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교구가 그 효시이다. 1969년 11월 6일 부산 '사랑의 집'에서 실시된 한국 최초의 여성 꾸르 실료는 남성들이 지도했다는 점이 이채롭다. 지도신부는 김경우 신부, 회장은 박우순 형제가 맡 아서 44명의 수료자를 탄생시켰다. 이어서 1970년 2월 5일에 제2차 여성 꾸르실료도 역시 남성 임원들에 의하여 진행되었는데, 남성에 의해 여성 꾸르실료가 시행된다는 것은 처음부터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또 어차피 그것은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물론 남성이 여성 꾸르실 료를 지도한다는 것은 불합리한 점이 많았지만 과도기적인 모습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점도 감안되어야 한다. 그래서 서울대교구에서는 외국에서 여성 꾸르실료를 정식으로 도입하기로 결 정하였다. 서울대교구에서는 필리핀으로 공한을 보내 제1차 여성 꾸르실료를 지도할 임원단을 초청하였다. 그 결과 1971년 8월 12일에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서울의 제1차 여성 꾸르실료가 영어로 열렸다. 지도신부는 Aengus Cantwell 등 3명, 임원진에는 Massay G. Yulo 회장을 비롯해서 12명이 수고했고 한국측에서는 서강대학교 도서관에 근무하던 Buckwell 양과 광주 까리따스 수녀회 표 스콜라스티카 수녀가 봉사했다. 이 꾸르실료를 통해 7개 교구에서 모 집된 여성 꾸르실리스따 21명(수도자 8명 포함)이 탄생되었는데, 구역별로 보면 서울 12명, 대 구 2명, 광주 2명, 인천 2명, 전주 1명, 원주 1명, 제주 1명이었다. 여성 꾸르실료를 도입한 서 울대교구에서는 2차 여성 꾸르실료를 한국팀 단독으로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유수철 신부의 지도 아래 여성 1차 동기회 회장 김경숙 자매가 회장이 되어 그 준비에 열을 올렸다.
회장 김경숙 자매는 이렇게 회고한다.
"많은 분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고했습니다. 특히 지금 생각하면 약간 우습기도 하지만 어 쩔 수가 없었습니다. 한 자매가 담화를 두 가지씩이나 맡아서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땐 속수 무책이었습니다. 우선 추수할 사람이 없었어요. 동기생들이 많은 수고를 하였지만 정작 담화 봉사를 하실 분들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물론 남성들로부터 꾸르실료에 대한 경험을 이어받다 보니 수많은 고난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처음 일에는 고난이 많은 법 입니다. 잊지 못할 일은 유수철 신부님입니다. 신부님의 격려는 우리 봉사팀을 한층 더 열화와 같은 정열로 불태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 무렵의 임원진은 3개월에 걸쳐서 매주 지도자 학교를 개설하여 창조적인 신앙 생활에 대한 뜻을 한데 모았고 모일 때마다 성체 조배와 성서 봉독 및 묵상을 통해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다 진 후에 팀 회합을 열었다. 왜냐하면 여성 2차 꾸르실료의 성공 여부가 장차 이 땅의 여성 꾸 르실료의 존폐를 판가름하는 좌표가 되기 때문이었다.
1972년 1월 20일 여성 제2차 꾸르실료가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실시되었고, 이때 40명의 여성 꾸르실리스따가 새롭게 탄생하였다. 당시 동기회 총무이자 임원이었던 권흥자 자매 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72년 1월 20일 오후 5시였습니다. 커다란 트렁크에 저마다 이불 보따리를 들고 당당하게 현 관을 박차고 들어서는 자매님들의 모습은 거칠어 보였습니다. 당시의 임원들은 대학을 이제 갓 나온 애숭이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나이가 지긋한 40∼50대 부인들은 어느 정도 위압감을 느낄 수밖에요. 모든 것은 하느님께 부탁하는 방법밖에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인간 인지라 저토록 거칠어 보이는 부인네들의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해야 활짝 열 수가 있을까를 고 심했습니다. 그래서 첫날 밤 임원회 때 우리들은 최대한의 봉사와 희생만이 여성 2차 꾸르실료 를 성공시킬 수 있다는 데에 뜻을 모으고 담화 시간에도 자리에 앉지 말고 담화자를 위해서 묵 주 기도를 바치기도 했었죠. 모두가 어려움에도 약간은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헌데 가장 어려운 일은 역시 신심 담화 시간이었어요. 거칠기만 하던 자매들이 이 시간을 어떻게 보 낼지 그게 몹시도 궁금했습니다. 일순간 어느 한 구석에서 괴성이라도 들릴 것만 같았습니다.
