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자 요한이 제자 두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께서 정말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던 ‘오실 분’이신지 아니면 또 다른 분을 더 기다려야 하는지 여쭙게 합니다. 요한은 왜 이런 질문을 하였을까요? 예수님을 두고 이미 자신은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고백할 정도로 예수님께서 크신 분이심을 인정했는데(루카 3,16 참조), 이런 의문을 가진 까닭은 무엇일까요?
요한이 기대하는 ‘오실 분’은 구약의 다윗의 왕국을 새로 세워 주시고, 열매 맺지 못할 나무를 넘어뜨리시고, 손에 키를 들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심판자로서 주님이셨습니다(루카 3,9.17 참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힘없는 스승이셨으며, 변변찮은 제자들을 거느리시고 소외되고 병든 사람들이나 돌보실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요한은 예수님께서 정말 오시기로 한 분이신지 의심스러울 따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라는 말씀으로 요한의 질문을 대신합니다. 곧 예수님의 심판은 분노와 징벌이 아니며 피조물이 불완전성에서 완전성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살아나는 구원을 말합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난 사건이지요.
주님의 이 사랑을 오히려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지요.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던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 같은 기득권자들입니다. 탐욕스럽고 냉정하고 베풀 줄 모르는 사람들은 성령으로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이 오히려 부담스럽습니다. 마치 성령으로 충만한 스테파노가 순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자 증오에 찬 사람들이 견딜 수 없어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는 것과 같습니다(사도 7,57 참조). 사실 심판은 그분의 사랑 앞에서 스스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눈먼 이들의 눈이 되어 주고 다리저는 이들의 다리가 되어 주는 사랑의 삶 속에 이미 있습니다. 사랑의 불꽃이 내 안에 타오르면 이미 그분과 하나의 불꽃이 되어 그분의 생명을 누리는 구원받은 존재가 됩니다. 우리가 불꽃처럼 우리 자신을 태우며 사랑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