극적 결말로 끝나는 것은, 주인공의 죽음이나 몰
락이 우리의 질투심을 진정시켜 주어 통쾌한 감정(즉 카타르시스)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라
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따르면 비극적 결말이 주는 카타르시스 효과는 관
객이 주인공의 처지에 감정이입되어 연민과 두려움을 느껴서 생긴 결과라고 되어 있다. 하지
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비극적 결말이 주는 카타르시스 효과의 심리기제를 다음과
같이 본다. 즉 극중 인물에 대한 강렬한 질투심이 주인공의 몰락에 의해 잠시 진정되고, 그
것이 다시 선망의 감정으로 이행되면서 심리적 평정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관
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주인공의 높은 신분이나 미모, 또는 죽거나(뒤마 피스의
<춘희>의 경우) 비참하게 몰락하더라도 (소포클레스의 <외디푸스 왕>의 경우) 범인(凡人)들
처럼 평범하고 단조로운 인생이 아니라 우여곡절과 변화가 많은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내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강렬한 질투심을 느낀 경우는, 비비안 리이 주연의 <애수(哀愁) 원
제 : Waterloo Bridge>를 보면서였다. 비비안 리이가 너무나 매력적인 미모였고 상대역으로
나온 로버트 테일러 역시 지독한 미남이었다. 그래서 나는 로버트 테일러한테는 미칠듯한
질투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그가 미남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특히 그가 비비안 리이라는
미녀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결국 비비안 리이가 자살해 버리자 그 질투심이 조금 안정되면
서 후련한 카타르시스를 맛볼 수 있었다. 소설의 경우에는 레마르크의 <개선문>이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는데, 역시 여주인공 죠앙 마두가 총에 맞아 죽어 버리자 남주인공 라비크에 대
한 질투심이 가라앉았던 것이다. 그러고난 다음에는 계속 비비안 리이나 죠앙 마두에 대한
선망과 연모의 정이 내 가슴 속에서 물결치며 예술적 감동을 이끌어 내었다.
얼굴이 잘생겼다는 것 말고도 질투심을 촉발시키는 요인은 돈, 권력, 명예 등 많이 있다. 고
대 그리스의 비극은 대개 '영웅의 몰락'을 소재로 한 것이었는데, 그 당시에도 관객들은 요
즘만은 못하지만 역시 연민과 공포보다는 질투와 선망을 느꼈을 것이다. 영웅의 몰락 과정
을 지켜보면서 관객이 느끼는 안도감은, 절대로 "극중의 비참한 상황 속으로 감정이 이입되
었다가, 연극이 끝난 뒤에 그 이입 상태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얻어지는 안도감" 따위로는 설
명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양심상 꺼림칙한 질투심으로부터의 해방이요, 더 나
아가서는 부질없는 선망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
Ⅱ
질투 또는 시기심은 자기보다 더 잘 났거나 더 성공한 사람에 대해서 분개하는 태도라고 정
의할 수 있다. 질투심은 대개 자기가 바라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데 대한 욕구불만의 결과
로 온다. 질투심이 강한 사람은 여러 가지 행동을 통해서 이 감정을 나타낸다. 그는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의심이 많거나 고집이 세다. 그는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
에게 욕을 하거나 극단적인 경우에는 신체적 공격을 가하거나 모함을 하기도 한다. 질투심
이 강한 사람은 짜증을 잘내며 흥분하기 쉽고 매사에 과민하다. 자기 자신이 타인들의 수준
과 기대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타인을 중상하거나 모략해서라도 자기의 자존심을
높이려 한다.
물론 어느 정도의 질투심은 경쟁 심리를 촉진시켜 그 사람을 성공의 길로 나아가게 한다. 그
러나 질투심이 굳어져 심각한 상태로까지 되면 정서적 곤란의 증상을 일으키기까지 하는 것
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극, 영화, 소설 등을 통해 억압된 질투심을 대리 배설시키고 그것
을 '적당한 선망'으로 이행시킨다는 것은, 인간의 정서 순화에 있어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하
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인간을 가장 괴롭히는 것이 바로 열등감이고, 열등감은 곧 질투심으
로 이어져 우리의 인격을 왜곡시킨다고 볼 때, 예술 작품을 통한 질투심의 유발은 일종의 면
역기능을 주어 각 개인의 행동이 파행으로 가는 것을 막아 주는 것이다.