분위기가 으스스했습니다. 흡사 줄을 타는 광대가 어느 순간에 줄이 뚝 끊어져서 낭떠러지로 곤 두박질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어요. 임원들은 한결같이 모두가 뒤쪽에 서서 성모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바쳤습니다. 아무쪼록 담화자의 지난날의 아픔과 고통과 시련과 슬픔이 아름다 운 고백을 통해 수강자??전달될 수 있길 바라는 심정뿐이었습니다. 헌데 드디어 기도에 응답 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내내 오만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던 참가자들의 눈빛에 서서히 변화 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참가자들의 고개가 한두 명씩 떨구어지면서 여기저기서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 의 진실 앞에서 우리는 하나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감격의 순간이기 도 했습니다. 하느님의 오묘하신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시간 이후부터 참가자들의 태도는 완연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눈에 드러날 정도였으니까요.
참가 여성들 중 대부분은 틈만 있으면 얼굴 화장을 만지는데 우선 그런 사람이 없어지기 시작했 습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아름다움보다 자신의 내적 아름다움에 대해 더 많은 신경을 쓰는 것이 었습니다. 분위기는 차분하고 흡사 무덤 속처럼 고요해졌습니다. 문제의 인물로 손꼽히던 자매 들도 순한 한 마리의 양이 되어 갔습니다. 기적은 그렇게 우리들 앞에서 일어났던 겁니다."
여성 2차 꾸르실료는 이렇게 성공적으로 실시되었다. 서울대교구는 연이어서 권흥자 자매를 회 장으로 한 여성 3차, 4차, 5차, 6차 꾸르실료를 1973년 8월까지 실시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서 울대교구에서는 타교구에 여성 꾸르실료를 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권흥자 자매는 1973년 8월 2일 대전교구에서 실시된 여성 1차 꾸르실료 회장으로 봉사하더니 연이어 광주, 疎? 전주, 청주, 인천, 원주, 제주교구 등 모두 8개 교구에서 차례로 실시된 첫 여성 꾸르실료의 회장으로 봉사했다. 권흥자 자매의 회고담이다.
"1974년 8월 1일에 실시된 춘천교구 여성 1차 꾸르실료 땝니다. 실시 하루 전날입니다. 참가자 중에 사회적으로도 명성이 높고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분들이 많이 계신다는 이야기를 지도신 부님과 임원들에게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분들이 꾸르실료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염 려스럽다는 이야기도 들었죠. 우리는 지도신부님과 함께 뜨겁게 봉사하기로 결의를 다졌습니다. 날씨가 무덥지만 음료수를 마시는 것을 극기하고, 불필요한 말과 휴식을 최대한으로 줄이며 수 면 시간조차 줄여서 성체 조배를 하되 양팔 기도를 바치는 데 몸과 마음을 다하도록 뜻을 모았 죠. 모두들 열심히 묵주 기도를 바쳤습니다. 지도신부님의 수단 위로 흘린 땀이 흥건했고 임원 들도 무던히 땀을 많이 흘렸습니다. 기도는 역시 모든 것을가능하게 했죠. 나는 '당신이야말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사 63, 16)를 입에 달고 다녔습니다.
