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바바...T.T[감동]

2000. 6. 20. 오후 1:37:52

글자

오늘은 이 필자 그동안의 이것저것 흥미위주의 글을

잠시 멈추고 진정한 신앙심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회사 점심식사시간...어서 먹어야

겠다는 일념으로(저녁을 굶고있어서 무지고프다) 테이블에

신문지를 깔았다....하늘의 뜻이였을까...그 신문은 J일보

였고, 그곳에 연재되던 글에서 진정한 신앙심을 발견했다.

지루하다 생각말고 역사속에서 억울함으로 남은 우리의

순교자들에 대해 생각해보자.(훈화시간에 써먹어보자..)

만약 어느날 김대통령이 갑자기 천주교인들을 박해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감행하셔서, 잡혀갔다....

그앞에서도 굴하지않고 신앙을 고백할 사람들이 몇이나 있을까..

 

기해 박해는 1801년(순조년)에 일어났던 신유박해에 이어서

 

38년만에 다시 일어났던 제2차 천주교 박해 사건으로 그 규모는

 

박해사상 가장 크고 잔인했다.

 

기해박해는 1839년 사학토치법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표면상으로는

 

무부무군의 멸륜지교인(???)천주교를 몰아내기 위함 이였으나

 

실은 시파인 안동 김씨의 세력을 빼앗으려는 벽파의 풍양조씨가

 

일으킨 정권다툼이었던 것이다.

 

안동 김씨는 천주교를 싫어하는 벽파와는 달리 관용적이어서

 

천주교에 관대 했지만 마침내 정권이 천주교에 대해서 적대시하고

 

있던 우의 이지연으로 넘어가자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

 

된것이다.

 

조정에서느 ’오가작통법’(본인이 알기로는 지금의 ’통’’반’식으로

 

집들을 다섯씩 묶어서 서로를 감시하는 법인것같다..맞나?...=,.=)

 

이란 악랄한 방법으로 천주교인들을 색출해내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특히 천주학에 대해 더욱 엄격하여 만약 임의로 그통내에서 천주교

 

신자를 숨겨준것이 들통이나면 국문을 하고 함께 목을 벤다는 엄명이

 

내려 있었던 것이다.

 

형조판서의 3월2일자를 보면 포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천주교인은

 

43명인데 그중 15명이 배교하여 석방되었고, 또 5명이 배교하여

 

풀려 났으나, 남명혁,박희순등 9명은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사형

 

당하였는데 이로부터 시작된것이 피의 박해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장성집은 불란서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걸 마을사람들이 모두

 

알고있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감히 장성집을 고발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마을사람들이 대부분 인척지간이였으며, 그가 베푼 인덕에

 

감회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장성집은 스스로 유진길,정하상,조신철등 조선 교회재건 운동의

 

중요 인물이며 선교사들의 측근 요인이 체포되었고 많은 신자들이 고문과

 

죽음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지켰다는 말을 듣고 뜨거운 가슴을 억누를

 

수가 없어 스스로 순교할 의도로 자수를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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