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전국으로 확산된 꾸르실료 운동
우리말 꾸르실료가 대성공을 거두자 초창기 주역 꾸르실리스따들은 자신감을 갖고 제4차 꾸르실 료를 준비했다. 또한 지방 교구에도 꾸르실료 운동을 전파시키기 위해 나섰다.
맨처음 이해남 형제를 비롯해 서울 임원진은 1968년 1월 25일 인천교구에 씨를 뿌린 것을 시발 점으로 해서, 같은 해 6월6일에는 부산교구에, 1969년 1월에는 전주교구에 씨를 뿌렸다. 이어서 서울대교구 꾸르실료 임원진은 광주,대구,청주,원주,수원,대전교구에 차례로 꾸르실료의 씨앗 을 뿌렸고, 이씨를 받은 부산교구는 마산교구에, 대구대교구는 안동교구에, 광주대교구는 제주 교구에, 원주교구는 춘천교구에 꾸르실료를 전파했다. 그것은 "너희와 함께 계시도록"(요한 14, 15) 하겠다는 약속이었다.
1971년 8월 19일 마지막으로 안동교구에 꾸르실료가 전파됨으로써 꾸르실료 운동은 전국 14개 교구에 완전히 확산되었다.
윤공희 주교는 주교로서 수원교구에서 실시된 첫번째 꾸르실료에 지도신부로 봉사했고, 황인국 신부는 부산,광주,대구대교구의 꾸르실료를 지도했으며 이해남 형제는 인천,부산,전주,광주,대 구대교구에서 실시된 바 있는 꾸르실료에 회장으로 봉사했다.
부산교구 제1차 꾸르실료에 임원으로 봉사했던 유석진 박사는 당시에 있었던 일을 이렇게 회 상하고 있다.
"당시 부산교구장이었던 최재선 주교님은 꾸르실료를 받으면서 상당히 심한 저항감을 느끼고 있 었던것 같았습니다. 가끔은 인상을 쓰시면서 괴로운 듯한 표정을 자주 보였습니다. 게다가 다 같이하는 노래도 함께하시지 않았구요. 우리 임원진은 교구장님의 태도에 매우 신경을 곤두세우 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언제쯤에나 주교님의 마음이 열릴까 기다리고 있었죠. 헌데 마냐니따 때였습니다. 내가 플루트를 불면서 방으로 뛰어들어가니까 놀란 듯도 싶었지만 그때부터 약간 감동의 빛이 엿보이기 시작하더니 그 후부터 주교님은 노래도 따라 부르시기 시작하더군요. 그 런데 드디어 '뛰어라' 시간입니다. 주교님께서 불쑥 단상에 오르시더니 '우리 부산교구에도 꾸 르실료를 도입해야겠다. 그런데 플루트가 있어야지!' 하시는 겁니다. 장내는 거침없이 박수와 웃음이 번져갔습니다. 나는 그 순간 대단히 기뻤습니다. 나의 플루트 연주가 주교님의 마음을 움직였구나 싶었던 겁니다. 정작 이렇게 부산교구장님이 변하니까 그 열성을 모아 서울대교구보 다 거의 2년이나 앞질러서 여성 꾸르실료를 과감하게 실시하였고 또 여운으로 오늘날?沮?이 른 것입니다. 정말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각 교구에 꾸르실료 운동이 도입된 순서로 본 첫 꾸르실료 실시 상황은 <표1>과 같다.
꾸르실료 운동의 효과는 이루 형언할 수 없었으며, 꾸르실리스따들은 제2의 개종을 했다고 술회 하고 있다. 진정 꾸르실료는 전투적인 주님의 사도를 만들고도 남았다. "나는 너에게 더욱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불어나게 하리라"(창세 22, 17)던 말씀이 꾸르실 운동에서 이루어졌다.