꾸르실료는 감격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참으로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에 날뛰던 자매들의 모습이 지금도 내 눈엔 선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달고 돌 아갑니다' 혹은 '나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등등 아름다운 편지를 봉사 임원들에게 전하고 떠 난 자매들도 많았습니다. 게다가 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일도 있었습니다. 스승과 옛 제자가 꾸르실료를 통해 만났습니다. 그 스승과 제자는 10년이 넘게 서로를 애타게 찾다가 꾸르실료에 와서 극적으로 해후한 겁니다. 그분들이 서로 껴안고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광경을 보고 울음 을 터트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1976년 1월 8일에 실시된 청주교구 여성 1차 꾸르실료 때는 대단히 많은 고통을 경험해 야 했습니다. 하기야 지방 교구마다 초창기다 보니 나름대로 여러가지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죠. 그러나 청주교구는 다른 지방의 어려움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날씨는 영하 19도를 오르내 렸습니다. 헌데 꾸르실료가 실시될 장소는 아직 건물이 완성되지도 않은 곳이었습니다. 한마디 로 말해서 침실에서 허공의 별을 볼 수가 있었으니까 짐작하실 겁니다. 참가자들의 침실은 지하 1층이었고 임원진들은 구공탄 난로가 있는 1층 20평 남짓한 방 하나였습니다. 침구라고 해봐야 야전 침대에 담요가 저마다 두 장씩입니다. 도무지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임 원들은 매일 밤 난로가에 모여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으니 자연스럽게 매일 마냐니따를 한 셈이 었죠. 화장실은 꽁꽁 얼어 붙어서 오물을 모조리 손으로 꺼낸 다음 청소를 해야만 했고 식사도 건물에서 하는 게 아니라 밖에서 시켜다가 먹어야 했습니다.
영하 19도 추위 속에서 맨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성체 조배를 하고 묵주 기도를 바친다고 상상해 보세요. 게다가 복도 쪽에서는 계속해서 황소바람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아마 체감 온도 는 영하 40도쯤은 됐을 겁니다. 정말로 두 번 다시 기억하기 싫은 추억이기도 합니다. 그런 악 조건 속에서도 꾸르실료는 여전히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모두가 부둥켜 안고 엉엉 소리내어 통곡을 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 당시 함께 봉사했던 임 원들은 '고생스러웠던 것만큼 지금도 그날 그때의 꾸르실료가 보람있었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어려움을 겪으며 정착된 여성 꾸르실료는 각 교구별로 수많은 꾸르실리스따를 배출하였 고, 특히 1991년 수원교구에서는 한국 교회 꾸르실료 사상 처음으로 여성 주간이 선출되었다. 수원교구 꾸르실료 여성 제1차를 수료한 김은덕 자매가 수원교구에 꾸르실료가 도입된 지 21년 만에 제5대 주간으로 취임함으로써 최초의 여성 주간이 되어 교회 직책은 남성이 맡아 봉사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보수적인 통념을 깬 것이다. 당시 수원교구 송현석 지도신부는 "신앙의 기본 정신은 남녀 구분 없이 어떤 위치에서든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따라 자기 역할을 충실히 이 행하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여성 주간이 탄생한 것이 당연한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교회 안에서 여성 신자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가부장적인 전통이 남아 있어 교회의 직책 면에서는 여성이 소수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 현실 안에서도 여성 꾸르실리 스따들은 교회 각층에서 놀라운 열성으로 사도직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1997년 현재 교구별 여성 꾸르실료 실시 현황을 보면 서울 185차, 대구 121차, 광주 62차, 부산 196차,수원 64차, 인천 87차, 대전 75차, 전주 59차, 마산 135차, 청주 33차, 춘천 34차, 원 주 33차, 안동 18차, 제주 31차를 기록하고 있다.
도입 순서에 따른 각 교구 여성 꾸르실료 실시 상황은 아래 〈표 3〉과 같다.
회장 김경숙 자매는 이렇게 회고한다.
"많은 분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고했습니다. 특히 지금 생각하면 약간 우습기도 하지만 어 쩔 수가 없었습니다. 한 자매가 담화를 두 가지씩이나 맡아서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땐 속수 무책이었습니다. 우선 추수할 사람이 없었어요. 동기생들이 많은 수고를 하였지만 정작 담화 봉사를 하실 분들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물론 남성들로부터 꾸르실료에 대한 경험을 이어받다 보니 수많은 고난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처음 일에는 고난이 많은 법 입니다. 잊지 못할 일은 유수철 신부님입니다. 신부님의 격려는 우리 봉사팀을 한층 더 열화와 같은 정열로 불태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 무렵의 임원진은 3개월에 걸쳐서 매주 지도자 학교를 개설하여 창조적인 신앙 생활에 대한 뜻을 한데 모았고 모일 때마다 성체 조배와 성서 봉독 및 묵상을 통해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다 진 후에 팀 회합을 열었다. 왜냐하면 여성 2차 꾸르실료의 성공 여부가 장차 이 땅의 여성 꾸 르실료의 존폐를 판가름하는 좌표가 되기 때문이었다.