만약에 사람들이 질투심을 표현할 수 있는 적당한 배출구를 일상생활에서 찾을 수만 있다
면, 잠재의식 깊숙이 숨어 들어가 있는 억압된 질투심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휴머니즘이 강조되고 도덕교육이 발달할수록, 질투심은 항상 억제되어야 할 대상으
로 간주된다. 그래서 질투심보다는 겸손의 미덕이 더 바람직한 덕목으로 권장되고, 타인에
대한 봉사나 헌신, 그리고 인내심과 극기가 거기에 다시 추가된다. 그러다 보니 어찌 보면
생존 경쟁을 해 나감에 있어 필수적인 심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강한 질투심'이 올바른 배
출구를 찾지 못해 인간의 심성을 더 이중적 은폐성 쪽으로만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버트란트 럿셀은 그의 저서 <행복의 정복(Conquest of Happiness)>에서, 질투심을 불행의 제
일가는 원인으로 규정하고, 겸손의 감정과 질투의 감정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
다.
<불필요한 겸손은 질투와 깊은 관계가 있다. 겸손은 물론 하나의 덕이라고 생각된다. 그러
나 극단의 겸손히 미덕이 될 수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겸손한 인간은 능히 할 수 있는 일
도 감히 해보려고 하지 않는다. 겸손한 인간은 자기가 늘 접촉하는 인간들이 자기보다 다 낫
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특히 부러워하는 마음이 많다. 또 부러워하는 마음 때문에 불행과
악의에 빠지기 쉽다.>
그러면서 그는 질투심을 선용할 것을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질투는 하나의 악이요 또 그 영향 역시 무서운 것이지만, 완전한 악마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질투는 어느 모로 보면 영웅적인 고통의 표현이 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훌륭
한 보금자리를 찾아서, 또는 죽음과 파멸을 찾아서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는 자의 고통이다.
이 절망을 벗어나서 인생의 정도를 발견하려면, 문명인은 정신을 확대했던 것처럼 심성을
널리 확대해야 한다. 자기를 초월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자기를 초월함으로써 우주의 자유
를 획득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극, 영화 등을 통해 질투심을 카타르시스 시킨다는 것은, 허구적이고 위
선적인 윤리로만 가득 차있는 이 세상에서 미쳐 발산시키지 못했던 질투심을 일시적으로나
마 마음껏 발산시키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질투심의 발산은 럿셀의 말대로 심정을
확대시키는 일이 되고, 그러한 심정의 확대는 건전하고 평정한 심리상태로 연결되는 것이
다.
질투와 선망의 심리가 열등감으로부터 기인한다고 볼 때, 아들러(Alfred Adler)의 심리학 이
론의 적용이 가능해진다. 아들러는 프로이트의 범성욕설(汎性慾說)을 거부하고, 인간의 성격
을 결정짓는 것은 성충동이 아니라 '권력에의 의지'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갖
는 정신적 외상의 주요 부분이 주로 어른들에 대한 열등감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보아, 프로
이트의 외디푸스 컴플렉스 이론에 반대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상 성격이나 노이로제 등의 병
인 역시 성적인 갈등에서만이 아니라 성 이외의 여러가지 열등감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주장
했다.
