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안도현

2000. 1. 11. 오전 1:48:17

글자

제비꽃 편지

 

제비꽃이 하도 예쁘게 피었기에

화분에 담아 한번 키워보려고 했지요

뿌리가 아프지 않게 조심조심 삽으로 떠다가

물도 듬뿍 주고 창틀에 놓았지요

그 가는 허리로 버티기 힘들었을까요

세상이 무거워서요

한 시간이 못되어 시드는 것이었지요

나는 금세 실망하고 말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그럴 것도 없었어요

시들 때는 시들 줄 알아야 꽃인 것이지요

그래서

좋다

시들어라, 하고 그대로 두었지요

 

 

 

 

 

 

열심히 산다는 것

 

산서에서 오수까지 어른 군내버스비는

400원입니다

 

운전사가 모르겠지, 하고

백원짜리 동전 세 개하고

십원짜리 동전 일곱 개만 회수권함에다 차르륵

슬쩍, 넣은 쭈그렁 할머니가 있습니다

 

그걸 알고 귀때기 새파랗게 젊은 운전사가

있는 욕 없는 욕 다 모아

할머니를 향해 쏟아붓기 시작합니다

무슨 큰일 난 것 같습니다

30원 때문에

 

미리 타고 있는 손님들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운전사의 훈계 준엄합니다 그러면,

전에는 370원이었다고

할머니의 응수도 만만찮습니다

그건 육이오 때 요금이야 할망구야, 하면

육이오 때 나기나 했냐, 소리 치고

오수에 도착할 때까지

훈계하면, 응수하고

훈계하면, 응수하고

 

됐습니다

오수까지 다 왔으니

운전사도, 할머니도, 나도, 다 왔으니

모두 열심히 살았으니!

 

 

 

 

나와 잠자리의 갈등1

 

다른 곳은 다 놔두고

굳이 수숫대 끝에

그 아슬아슬한 곳에 내려앉는 이유가 뭐냐?

내가 이렇게 따지듯이 물으면

 

잠자리가 나에게 되묻는다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

 

 

 

 

花巖寺, 내 사랑

 

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아예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 가는 불명산 능선 한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열려주지는 않으렵니다

 

 

안도현 시인의 눈은 섬세하면서도 예리하다. 연탄 한 장에서도 뜨겁게

몸을 태우며 살아야 하는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 강물에 내리는 어린

눈발을 바라보다 사라지는 것들이 안타까워 몸 뒤척이는 강물의 소리를

듣는다. 안도현 시인은 삶에서 우러난 시를 쓰면서도 일상에 매몰되어

있지 않고 삶 속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것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간파해내는 눈을 갖고 있다

-도종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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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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