1972년 1월 20일 여성 제2차 꾸르실료가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실시되었고, 이때 40명의 여성 꾸르실리스따가 새롭게 탄생하였다. 당시 동기회 총무이자 임원이었던 권흥자 자매 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72년 1월 20일 오후 5시였습니다. 커다란 트렁크에 저마다 이불 보따리를 들고 당당하게 현 관을 박차고 들어서는 자매님들의 모습은 거칠어 보였습니다. 당시의 임원들은 대학을 이제 갓 나온 애숭이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나이가 지긋한 40∼50대 부인들은 어느 정도 위압감을 느낄 수밖에요. 모든 것은 하느님께 부탁하는 방법밖에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인간 인지라 저토록 거칠어 보이는 부인네들의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해야 활짝 열 수가 있을까를 고 심했습니다. 그래서 첫날 밤 임원회 때 우리들은 최대한의 봉사와 희생만이 여성 2차 꾸르실료 를 성공시킬 수 있다는 데에 뜻을 모으고 담화 시간에도 자리에 앉지 말고 담화자를 위해서 묵 주 기도를 바치기도 했었죠. 모두가 어려움에도 약간은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헌데 가장 어려운 일은 역시 신심 담화 시간이었어요. 거칠기만 하던 자매들이 이 시간을 어떻게 보 낼지 그게 몹시도 궁금했습니다. 일순간 어느 한 구석에서 괴성이라도 들릴 것만 같았습니다.
분위기가 으스스했습니다. 흡사 줄을 타는 광대가 어느 순간에 줄이 뚝 끊어져서 낭떠러지로 곤 두박질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어요. 임원들은 한결같이 모두가 뒤쪽에 서서 성모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바쳤습니다. 아무쪼록 담화자의 지난날의 아픔과 고통과 시련과 슬픔이 아름다 운 고백을 통해 수강자??전달될 수 있길 바라는 심정뿐이었습니다. 헌데 드디어 기도에 응답 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내내 오만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던 참가자들의 눈빛에 서서히 변화 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참가자들의 고개가 한두 명씩 떨구어지면서 여기저기서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 의 진실 앞에서 우리는 하나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감격의 순간이기 도 했습니다. 하느님의 오묘하신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시간 이후부터 참가자들의 태도는 완연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눈에 드러날 정도였으니까요.
참가 여성들 중 대부분은 틈만 있으면 얼굴 화장을 만지는데 우선 그런 사람이 없어지기 시작했 습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아름다움보다 자신의 내적 아름다움에 대해 더 많은 신경을 쓰는 것이 었습니다. 분위기는 차분하고 흡사 무덤 속처럼 고요해졌습니다. 문제의 인물로 손꼽히던 자매 들도 순한 한 마리의 양이 되어 갔습니다. 기적은 그렇게 우리들 앞에서 일어났던 겁니다."
여성 2차 꾸르실료는 이렇게 성공적으로 실시되었다. 서울대교구는 연이어서 권흥자 자매를 회 장으로 한 여성 3차, 4차, 5차, 6차 꾸르실료를 1973년 8월까지 실시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서 울대교구에서는 타교구에 여성 꾸르실료를 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권흥자 자매는 1973년 8월 2일 대전교구에서 실시된 여성 1차 꾸르실료 회장으로 봉사하더니 연이어 광주, 疎? 전주, 청주, 인천, 원주, 제주교구 등 모두 8개 교구에서 차례로 실시된 첫 여성 꾸르실료의 회장으로 봉사했다. 권흥자 자매의 회고담이다.
"1974년 8월 1일에 실시된 춘천교구 여성 1차 꾸르실료 땝니다. 실시 하루 전날입니다. 참가자 중에 사회적으로도 명성이 높고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분들이 많이 계신다는 이야기를 지도신 부님과 임원들에게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분들이 꾸르실료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염 려스럽다는 이야기도 들었죠. 우리는 지도신부님과 함께 뜨겁게 봉사하기로 결의를 다졌습니다. 날씨가 무덥지만 음료수를 마시는 것을 극기하고, 불필요한 말과 휴식을 최대한으로 줄이며 수 면 시간조차 줄여서 성체 조배를 하되 양팔 기도를 바치는 데 몸과 마음을 다하도록 뜻을 모았 죠. 모두들 열심히 묵주 기도를 바쳤습니다. 지도신부님의 수단 위로 흘린 땀이 흥건했고 임원 들도 무던히 땀을 많이 흘렸습니다. 기도는 역시 모든 것을가능하게 했죠. 나는 '당신이야말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사 63, 16)를 입에 달고 다녔습니다.