대구대교구 임학권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꾸르실리스따들은 신부님과 함께 교회의 일을 도맡아 하며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복음화 운동 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다. 특별히 그들의 복음화 운동은 직장에서 매우 놀라운 모습으 로 이루어지고 있다. 어떤 교구의 꾸르실리스따들은 젊은 대학생을 무려 40명이나 집단 영세시 켰고 그들을 한 그룹으로 만들어서 사후 관리를 철저히 함으로써 놀라운 기쁨을 온 누리에 전하 고 있다. 또 어떤 병원에서는 2명의 꾸르실리스따 의사가 17명의 동료 의사를 영세시켜 병원 분 위기를 완전히 가톨릭적으로 바꾸어 놓기도 했다. 내가 아는 한 동료 꾸르실리스따가 꾸르실료 를 경험한 후 1년 사이에 20명을 영세 입교시켰다면 누가 그 사실을 믿을 수 있겠는가! 다른 게 기적이 아니다. 바로 꾸르실료 운동이 현대의 기적이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셨으 며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게 함으로써'(마르 16, 20) 오늘날의 꾸르실료를 만드신 것이다. 누가 감히 꾸르실료를 사람이 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② 오해받은 꾸르실료 운동
사실 꾸르실료 운동이 도입되어 온 교회로 퍼져나가자 여기저기서 많은 오해와 저항감을 불러일 으켰다. 우선 꾸르실료 운동은 스페인에서 시작되었기에 서양적인 사고 방식에 젖어 있다는 것 은 어쩔 수가 없다. 또한 서양적인 요소들이 우리 한국인의 정서에 꼭 맞는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것은 서양의 오랜 대화적인 문화와 우리의 명령적인 문화와의 차이에서도 여실히 드 러나고 있다. '꾸르실료'라는 용어 자체만 해도 우리에게는 생소한 느낌을 주고 있다. 1973년 9월에 발행된 "사목(司牧)"지 제29호 에 "꾸르실료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으로 김정진 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꾸르실료에 참여한 꾸르실리스따들이 한 마디 얻어 들은 말만 가지고 많은 교우들이 제나름대 로 해석을 하여 꾸르실료가 여러 가지 수난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성직자, 평신도들 사이 에 오가는 꾸르실료에 대한 비평도 가지 각색이다. 그중에는 '이단이다' 또는 '현 질서를 파괴 하고 있다'는 극단적인 배척도 받고 있다. 초대 교회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받아들이자는 꾸르실 료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 또 '한국 사람의 감정과는 잘 맞 지 않는다'고 말하는 분도 있다. 그렇게도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동양에도 종교가 많은데 왜 서양에서 자라난 그리스도교를 믿느냐 하는 말과 비슷한 말이 아닌가 싶다. 또 '초본당, 초교구 적'이라는 말도 듣지만, 사실 꾸르실료에서는 가톨릭 액션의 기본은 본당이며 교구 사목 계획 에 앞장서서 협력하라고 가르치고있다. '저희들끼리만 엘리트처럼 행동하는 집단 같다'는 이유 로 경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절대로 그런 게 아니라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한편 꾸르실료는 '감정적으로 사람을 현혹시킨다'느니 '프로테스탄트화한 것이다' 또는 '박장로 파다' 또는 '특권 계층의 모임이다' 등등 많은 오해와 비난이 쏟아진 일도 있었다. 같은 사목지 29호에 문창준 회장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원래 꾸르실료 운동은 선전해 가며 전개하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 내외를 막론하고 많 은 궁금증을 조성해 놓은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혹자는 이 운동을 일종의 '비밀 결 사'라고 중상 아닌 중상을 해서 성직자들로부터 많은 의혹을 샀다. 어떤 사람은 꾸르실료를 세 뇌 공작을 하는 광신행위라고 혹평하는 바람에 꾸르실리스따의 가정과 사회에 적잖게 물의를 일 으킨 적도 있었다. 그 외에도 '엘리트 의식에 도취한 교만한 무리들'이라든지, '교회 내에서 별 개의 세력을 형성하는 분파들'이라는 지탄도 받았다. 심지어 정치 단체로까지 비약시켜 정계가 소란할 때마다 외부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꾸르실료 도입 초기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오해를 받았던 수난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꾸르실료는 받아들였다. 그들이 비난을 하는 한 꾸르실료에 대한 관심이 있 다는 증거였기 때문이었다.
특기할 만한 일은 이런 오해와 비난은 성직자들 중에서 많이 나왔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것은 성직자로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불안함을 나타내는 행위일 수도 있고 꾸르실리스따들의 잘못된 언동에서 반사적으로 이루어진 비난일 수도 있다.