아들러의 학설을 따른다면 인간의 정서 가운데 가장 억압되어 있는 부분이 질투심이라는 결
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질투심과 선망(부러움)은 항상 표리 관계에 있다. 말하자면 애
증병존(愛憎竝存)의 상태라고도 볼 수 있다. 부러움이 '애(愛)'라면 질투심은 '증(憎)'이라
고 할 수 있는데, 부모와 자식의 관계든 남편과 아내의 관계든 모든 인간관계는 애증병존의
심리에 기초하고 있게 마련이므로, 이러한 상극된 감정의 유발이 관객을 우선 흥미로 이끌
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치 우리의 인생에 있어 '삶에의 욕구(Eros)' 와 '죽음에의
욕구(Thanatos)'가 잠재의식 안에서 서로 티격태격하면서 긴장감을 이끌어내듯이, 연극 등
의 예술 장르를 통해 관객들은 질투와 선망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며 드라마틱한 긴장감과 감
정이입의 재미를 맛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는 작품이란, 질투와 선망 중 어느 한 쪽에 지나치게 기울어지
지 않으면서 양자를 묘미있게 조화시켜 나간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이른바 <신데렐라
스토리> 같은 것이 좋은 예다. 만약에 신데렐라가 처음부터 부잣집 딸이나 공주로 나왔다면
관객은 오직 적개심 넘치는 질투의 감정밖에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신데렐라는 일단
계모의 학대를 받으며 비참한 나날을 보내다가 왕자의 눈에 들어 왕자비가 된다. 말하자면
여자 관객들에게 나도 남편만 잘 만나면 저렇게 될 수도 있다는 식의 은근한 희망을 주어,
질투심보다 한층 순화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 선망 쪽으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다. 그러면서도 물론 근본적 질투심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것은 신데렐라가 갖고 있는 빼
어난 미모에 대한 질투심이다. 못생긴 여자가 고생 끝에 출세했다면 관객은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한다. 질투심은 전혀없이 오직 선망만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관극(또는
독서)의 흥미는, 작가가 관객(또는 독자)의 마음속에다 질투와 선망의 감정을 얼마나 교묘
하게 '양다리 걸치기'해 줬느냐, 못해 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Ⅲ
질투와 선망이 연민과 공포보다 더 큰 관극 심리로 작용하게 된 것은 역시 텔레비전 드라마
와 영화의 발달때문이라 하겠다. 과거의 연극은 주로 큰 극장의 대형 무대에서 공연되었기
때문에 시각적인 면보다는 청각적인 면에 의존하게 되는 수가 많았다. 말하자면 배우의 얼굴
이나 의상보다는 대사에 의존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연극이나 소설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
었다. 둘 다 장황한 대사나 사설을 통해서 나오는 작가의 주제 의식이나 교훈적 메시지가 관
객의 이성에 전달되어, 감성 또는 본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
레스가 언급한 그리스의 비극들은 '초월적 체념'을 공통된 주제로 내세울 수 있었고, 세익스
피어의 비극 역시 '대자연의 연쇄적 질서'가 주제였다.
그런데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의 경우에 있어서는 주제 의식도 물론 중요하지만 순간순간
의 시각적 영상미가 주는 '감각적 흡입'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이성의 개입이 어려워지고
원초적 감성들만이 활개치게 된다. 그래서 관객들은 스토리나 대사보다도 주연 배우의 얼굴
이 마음에 드느냐, 안 드느냐에 따라 그 작품이 재미있고 없음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
러므로 현대의 영상매체 예술에서 관객의 흥미를 유발시킬 수 있는 가장 큰 심리적 요소는
역시 '외모 컴플렉스'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가진 열등감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인 열등감
은 아무래도 외모(신장, 체격 등을 포함한) 컴플렉스라고 할 수 있으므로, 주인공은 어쨌든
잘 생기고 봐야 한다.
그 한 예를 샤로트 브론테의 소설 <제인 에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인 에어>는 서구 문
학 사상 제일 처음으로 미인이 아닌 여자를 여자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화제가 된
작품이다. 이전까지는 어떤 종류의 소설이든 여주인공은 무조건 미녀여야만 했는데, 제인 에
어는 왜소하고 못생긴 여자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 리얼리티에 한층 접근하고 있다는 평
가를 받았다.
그러나 영화로 만들어진 <제인 에어>에서 제인 에어 역으로 나온 여배우들은 하나같이 다 미
인이었다. 흑백영화로 만들어진 최초의 영화에서는 당대의 미녀 스타 죤 폰테인이 제인 에
어 역을 맡았고, 1970 년대에 만들어진 천연색 영화에서도 역시 미녀 배우 스잔나 요크가 주
역을 맡았다. 영화에서 제인 에어는 대사에서만은 "좀 못생긴 여자"로 나온다. 하지만 화면
에 비쳐지는 여배우의 얼굴은 정반대였다.