꾸르실료는 감격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참으로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에 날뛰던 자매들의 모습이 지금도 내 눈엔 선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달고 돌 아갑니다' 혹은 '나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등등 아름다운 편지를 봉사 임원들에게 전하고 떠 난 자매들도 많았습니다. 게다가 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일도 있었습니다. 스승과 옛 제자가 꾸르실료를 통해 만났습니다. 그 스승과 제자는 10년이 넘게 서로를 애타게 찾다가 꾸르실료에 와서 극적으로 해후한 겁니다. 그분들이 서로 껴안고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광경을 보고 울음 을 터트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1976년 1월 8일에 실시된 청주교구 여성 1차 꾸르실료 때는 대단히 많은 고통을 경험해 야 했습니다. 하기야 지방 교구마다 초창기다 보니 나름대로 여러가지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죠. 그러나 청주교구는 다른 지방의 어려움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날씨는 영하 19도를 오르내 렸습니다. 헌데 꾸르실료가 실시될 장소는 아직 건물이 완성되지도 않은 곳이었습니다. 한마디 로 말해서 침실에서 허공의 별을 볼 수가 있었으니까 짐작하실 겁니다. 참가자들의 침실은 지하 1층이었고 임원진들은 구공탄 난로가 있는 1층 20평 남짓한 방 하나였습니다. 침구라고 해봐야 야전 침대에 담요가 저마다 두 장씩입니다. 도무지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임 원들은 매일 밤 난로가에 모여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으니 자연스럽게 매일 마냐니따를 한 셈이 었죠. 화장실은 꽁꽁 얼어 붙어서 오물을 모조리 손으로 꺼낸 다음 청소를 해야만 했고 식사도 건물에서 하는 게 아니라 밖에서 시켜다가 먹어야 했습니다.
영하 19도 추위 속에서 맨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성체 조배를 하고 묵주 기도를 바친다고 상상해 보세요. 게다가 복도 쪽에서는 계속해서 황소바람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아마 체감 온도 는 영하 40도쯤은 됐을 겁니다. 정말로 두 번 다시 기억하기 싫은 추억이기도 합니다. 그런 악 조건 속에서도 꾸르실료는 여전히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모두가 부둥켜 안고 엉엉 소리내어 통곡을 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 당시 함께 봉사했던 임 원들은 '고생스러웠던 것만큼 지금도 그날 그때의 꾸르실료가 보람있었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어려움을 겪으며 정착된 여성 꾸르실료는 각 교구별로 수많은 꾸르실리스따를 배출하였 고, 특히 1991년 수원교구에서는 한국 교회 꾸르실료 사상 처음으로 여성 주간이 선출되었다. 수원교구 꾸르실료 여성 제1차를 수료한 김은덕 자매가 수원교구에 꾸르실료가 도입된 지 21년 만에 제5대 주간으로 취임함으로써 최초의 여성 주간이 되어 교회 직책은 남성이 맡아 봉사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보수적인 통념을 깬 것이다. 당시 수원교구 송현석 지도신부는 "신앙의 기본 정신은 남녀 구분 없이 어떤 위치에서든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따라 자기 역할을 충실히 이 행하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여성 주간이 탄생한 것이 당연한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교회 안에서 여성 신자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가부장적인 전통이 남아 있어 교회의 직책 면에서는 여성이 소수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 현실 안에서도 여성 꾸르실리 스따들은 교회 각층에서 놀라운 열성으로 사도직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1997년 현재 교구별 여성 꾸르실료 실시 현황을 보면 서울 185차, 대구 121차, 광주 62차, 부산 196차,수원 64차, 인천 87차, 대전 75차, 전주 59차, 마산 135차, 청주 33차, 춘천 34차, 원 주 33차, 안동 18차, 제주 31차를 기록하고 있다.
도입 순서에 따른 각 교구 여성 꾸르실료 실시 상황은 아래 〈표 3〉과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