이유는 있다. 당시만 해도 사제들은 권위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신자' 를 '평신도'라고 불렀고 신자들도 역시 그런 주종 관계에 익숙해져 있었다. 심지어 오랜 관습처 럼 젊은 신부가 나이 많은 평신도에게 '해라'식의 대화를 해도 묵인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렇 다고 해서 지금에는 그런 경향이 말끔하게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그런 모 습이 살아 있고 또 '평신도'라는 어휘에 대해서도 신자들 자신조차도 씻겨지지 않은 고정 관념 의 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한편 일부 꾸르실리스따들 자신이 충분히 오해를 받을 만한 언행을 한 것도 사실이다. 본당신 부에게 "꾸르실료를 받아야 비로소 신부다운 신부가 될 수 있다"는 식의 오만한 태도를 보이기 도 했고, 꾸르실료를 경험한 신부와 경험하지 못한 다른 신부를 비교 평가하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에스파니아어를 사용해서 본당 교우들에게 괴리감을 심어 주기도 했 다. 또한 본당 활동에서도 끼리끼리만 어울린다는 비평은 꾸르실리스따들 끼리만 몰려다닌다는 뜻이었고, 또 꾸르실리스따들은 우리 교회의 특권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처럼 행세한 경우도 많 았다.
③ 인정받은 꾸르실료 운동
일부 교우들은 물론이거니와 성직자들로부터 받는 많은 오해와 비난은 꾸르실리스따들에게 많은 시련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꾸르실료 운동은 꾸준히 계속될 수밖에 없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저 항 요소가 차차 정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놀랍게도 하느님의 보살핌은 반대론자의 가슴에 훈훈 한 미풍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대관절 꾸르실료란 무엇일까? 꾸르실료를 경험한 사람마다 왜 그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꾸르실리스따란 사람들은 왜 물불을 가리지 않고 교회 일에 혼신의 힘 을 다하는가? 이런저런 의문들은 한 정점으로 모아지기 시작했다. 좋다! 그렇다면 나도 꾸르실 료를 한번 받아 봐야지! 무조건 비난할 것이 아니라 비난하더라도 한번 경험을 해봐야겠다." 이 런 생각들이 알게 모르게 성직자는 물론 신자들 사이에도 번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꾸르실료 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차차 많아지면서 꾸르실료 운동에 대한 오해는 말끔하게 풀리기 시 작했다.
서울 제27차 꾸르실료를 경험한 장대익 신부의 이야기를 듣는다.
"내가 꾸르실료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것은 1965년의 일입니다. 브라질 한국 이민 지도신부로 있을 땝니다. 뽄타코로사 교구 신학교 교장 신부님 말씀이 '당신이 이곳에 와서 사목을 하기 위 해서는 아무래도 꾸르실리스따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매우 좋을 것입니다. 그들의 도움을 받는 다는 것은 사목적인 이유도 충분합니다. 내 말을 부디 명심하십시오. 꾸르실리스따에게 도움을 청하십시오.' 이렇게 당부 말씀이 계셔서 대체 꾸르실료가 뭔가 하는 의문만 가진 채 적당한 기회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헌데 귀찮을 정도로 꾸르실리스따들의 성화가 뒤따랐습니다. '신부님! 역시 꾸르실료가 최곱니 다. 하루빨리 꾸르실료를 받으셔야만 합니다.'
꾸르실료를 경험하고 온 몇몇 교우들은 한결같이 벌겋게 상기된 모습으로 이렇게 이상한 압력(?) 을 가해 왔습니다. 결국 좋은 노래도 한두 번이라고, 계속되는 이런 강요 때문에 그만 꾸르실료 에 대해 언짢은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낯선 외국에 와서 아직 정착되지 못한 데에도 약 간의 이유는 있겠지만 꾸르실리스따들의 강압적인 언행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가령 나로서는 그 사람을 생각했을 때 별로 믿을 만한 신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꾸르실료 를 경험하고 돌아오더니 갑자기 교회 일에 열성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런 행동이 나 에게 신뢰심을 불러일으켜 주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못 믿을 처신이었습니다. 어쩐지 거짓에 찬 행동으로 비쳤어요. 기회주의적이구요. 아마 자기들이 아니면 교회 일이 잘 안 될 것 으로 여긴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습니다. 또 꾸르실리스따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성직자를 비난 하거나 평가하는 모습이며, 신자들도 참다운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꾸르실료를 모두 경험해야 한다는 식의 발언은 내 기분을 몹시 자극했습니다.