만약에 정말로 못생긴 여배우가 영화에서 제인 에어 역을 맡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도 관객들은 흥미를 잃어버렸을 것이 뻔하다. 여배우가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
다.
이와 비슷한 예를 빅토르 위고의 소설 <빠리의 노트르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원작 소설
에서나 영화화된 것에서나, 남주인공인 콰지모도는 지극히 못생긴 꼽추로 나오고, 여주인공
에스메랄다는 천하 절색으로 나온다. 이러한 관례는 현대 소설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제
인 에어> 이후로 여주인공을 못생기게 설정한 작품은 거의 없다. 프랑스 자연주의 작가 에
밀 졸라나 미국의 자연주의 작가 테어도어 드라이저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고생에 찌들어 지
내는 밑바닥 인생들을 그리고 있지만, 적어도 여주인공만은 다 빼어난 미녀들인 것이다.
다시 아들러의 심리학 이론을 원용해 보자면, 아들러는 모든 여성들은 근본적으로 남성들에
대해 힘과 권위의 면에서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영화나 소설에서 남
자 주인공이 혹 못생겼다 하더라도, 여성 관객이나 여성 독자들은 무조건 열등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여자 주인공이 못생기게 나오면 남자 관객들뿐만 아니라
여성 관객들까지도 흥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여자가 남성의 힘과 권위를 억누를 수 있는 유
일한 무기는 역시 미모뿐이라는 인식이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여성 관객들은 근본적으로 남자주인공을 질투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남자 주인공의 외모는
별 문제가 안되고 오로지 여자 주인공의 외모가 질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남
성 관객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일단 모든 여성들에 대해 근본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
으므로, 아주 예쁜 여주인공이 등장하지 않으면 질투심이 사그라들어 버린다. 이럴 경우 남
자 관객들이 느끼는 질투심은 '미녀를 차지한 남주인공'에 대한 질투심이요, 힘있는 남성의
보호 아래 별다른 노역(勞役) 없이 편안한 매저키즘을 즐기는 여자 주인공에 대한 질투심이
다. 또는 남자들이 할 수 없는 화려한 화장이나 옷차림 등을, 여자들이 마음껏 할 수 있다는
데 대한 질투심일 수도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수컷이 암컷보다 화려한게 정석으로 되어
있지만, 인간의 세계에서는 남성을 노동과 전쟁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그들의 ‘미적 욕
구’를 억압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영화나 텔레비전의 발달은 모든 문학작품들을 영상으로 극화(劇化)시켜 압축처리하는 결과
를 낳았다. 마가렛트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것도 원작 소설은 안보고 영
화만 본 사람들이 많고,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같은 것도 그렇다. 영상 언어의 특징은 그
것이 <깨어 있는 꿈꾸기>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인데, 특히 영화의 경우가 더 그렇다. 극장
안이 무조건 캄캄해야만 상영이 가능하므로, 관객들은 마치 잠을 자는 것과 같은 편안한 상
태에서 멍청하게 백일몽을 즐기는 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스크린은 꿈처럼 화려하
고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면 안되기 때문에, 실제적 리얼리티에 신경쓰기보다는 '미학적 의장
(意匠)'이 더 중요한 요소로 간주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영상 언어가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것이 <프레임(frame)의 장난>이요 <환상의 조작>이라
는 점에 있다. 따라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연극이나 소설에 있어서 보다 한층 더 질투심
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아무리 리얼리즘 기법으로 촬영된 영화라 하더라도 '표현주의적 과
장' 또는 '탈(脫) 현실'의 요소가 반드시 끼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상투적인
삶에 지쳐있게 마련이고, 늘 현실을 떠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게 마련인 것이다. 그
래서 마치 우리가 길몽이든 악몽이든 꿈을 깨고 난 다음에 그 희미하면서도 애틋한 잔영(殘
影)을 추적하면서 아련한 노스탤지어에 빠져들 듯이, 영화의 스크린은 비록 그것이 잔인한
장면이거나 괴기스러운 장면이라 할지라도 관객들에게 현실을 탈출하고 싶은 충동과 몽환경
(夢幻境)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감정은 영화가 끝난 후까지 지속되어, 연극의 경우와는 다르게 관객들로 하여금 줄
곧 현실에 대한 짜증과 스쳐지나간 꿈에 대한 찝찝하고 안쓰러운 미련을 느끼게끔 만들어 주
는 것이다. 그런데 연극은 프레임의 장난이나 몽타주 기법같은 것이 있을 수 없고, 언제나
진짜 살아서 움직이는 배우들의 동작을 전경(全景)으로만 바라보게 되기 때문에, 막을 내림
과 동시에 극적 환상은 아주 간단히 깨어져 버린다. 그래서 질투와 선망의 여운도 영화보다
짧을 수 밖에 없다.
