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진『 엄마 냄새 』어른들을 위한 동화

2003. 9. 24. 오후 10:46:32

글자

갑자기 누가 고함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위험해요, 위험해! 곧 기차가 와요!"

소리 임자는 자전거를 타고 있는 소년이었습니다. 소년

의 고함소릴 들은 청년 하나가 우뚝, 건널목 앞에 멈추어

섭니다. 고장이 났는지 들려야 할 신호소리가 들려오질 않

습니다.

"그랬군요. 그래서 차단기가 내려오는 걸 몰랐군요."

소년의 엄마인지 뒤에 서 있던 여자 하나가 고개를 끄덕

이며 청년을 봅니다. 여자의 시선은 지금 청년이 쥐고 있

는 하얀 지팡이에 머물고 있습니다. 검은 안경을 낀 채 우

두커니 서 있는 청년은 땅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기운

이 없습니다.

"고맙다. 참 친절한 아이구나."

이윽고 사태를 파악한 청년이 아이를 향해 고맙다는 인

사를 합니다.

"목소릴 들으니 초등학생 같네."

"예, 4학년이에요."

"착한 아이구나. 나도 너만했을 땐 앞을 볼 수 있었는

데......."

더듬거리며 소년의 손을 잡는 청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립니다.

"저만했을 땐 앞을 봤다고요?"

"그래."

눈을 깜박거리며 소년이 다시 청년을 봅니다.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알았다는 듯 소년의 고개가 끄덕이고 있습

니다.

"그럼 기차를 본 적도 있겠네요?"

"물론이지. 기차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직도 생생히 기억

하고 있어."

"기차말고는요? 기차말고 또 기억나는 게 있나요?"

금세 아이다운 호기심이 발동한 소년이 연거푸 질문을

던집니다.

"글쎄, 기억나는 건 많지. 보고 싶은 것도 많고, 찾아가

고 싶은 곳도 많아. 시력을 잃기 전엔 나도 꽤나 호기심이

많았으니까. 시력을 잃게 되면 넌 뭐가 가장 보고 싶을 거

라고 생각하니?"

청년의 목소리에 가벼운 물기가 묻어 있습니다. 기차는

아직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청년이 하는 이야기에 귀기울

이듯 소년의 엄마가 한 걸음, 앞쪽으로 다가옵니다.

"하늘이요. 푸른 하늘이 보고 싶을 것 같아요."

"하늘?"

"예, 형은요? 형은 어땠어요?"

"난 말이야, 그러니까 난......."

청년의 목소리에 묻은 물기가 주위를 적셔놓습니다.공

해에 상처 입은 가을 하늘이 찌푸린 얼굴로 세상을 내려다

보고, 뭔가 결심한 바를 밝히기라도 하듯 청년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갑니다.

"엄마였어."

"예?"

소년의 엄마가 고개를 들어 청년을 봅니다. 저만치 기차

가 모퉁이를 돌아오는지 소리 입자들이 분주하게 움직

이고 있습니다.

"엄마였어. 가장 보고 싶었던 건 엄마 얼굴이었어."

"엄마 얼굴이요?"

"그래, 엄마 얼굴."

자전거를 잡고 있던 소년의 엄마가 갑자기 주르르, 눈물

을 흘립니다. 그러나 청년은 가벼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계

속합니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땐 잠을 청하곤 해."

"잠을 청해요?"

"응, 꿈을 꾸면 엄말 볼 수 있으니까. 엄마가 보고 싶을

땐 수면제를 먹고 잠을 청하곤 했어. 꿈속에선 앞을 볼 수

있으니까."

몰랐던 사실을 알았다는 듯 소년이 다시 고개를 끄덕입

니다. 주근깨 같은 호기심이 소년의 얼굴 위로 톡톡, 박히

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꿈에서 엄마를 만나는 거군요?"

"그렇지. 꿈속에선 나도 세상을 다 볼 수 있거든."

정말 눈앞에 뭔가 보이기라도 하듯 청년이 아득히 하늘

을 올려다봅니다.

"꿈에서 깨면 아무것도 안 보이나요?"

"아무것도 안 보여. 그래서 나 같은 사람한텐 꿈에서 깬

다는 게 절망이야."

"절망이요?"

청년의 말을 반문하며 소년이 물끄러미 청년을 쳐다봅니

다. 소년은 아직 절망이란 말을 사용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 절망. 그렇지만 이젠 괜찮아. 생각을 바꿨기 때문

이야. 희망이니 절망이니 하는 것들도 다 생각하는 방식에

서 비롯되는 거니까. 지금 우리가 이렇게 손잡고 있는 것

처럼 희망과 절망도 사실은 손잡고 있을 때가 많거든. 그

것들도 원래 친구 사이니까. 커서 절망을 만나더라도 넌

결코 멀지 않은 곳에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자신을 도와준 아이가 고마워 청년은 다시 한 번 소년의

손을 움켜쥡니다.청년의 검은 안경 속으로 이제 기차가

오고 있습니다.

ㅡ 기차가 온다. 기차가 온다.

땅 속에서 손잡고 있던 나무의 뿌리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소리는 물론 가슴을 땅에 붙이고 귀 대어본

사람들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입니다.

꽃이 힘겹게 물길어 올리는 소리, 땅 속을 뛰어가는 지

하루 소리, 떨어진 낙엽이 대지와 만나는 소리....... 그것

들도 모두 바닥에 엎드려본 사람들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

입니다.

청년의 머리카락을 흩날려놓으며 기차가 휭, 바람을 가

르며 지나갑니다. 그제야 기차 지나가는 기미를 알아차린

고장난 건널목이 땡땡땡, 소리 높여 신호를 보냅니다. 그

러나 건널목만 나무랄 일은 아닙니다. 살아갈수록 그리워

지는 어머니 얼굴처럼, 지나가고 난 뒤에야 알아차리는 것

들이 우리 삶엔 너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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