확실히 불쾌한 느낌이 울렁거렸습니다. '열대 지방에 살다 보니까 별스런 일도 다 보는군!' 했 습니다.'맞아! 꾸르실료를 받은 자들은 교회 안에서 자기 명예를 지키려고 처신하는 사람들이 나 또는 신자들앞에서 어떤 행세를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집단이야.' 이렇게 나름대로 낙인 을 찍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꾸르실료에 들어가겠다고 하면 '무슨 소리야! 도깨비 쇼하는 델 왜 가느냐?' 고 반대했습니다. 그래도 정히 들어가겠다고 하면 '나는 추천할 수 없으니 꾸르실료 신부들한테 가서 추천을 받으시오. 나는 꾸르실료를 안 받았으니 당신을 추천할 권한이 없는 사람이오'라고 말하면서 그 자릴 피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내가 지나치게 보수적인 사고 방식의 소유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교회 안에 새로운 조직이 생겨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쪽입니다.
또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마지막 날 폐회식을 마치고 그 많은 사람들이 마당으로 쏟아져 나와서 '데 꼴로레스' 를 합창합니다. 그 광경을 보 고 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들이 3박 4일 동안 기도하고 피정을 했다더니 저렇게 이상 하게 돌아가는구나.
나도 사제 생활 25년 동안에 여러 차례 피정 신공도 바쳐 봤고 기도회다 연수회다 하는 곳엘 가보았지만 저런 일은 없었어. 점잖치 못하게 아코디언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야단을 피우다니. 게다가 남녀가 섞여서 정신없이 춤추고 노래하면서 돌아가다니 저 저 저 사람 들이 마침내 정신이 어떻게 된 게 아냐! 이거 안 되겠구먼.' 이렇게 되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 니 내가 아무리 건전한 생각을 보유하고 있다 해도 꾸르실료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내릴 수가 없었지요. 단지 그 광경만 보고서 꾸르실료는 일종의 광신적인 집단이 분명하다고 했지요. 그 것은 순전히 선입견이었습니다. 모르긴 해도 지금도 꾸르실료를 잘 모르는 사람은 틀림없이 내 가 전에 생각했던 것과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상당수가 있을 겁니다.
또 한 가지 못마땅한 게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나 외국에서도 꾸르실리스따들끼리는 서로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을 예사롭게 보아 왔습니다. 그런데 '주교 형제' 또는 '신부 형 제', '수녀 자매'라고 부르는 것은 도무지 마음에 와닿질 않았어요. 그것은 정말로 이해하기 힘 든 부분이었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신부나 수 녀에게 형제 자매란 말을 써도 괜찮겠지만 주교에게 '주교 형제'라고 호칭한다는 것이 못내 아 쉽습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한국, 한국인의 오랜 전통적인 관습에 의한 정서에 바탕을 두고 하는 말이니 오해없길 바랄 뿐입니다. 좌우간, 내가 알고 있는 상식에서도 받아들 여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직자에게 형제 자매란 어휘를 사용하는 그 자체가 싫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더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세속 사람들끼리야 형제 자매란 말을 허물없이 사용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직자들에게 형제 자매를 붙인다는 것은 공산주의적 인 사고방식에 따라 '아버지 동무, 어머니 동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었고 또는 비밀 결사 단체들 사이에서 암호처럼 통하는 말로도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꾸르실료는 극 단적인 단체라고 나름대로 단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우리 본당에서 무슨 회합이란 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알고 보 니까 꾸르실료를 받은 지도신부가 오시지 않았겠어요. 그 회합이란 게 사실은 울뜨레야였습니다 만 그 당시 나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 친구들은 나에게 참석해 달라고 말했으나 나는 꾸 르실료 신부가 아니라서 참석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했는데도 굳이 강권하기에 정말로 사목적인 이유, 그러니까 나는 신부고 그들은 신자들이니까 그들을 지켜줘야 한다는 사 목적인 이유로 그들의 회합에 참석한 일이 있었습니다. 헌데 울뜨레야 회합 광경이 과히 싫진 않았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꾸르실리스따들의 언행과는 너무 많이 달랐습니다. 활동 보고 하는 모습도 나쁘진 않았습니다. 평소엔 못 믿을 사람으로 여기고 있던 사람이 병원에 문안을 다녀왔다, 혹은 영세를 시키기 위해 몇 차례 사람을 찾아갔었다고 하면서 지난 일주일 간의 신 앙 생활을 낱낱이 보고하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내마음이 돌아선 것은 아니었 죠. 