아무튼 영상 표현은 인물이든 주변 배경이든 '아름다움'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연민과 공포> 보다는 <질투와 선망>의 심리가 한층 더 뿌리깊게 관객들 마음속에
자리잡게 된다. 설사 괴기 영화가 주는 공포감이라 할지라도 거기엔 대게 미녀가 양념으로
등장하게 마련이고(<드라큘라>시리즈를 상기하라), 또한 그리스의 비극같은 것이 갖는 철학
적 대사의 사족이 없으므로, 권태로운 일상속에 빠져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격심한 열등감
과 함께 스크린 속에서 이루어지는 무서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달착지근한 <상상적 현실>
에 대한 질투심 내지는 부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Ⅳ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과 공포의 개념을 오로지 비극에만 적용시켰고, 희극에 관해서는 별
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체로 고대 그리스의 희극은 비극과는 달리 귀족이나 영웅
이 아니라 평민 또는 천민들이 등장해야 하고, 따라서 관객들은 극중 인물에 대해 우월감을
느낌과 동시에, '경멸과 조소'의 느낌을 통해 각자의 실수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지혜
를 얻게 된다는 것이 희극 이론의 골자였다.
이러한 고대의 희극 이론은 현대엔 잘 들어맞지 않는다. 희극에도 얼마든지 귀족이 등장할
수 있고, 관객들의 감정 역시 단순한 경멸과 조소가 아니라 작가의 예리한 풍자나 냉소적 인
간관에 대한 지성적 공감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18세기의 극작가 호레이스 월폴
(Horace Walpole)은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고, 느끼는 자에겐 비극이다"라는 유명한 말
을 남겼다. 현대의 희극에서는 주로 사회적인 질서와 가치 체계, 그리고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시험해 보며, 종종 이성적인 가치 체계에서 벗어난 괴팍한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일탈적 무질서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현대의 희극에 있어서는 더욱 더 질투와 선망의 관극 심리가 극적 긴장감의 유발수
단이 될 수 밖에 없다. 관객은 극작가의 냉철한 지성과 교묘한 말솜씨에 대해서 질투를 느끼
기도 하고, 기존의 윤리를 조소하며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게 일탈 행위를 되풀이하는 극중 인
물에 대해 부러움을 느끼는 것이다(채플린의 코메디 영화가 좋은 예다).
또한 결말 부분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을 일단 희극으로 상정한다면, 더욱 그래서 앞서
언급한 '신데렐라 스토리' 같은 경우에는 작가나 주인공의 지성에 대한 질투가 아니라, 단
순히 여주인공의 미모나 결혼을 통한 급격한 신분 상승에 대해 질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본 희극 영화는 버나드 쇼의 희곡인 <피그말리온(Pigmalion)>을 뮤지
컬 영화로 만든 <마이 훼어 레이디(My fair Lady)>였는데, 나는 거기 나오는 오드리 헵번의
청초하면서도 요염한 미모에 부러움을 느꼈고, 그러한 미녀를 차지한 귀족 신분의 대학교
수 렉스 해리슨에 대해서 질투심을 느꼈다.
그러므로 연민과 공포가 비극에만 적용되는 것과는 달리, 질투와 선망은 비극이든 희극이든
어느 것에나 두루 적용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남는 문제는, 연민과 공포가 주는 카타르시스만큼의 대리 배설 효과를 '질투
와 선망'이 감당해 낼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를 의학적인 의
미로 사용하여, 정신에 축적된 감정의 불순물들을 설사시킨다는 뜻으로 썼다. 나는 그것을
결국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대리 배설로 보았는데, 그렇다면 과연 '질투와 선망' 역시 그러
한 작용을 해낼 수 있는 것일까.
