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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천주교회 시복시성 추진 심포지엄 ‘황사영의 신앙와 영성’이 지난 1일 서울 중곡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열렸다. ⓒ한수진 기자 |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황사영(알렉시오)의 시복 추진과 그가 피신 도중 작성한 <백서>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심포지엄이 1일 서울 중곡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주최로 열렸다.
김희중 대주교(광주대교구장)는 이날 심포지엄이 “황사영과 <백서>에 얽혀있는 인식의 차이와 고민을 이해하는 작업”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황사영은 2013년 2월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선정한 133위 순교자 시복 대상자 중 한 명이다. 그동안 황사영은 박해를 피하는 동안 작성한 <백서>의 내용이 윤리적이지 못했다는 비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신유박해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 중 하나였던 황사영의 시복 추진이 수차례 보류되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당시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보고서 형태의 <백서>는 박해의 실상, 순교자들의 현황과 함께 황사영이 제안하는 ‘조선교회 재건과 성직자 영입 방안’을 다루고 있다. 그중 문제가 되는 내용은 후자로, 소위 ‘삼조흉언(三條凶言)’이라고 불린다. 교황이 청나라 황제를 압박해 조선에 칙령을 내려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해줄 것, 중국과 조선의 국경지역에 무안사를 설치해 조선을 감독하면서 조선의 왕을 청 황제의 사위로 삼아 조선을 청나라의 부마국으로 만들 것, 서양군함 수백 척에 병사 수만 명과 무기를 싣고 조선해안에 다가와 선교사 한 명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무력시위를 할 것, 이 세 가지가 황사영이 제시한 방안이었다.
황사영의 행위, 목적은 선하나 상황은 선하지 않아
유경촌 신부(서울대교구 통합사목연구소장)는 “황사영에게 백서가 없었다면 그는 평범한 순교자였을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황사영에 대한 평가가 “역적이나 민족반역자인 동시에 순교자로 상반되게 갈린 것은 바로 그가 작성한 백서의 내용 때문”이라고 말했다.
백서의 내용을 윤리적 기준으로 평가한 유 신부는 “백서에 나타난 행위의 목적은 윤리적으로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반면, 행위의 상황은 ‘신앙인’으로서의 행위가 ‘조선인’으로서의 당위와 상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황사영이 <백서>에서 제안한 방안은 조선 사람 입장에서는 치욕적인 내용이지만, 청나라 사람이나 서양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므로 윤리적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며, 유 신부는 “이런 경우, 행위의 상황과 행위자의 목적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 신부는 황사영 스스로 자신의 방안이 조선의 국법을 어긴 것임을 알면서도 북경의 주교에 그러한 제안을 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그가 조선 사람이면서 동시에 조선 천주교회의 지도적 인사였기 때문이었다고 분석했다. 주변의 신자와 성직자까지 관에 끌려가 목숨을 잃고, 자신도 쫓기는 신세가 된 상황에서 황사영이 가졌던 교회 지도자로서의 소명 의식과 박해받는 교회에 대한 위기의식이 그를 절박하게 만들었다는 거다. 유 신부는 “(황사영은) 자신이 끝까지 붙잡히지 않고 남은 이유가 조선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울 방도를 찾으라는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로 생각할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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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사영의 신앙과 영성’ 심포지엄 참가자들이 발표를 듣고 있다. ⓒ한수진 기자 |
그러나 유 신부는 이런 황사영의 입장과 상황이 “객관적으로 그의 행위에 대한 ‘정상참작’의 효과는 줄 수 있지만, 결정적으로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거스른 그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사면’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특히 선교사 수용을 조건으로 무력을 동원해 조선을 협박하자는 제안은 “무고한 죽음을 피하고 애덕을 실천해야 할 자연법적 요구와 복음의 명령에 상충되는 일이므로 윤리적으로 선하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또한 해당 방안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면서 “어떠한 이유로든지 전쟁은 합리화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다만 유 신부는 황사영의 행위를 “인간 존엄성과 공동선을 거스른 당시 조선 정부에 대한 불가피한 저항”으로 본다면, 그가 택한 방법이 “도덕적 정당성을 얻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 경우 당시 시대적 상황을 “인간의 기본권이 유린되고 국가의 공동선이 와해되어 폭군적 압제가 명백히 지속되는 사회”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유 신부는 “당시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지만, 왕조체제를 거부하고 어떤 수단을 통해서라도 신앙의 자유를 얻겠다고 주장한 사람은 황사영뿐”이었다고 설명했다.
<백서> 논란, 당시의 시각으로 판단해야
박광용 교수(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도 “오늘날 합리적으로 보이는 판단과 당시 보편성에 입각한 판단이 서로 어긋날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국가와 사회에 대한 황사영의 인식과 당시 정치 상황을 분석했다.
황사영이 살던 조선시대는 민족국가적 시민이 아닌 성리학적(유교적) 왕조국가의 백성을 지향하던 시대였다. 황사영은 자신이 태어난 조선의 지식인인 동시에 청-조선-일본의 일통국가를 지향했던 동아시아 지식인이기도 했다. 이런 인식을 배경으로 황사영은 “당시 상황을 ‘난세’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박 교수는 말했다. 덧붙여 박 교수는 황사영의 제안이 “(당시가) 혁명의 시대이자 반정의 시기라는 상황 판단을 바탕에 두고 있으며, 황사영의 판단 자체에는 당시 입장에서 역사적으로 결코 적지 않은 무게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황사영의 순교와 시성 규범’을 발표한 박동균 신부(서울대교구 반포4동)는 황사영의 순교에서 “윤리적 확실성을 확인하는 것은 시복 절차에서 핵심 중의 핵심 사항”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박 신부는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황사영을 시복 대상자로 선정한 것은 “(앞서 지적한) 부정적 인식이 극복 가능하며, 그 순교 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 교회의 노력을 선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밖에 이날 심포지엄에는 최현식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김수태 교수(충남대학교 국사학과), 차기진 박사(청주교구 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 여진천 신부(원주교구 배론 성지) 등이 발표자와 논평자로 참여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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