그런데 회합이 끝나??무섭게 꾸르실리스따들이 '신부님께서도 한 번쯤 꾸르실료를 다녀오 시지요?' 하는 겁니다. 예의 또 그 말이구나 싶어서 얼른 '녜 녜, 가지요' 라고 대답하고 그 자 릴 피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했던 거죠. 그러고 나서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 습니다. 헌데 어느 목요일 날이었습니다. 꾸르실리스따들이 구름처럼 몰려왔어요. 한편에서는 꽃다발을 챙겨들고서 짐을 꾸려준다, 혹은 택시를 부른다는 등등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았 습니다. 사실은 얼결에 당한다는 말이 바로 그때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녜 녜, 가지요'라고 대답했더니 대뜸 내 대답이 사무국에 접수되었고 또 나름대로 스케줄이 잡힌 모양이었습니다. 야단이 났더구만, 어떻게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진 겁니다. 할 수 있습니까, 꾸르실 료 회관 앞까지 끌려간 셈이었습니다. 아 그랬더니 나를 맞아주는 임원 형제의 환한 미소와 접 대가 전혀 가식이 없었습니다. '그래 기왕지사 왔으니까 한번 받아 보지! 대체 이 친구들이 무 슨 소릴 하는지 들어봐야겠어. 3박 4일 동안 폭 쉬었다가 돌아간다고 생각해도 되는거 아냐. 하 다가 싫으면 집에 가면 될꺼구' 이렇게 마음 편하게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로 놀랍게도 마 음이 편해지면서 강의 시간이 기다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시계를 보관하겠다고 해서 순순히 내주 었습니다. 내 소유품을 가져간다는 것이 싫었지만 그러려니 했죠.마침 의정부 주임 최서식 신부 와 한방에 들게 되었고 드디어 꾸르실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또 여기저기서 생전 처음 보는 신 자들과 한데 어울려 있다 보니 신부로서 상당히 몸가짐도 조심하게 되었죠. 이제 꾸르실료를 간 단히 정리해 보면 3박 4일 동안에 내가 받았던 꾸르실료는 참으로 값진 것이었습니다. 지도신 부는 물론이지만 특히 봉사를 맡은 임원의 고생이 마음에 와닿았고 평소 신학에 대해 공부도 안 한 분들이 담화 준비를 위해 많은 고생들을 했더군요. 말하자면 그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위해 일을 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나는 임원들을 보면서 '자선을 베풀 때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을 보시는 네 아 버지께서 갚아 주실것이다'(마태 6, 3∼4)란 말씀이 불쑥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 '나도 언젠가 는 저 사람들처럼 담화를 맡아서 봉사를 해봐야겠다'고 결심도 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나는 사제 생활을 이렇게 해왔었습니다. 미사는 제 시간에 꼬박꼬박 드 리고, 강론이야 별로 준비는 없었어도 못한다는 말을 들은 일이 없고, 예비자 교리도 수녀님에 게 맡겨서 수녀님의 활동 범위를 보장해 주었고, 성사를 청하는 사람들에게 거의 의무적으로 성 사도 열심히 주었고, 혼배나 장례도 교우들이 서운찮게 곧잘 해주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 께도 매우 신경을 써서 만나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교회라는 체제 속에서 아주 그럴 듯한 공 무원(?) 노릇을 지금까지는 충실하게 해왔습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사제 생활이란 일반 신자로부터 적당히 고립되어, 또는 거리를 두고서 홀로 생활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신자들 속에 함께 있으면서 울 때 같이 울고, 웃을 때 함께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제 생활 은 그 형식보다는 그 내용이 우선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과거의 타성에서 나는 벗어나 질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나??3박 4일 동안의 꾸르실료는 은총 그 자체였습니다. 갈등도 많았습니다. 지난 과거에 대한 자신의 후회였습니다. 나는 끝없이 '우리가 무슨 잘한 일이 있 다고 주의 은총을 빌겠습니까'(다니 9, 18)라고 내 자신??말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마침내 결 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벼슬을 좋아하는 신부나 혹은 신자들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신부가 되지 않고 그들 신자들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원하는 사제가 되리라'고 몇 번씩 결심을 했습니다. 누가 뭐 라고 해도 우리에겐 커다란 숙제가 있습니다. 꾸르실료에서 배운 바로 그 방법을 어떻게 하면 지속적으로 이끌어 가느냐 하는 문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마태 22, 14)고 하셨습니다. 우린 그분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뽑힐 수 있느냐'가 문젭니다. 이젠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방법 이외에는 별 수 가 없을 것입니다."