강자가 약자에게 느끼는 연민은 확실히 새디즘에 가깝고, 약자가 강자에게 느끼는 공포는 확
실히 매저키즘에 가깝다. 그러나 질투와 선망은 아무래도 둘 다 약자 쪽에만 속하는 감정이
어서, 굳이 새도매저키즘의 개념을 적용시킨다면 매저키즘 쪽에 더 가깝다고 할 것이다. 그
러니까 현대의 관객들은 연극이나 영화 등을 통해 남녀를 불문하고 새디즘보다는 매저키즘
의 쾌감을 무의식중에 맛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영화의 경우에는 그러한 가설의 입증이 더욱 가능한데, 캄캄한 영화간 안에 갇혀있는
관객들은 마치 동굴 속에 갇혀진 처지와도 같아서(또는 모태의 자궁속으로 되돌아간 처지와
도 같아서), 완전히 수동적으로 되어 일방적으로 지나가는 스크린의 화면을 무작정 쫓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연극의 경우에도 극장 내부가 어두운 것은 마찬가지만, 요즘은 '마
당극'이나 '거리극'같은 것도 종종 시도되어 캄캄한 극장 내부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고 있
다. 또 더 나아가 고대 그리스의 연극처럼 환한 대낮에 노천극장에서 공연한다거나, 극장 안
에서 공연한다 하더라도 실내의 불을 켜고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특히 브레히트는 그의
소외 효과(疏外效果) 이론에서 관객들의 감정이 무대 위의 공연행위 속으로 이입되거나 함
입(含入)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므로, 브레히트가 창시한 서사극의 양식에서는 관
객들이 더욱더 새디스트의 입장에 선다고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일단 영화 예술 하나만 가지고 볼 때, 현대의 관객들은 질투와 선망의 감정을 통
해 억압되어진 매저키스틱한 욕구들을 카타르시스 시키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
러므로 영화가 현대의 대중 예술 가운데 가장 큰 관객을 확보하고 있는 장르라는 점을 고려
한다면, 현대인들은 누구나 잠재적으로 매저키스트가 되고 싶어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첨
단 과학 문명의 발전과 인구의 급증과 함께 찾아온 바쁘고 복잡다기한 현대 사회는, 그 안
에 살고 있는 인간들로 하여금 능동적인 행동 양식보다는 수동적인 행동 양식을 취하도록 하
여, 책임감도 의무감도 필요없는 <안락한 피보호(被保護)>의 상태, 즉 매저키스트로서의 상
태를 갈구하게 만들어 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질투와 선망의 심리를 꼭 매저키즘의 카타르시스 효과에 연결시키지 않는다 하더라
도, '질투와 선망'이 대중 예술 전반에 걸쳐 관객 또는 독자의 감상 욕구를 형성하는 기본
동기라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고대 영웅 소설에까지도 충분히 적용 가
능한 얘기이고, <춘향전>이나 <구운몽> 역시 그렇다. 소설이 비극적 결말로 끝나든 해피엔딩
으로 끝나든, 독자들은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출중한 미모나 높은 신분 등에 질투와 부
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흥부전>의 경우라면 흥부가 어쩌다 제비 다리 한 번 고
쳐주고 크게 횡재를 한 것에 대한 질투와 부러움이 된다.
또한 현대 영화뿐만 아니라 현대 소설까지도 그런데, (요즘 유행하는 미국 작가 시드니 셸던
의 소설류가 바로 좋은 예라 하겠다.) 셸던의 소설은 하나같이 여자 주인공이 빼어난 미모
를 밑천으로 크게 성공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예술은 우선 대중 예술과 순수 예술의 경계가 없어질 것이고, 특히 영화
와 연극 그리고 소설의 경우에는 상호간의 교섭이 더욱 활발해져서, 과거의 예술이 주무기
로 삼고 있던 <연민과 공포를 통한 비극적 장엄미>의 표현 기능이 <질투와 선망을 통한 일상
적 스트레스로부터의 도피 기능> 쪽으로 바뀌어 질 것이 틀림없다.
(마광수 저,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철학과 현실사)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