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도 될 것을 엄청나게 갖고 사는구나...

2010. 3. 26. 오후 12:21:52

글자
이사할 때마다 아무래도 필요치 않은 것들을 정리하게 됩니다.

나는 연말이나 또 음력 설 며칠 전부터도 버리기 시작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내겐 필요 없고 그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들은 나누지만

너무 낡았거나 남들에게도 별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혹은 남들에게 필요할 수도 있지만 내 삶의 흔적이 너무 진하게 배어 있어

남에게 주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이사할 적마다 가지고 다니기도 뭣한 것들도 있습니다.

내게는 책이 그랬습니다.

포장이사지만 책을 다 가지고 갔다가는 풀지도 못할 것 같아

보지 않을 책들을 정리하곤 했습니다.

70년대부터 모으기 시작한 책들, 몇 번의 이사 끝에 많이 버렸지만

그래도 70년대 초반부터 줄곧 나를 따라다니던 책들이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읽겠거니 했는데 돌아보니 최근 7~8년 간 단 한 번도 그 책들을

꺼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책들 중에서 내 삶의 흔적이 너무 진하게 배어 있는 책들,

내 삶을 뒤흔들어놓았던 책들을 하나하나 싸서 폐지로 내어놓았습니다.

20kg 감자 박스로 10개의 분량을 버리고 나니 책꽂이가 훤합니다.

고물상에 가져가 얼마라도 받을까 하다가 그러면 너무 비참할 것 같아

폐지를 수집하시는 분이 가져갈 수 있도록 밖에 내어놓았습니다.

책값을 대략 계산해 봅니다.

감자 박스 하나 당 대략 30여권 들어가니 10박스면 300권은 족히 됩니다.

구입 당시 가격으로만 쳐도 100만원은 넘을 것 같습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지만 몇 년간 보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별로 볼 확률이 없는 책들을

장식품처럼 가지고 살았던 내가 부끄러워집니다.

아내가, 책 욕심을 맘껏 부리던 사람이 남들에게 줄 책만을 골라내놓은 뒤

상자에 포장까지 해서 버리는 걸 보고 놀랍니다.

"이제 공부 안 하게?"

"머리 속에 다 들어 있다."

"그래도 나중에 애들이라도 보게 두지."

"글쎄, 나중에 아이들도 보지 못할 책들이야. 희귀한 책은 될지 몰라도…."

70년대는 사회과학 서적들이 배고팠던 시절이었습니다.

무크지가 나왔다 사라지는 일도 허다했고, 사회 구성체 논쟁이 불붙었던 때라

아무래도 사회과학 서적에 대한 애정이 많았습니다.

전공이었던 경영, 경제학 관련 서적이나 신학 관련 서적들과 견주어 보아도

사회과학 서적이 적지 않습니다.

크게 세 부류의 책 중에서 경영학과 사회과학 서적 쪽을 집중적으로 정리했습니다.

헌책방에나 갖다 줄까 하다가 그 생각도 접었습니다.

내가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주어 모으면서 헌책방에 책을 내다파는 사람들을

경멸하면서 쾌재를 부르면서 사들였기 때문입니다.

화장(?)을 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쓰레기를 소각하는 것도 불법이니

다시 재생되어 또 다른 책으로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어놓았습니다.

내 평생의 절반 이상을 살아오면서 나를 만든 책들, 그들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나니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면서도 왜 그것을 그렇게 애지중지 가지고 다녔을까 싶습니다.

책이란 읽고 마음 속에 넣어두면 되는 것이니, 곱씹어 읽어보아야 할 책들이 아닌 바에는

장식용으로 둘 필요가 없었을 것인데 나를 포장하고 장식했던 만큼 그들을 장식용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만 그런가 보니 아내도 버리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아내나 나나 몸매 관리(?)를 잘 한 덕분에 옷 한번 사면 두고두고 입습니다.

그러다 보니 옷장에 언제 유행이 다시 오려나 기다리며 몇 년씩 옷걸이에서

내려지지 않았던 옷도 있고, 아니면 서랍 깊은 곳에 있다

'아, 저 옷도 있었지?'생각나게 하는 옷도 있습니다.

아이들이야 쑥쑥 크니 작은 옷가지들 중 기념품으로 둘 것 두어 개 남겨두고 나머지는

잘 챙깁니다. 우리 아이들보다 덩치가 작은 아이들에게 줄 옷들입니다.

진작 꺼내어 줄 것을 하는 후회도 듭니다.

없어도 될 것을 엄청나게 갖고 삽니다.

누군가는 내게 없어도 될 그것이 너무도 갖고 싶은 것이고, 얼마나 노력해야 얻을지

가늠이 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는데 그저 내 삶의 공간 어딘가에 처박아 놓고

'나도 저거 있어' 하는 정도의 위안을 받는 것은 아닌지, 다른 사람이 갖고 있으니까

나도 갖고 있어야지 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책꽂이에는 살아남은(?) 책들이 비스듬히 누워 있습니다.

그만큼 채워질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겠지요.

그동안 빽빽하게 빈 공간 없이 바짝 서서 쉬지도 못한 책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책꽂이에 여유가 생기니 내 마음에도 여유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내 삶, 어디 책과 옷만 그렇겠습니까?

없어도 될 것 엄청 많이 가지고 살아가는 내 삶...

지혜롭게 비우고 버리고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야 나도 살고 이웃도 살겠지요.


- 2008년 1월 10일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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