사실 꾸르실료 운동에 대한 인식 부족 현상은 어떻게 생각하면 어쩔 수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에 연연할 필요도 없고 굳이 앞장서서 변명할 필요도 없다. 이 말은 꾸르실료의 특수한 기 능을 자랑하자는 뜻이 아니라 조용히 때를 기다리자는 뜻이기도 하다. 반대론자들의 가슴에서 울려오는 불평 불만의 소리를 겸손하게 듣자는 뜻이다. '듣는다'는 것은 '찬성'이나 '동의'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읽어주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자 재교육을 위해 줄기차게 노력하고 있 는 꾸르실료 운동은 우리 교회에서 일종의 개안 수술적인 계몽 운동의 핵이 되어 한국 교회의 앞날을 열어가야만 한다.
1973년 10월 24일, 서강대학교에서는 제3차 전국 울뜨레야가 열렸는데, 이날 김수환 추기경은 꾸르실료에 대한 오해가 해소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꾸르실료 운동이 시작될 때에 교회 안에 있었던 비판적인 소리나 경계하는 태도, 혹은 경荑?따라 있었던 마찰 등도 지금에 와서는 많이 줄어들었고, 성직자들과 신자들 사이에 꾸르실료 운동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높아 져 있었있습니다. 이 변화는 거의 전적으로 꾸르실리스따 여러분들이 교회 일부의 경계와 비판 에도 불구하고 실망하지 않고 꾸준히 또는 착실히 실천으로써 이 운동의 좋은 면을 증거해 주셨 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이렇게 굳센 믿음의 정신으로 나가신다면 꾸르실료 운동의 앞날이 밝을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앞날 역시 함께 밝아지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격려사를 통해 이 같이 지적한 추기경은 꾸르실리스따와 꾸르실료 운동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은 꾸르실료 운동을 통해서 교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여러분 중 많은 분들은 각기 소속 본당에서 총회장 혹은 사목위원 또는 자치운영회 위원으로 각 본당 발전에 적극 이바 지하고 계심을 저는 잘 알고 있고, 또 어떤 분들은 평신도 사도직 단체에서 활약하심으로써 한 국 교회의 평신도 사도직 운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확실히 꾸르실료 운동은 오늘날 한국 교회, 특히 평신도 사회 안에서 평신도 재교육과 신앙 부흥의 주축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한편 교황대사 도세나 대주교도 같은 자리에서 치사를 통해 꾸르실료 운동에 의한 교회의 발전 을 기대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 아침 여기에 와서 유능하고 헌신적인 수많은 인사들이 이 대회장을 향해 물결처럼 밀려오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이 아름다운 나라의 교회 발전에 밝은 앞날 을 약속해 주는 힘찬 움직임이라고 나는 단정치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꾸르실료 운동을 오해하는 사람은 없다. 설사 있다고 해도 꾸르실료에서는 그 사람을 안아 들일 것이다. 시시비비는 끝났다. 남은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꾸르실리스따들은 주님 의 사업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면 된다.
우리말 꾸르실료가 대성공을 거두자 초창기 주역 꾸르실리스따들은 자신감을 갖고 제4차 꾸르실 료를 준비했다. 또한 지방 교구에도 꾸르실료 운동을 전파시키기 위해 나섰다.
맨처음 이해남 형제를 비롯해 서울 임원진은 1968년 1월 25일 인천교구에 씨를 뿌린 것을 시발 점으로 해서, 같은 해 6월6일에는 부산교구에, 1969년 1월에는 전주교구에 씨를 뿌렸다. 이어서 서울대교구 꾸르실료 임원진은 광주,대구,청주,원주,수원,대전교구에 차례로 꾸르실료의 씨앗 을 뿌렸고, 이씨를 받은 부산교구는 마산교구에, 대구대교구는 안동교구에, 광주대교구는 제주 교구에, 원주교구는 춘천교구에 꾸르실료를 전파했다. 그것은 "너희와 함께 계시도록"(요한 14, 15) 하겠다는 약속이었다.
1971년 8월 19일 마지막으로 안동교구에 꾸르실료가 전파됨으로써 꾸르실료 운동은 전국 14개 교구에 완전히 확산되었다.
윤공희 주교는 주교로서 수원교구에서 실시된 첫번째 꾸르실료에 지도신부로 봉사했고, 황인국 신부는 부산,광주,대구대교구의 꾸르실료를 지도했으며 이해남 형제는 인천,부산,전주,광주,대 구대교구에서 실시된 바 있는 꾸르실료에 회장으로 봉사했다.
부산교구 제1차 꾸르실료에 임원으로 봉사했던 유석진 박사는 당시에 있었던 일을 이렇게 회 상하고 있다.
"당시 부산교구장이었던 최재선 주교님은 꾸르실료를 받으면서 상당히 심한 저항감을 느끼고 있 었던것 같았습니다. 가끔은 인상을 쓰시면서 괴로운 듯한 표정을 자주 보였습니다. 게다가 다 같이하는 노래도 함께하시지 않았구요. 우리 임원진은 교구장님의 태도에 매우 신경을 곤두세우 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언제쯤에나 주교님의 마음이 열릴까 기다리고 있었죠. 헌데 마냐니따 때였습니다. 내가 플루트를 불면서 방으로 뛰어들어가니까 놀란 듯도 싶었지만 그때부터 약간 감동의 빛이 엿보이기 시작하더니 그 후부터 주교님은 노래도 따라 부르시기 시작하더군요. 그 런데 드디어 '뛰어라' 시간입니다. 주교님께서 불쑥 단상에 오르시더니 '우리 부산교구에도 꾸 르실료를 도입해야겠다. 그런데 플루트가 있어야지!' 하시는 겁니다. 장내는 거침없이 박수와 웃음이 번져갔습니다. 나는 그 순간 대단히 기뻤습니다. 나의 플루트 연주가 주교님의 마음을 움직였구나 싶었던 겁니다. 정작 이렇게 부산교구장님이 변하니까 그 열성을 모아 서울대교구보 다 거의 2년이나 앞질러서 여성 꾸르실료를 과감하게 실시하였고 또 여운으로 오늘날?沮?이 른 것입니다. 정말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각 교구에 꾸르실료 운동이 도입된 순서로 본 첫 꾸르실료 실시 상황은 <표1>과 같다.
꾸르실료 운동의 효과는 이루 형언할 수 없었으며, 꾸르실리스따들은 제2의 개종을 했다고 술회 하고 있다. 진정 꾸르실료는 전투적인 주님의 사도를 만들고도 남았다. "나는 너에게 더욱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불어나게 하리라"(창세 22, 17)던 말씀이 꾸르실 운동에서 이루어졌다.
대구대교구 임학권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꾸르실리스따들은 신부님과 함께 교회의 일을 도맡아 하며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복음화 운동 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다. 특별히 그들의 복음화 운동은 직장에서 매우 놀라운 모습으 로 이루어지고 있다. 어떤 교구의 꾸르실리스따들은 젊은 대학생을 무려 40명이나 집단 영세시 켰고 그들을 한 그룹으로 만들어서 사후 관리를 철저히 함으로써 놀라운 기쁨을 온 누리에 전하 고 있다. 또 어떤 병원에서는 2명의 꾸르실리스따 의사가 17명의 동료 의사를 영세시켜 병원 분 위기를 완전히 가톨릭적으로 바꾸어 놓기도 했다. 내가 아는 한 동료 꾸르실리스따가 꾸르실료 를 경험한 후 1년 사이에 20명을 영세 입교시켰다면 누가 그 사실을 믿을 수 있겠는가! 다른 게 기적이 아니다. 바로 꾸르실료 운동이 현대의 기적이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셨으 며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게 함으로써'(마르 16, 20) 오늘날의 꾸르실료를 만드신 것이다. 누가 감히 꾸르실료를 사람이 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② 오해받은 꾸르실료 운동
사실 꾸르실료 운동이 도입되어 온 교회로 퍼져나가자 여기저기서 많은 오해와 저항감을 불러일 으켰다. 우선 꾸르실료 운동은 스페인에서 시작되었기에 서양적인 사고 방식에 젖어 있다는 것 은 어쩔 수가 없다. 또한 서양적인 요소들이 우리 한국인의 정서에 꼭 맞는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것은 서양의 오랜 대화적인 문화와 우리의 명령적인 문화와의 차이에서도 여실히 드 러나고 있다. '꾸르실료'라는 용어 자체만 해도 우리에게는 생소한 느낌을 주고 있다. 1973년 9월에 발행된 "사목(司牧)"지 제29호 에 "꾸르실료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으로 김정진 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꾸르실료에 참여한 꾸르실리스따들이 한 마디 얻어 들은 말만 가지고 많은 교우들이 제나름대 로 해석을 하여 꾸르실료가 여러 가지 수난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성직자, 평신도들 사이 에 오가는 꾸르실료에 대한 비평도 가지 각색이다. 그중에는 '이단이다' 또는 '현 질서를 파괴 하고 있다'는 극단적인 배척도 받고 있다. 초대 교회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받아들이자는 꾸르실 료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 또 '한국 사람의 감정과는 잘 맞 지 않는다'고 말하는 분도 있다. 그렇게도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동양에도 종교가 많은데 왜 서양에서 자라난 그리스도교를 믿느냐 하는 말과 비슷한 말이 아닌가 싶다. 또 '초본당, 초교구 적'이라는 말도 듣지만, 사실 꾸르실료에서는 가톨릭 액션의 기본은 본당이며 교구 사목 계획 에 앞장서서 협력하라고 가르치고있다. '저희들끼리만 엘리트처럼 행동하는 집단 같다'는 이유 로 경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절대로 그런 게 아니라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한편 꾸르실료는 '감정적으로 사람을 현혹시킨다'느니 '프로테스탄트화한 것이다' 또는 '박장로 파다' 또는 '특권 계층의 모임이다' 등등 많은 오해와 비난이 쏟아진 일도 있었다. 같은 사목지 29호에 문창준 회장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원래 꾸르실료 운동은 선전해 가며 전개하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 내외를 막론하고 많 은 궁금증을 조성해 놓은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혹자는 이 운동을 일종의 '비밀 결 사'라고 중상 아닌 중상을 해서 성직자들로부터 많은 의혹을 샀다. 어떤 사람은 꾸르실료를 세 뇌 공작을 하는 광신행위라고 혹평하는 바람에 꾸르실리스따의 가정과 사회에 적잖게 물의를 일 으킨 적도 있었다. 그 외에도 '엘리트 의식에 도취한 교만한 무리들'이라든지, '교회 내에서 별 개의 세력을 형성하는 분파들'이라는 지탄도 받았다. 심지어 정치 단체로까지 비약시켜 정계가 소란할 때마다 외부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꾸르실료 도입 초기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오해를 받았던 수난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꾸르실료는 받아들였다. 그들이 비난을 하는 한 꾸르실료에 대한 관심이 있 다는 증거였기 때문이었다.
특기할 만한 일은 이런 오해와 비난은 성직자들 중에서 많이 나왔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것은 성직자로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불안함을 나타내는 행위일 수도 있고 꾸르실리스따들의 잘못된 언동에서 반사적으로 이루어진 비난일 수도 있다.
이유는 있다. 당시만 해도 사제들은 권위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신자' 를 '평신도'라고 불렀고 신자들도 역시 그런 주종 관계에 익숙해져 있었다. 심지어 오랜 관습처 럼 젊은 신부가 나이 많은 평신도에게 '해라'식의 대화를 해도 묵인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렇 다고 해서 지금에는 그런 경향이 말끔하게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그런 모 습이 살아 있고 또 '평신도'라는 어휘에 대해서도 신자들 자신조차도 씻겨지지 않은 고정 관념 의 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한편 일부 꾸르실리스따들 자신이 충분히 오해를 받을 만한 언행을 한 것도 사실이다. 본당신 부에게 "꾸르실료를 받아야 비로소 신부다운 신부가 될 수 있다"는 식의 오만한 태도를 보이기 도 했고, 꾸르실료를 경험한 신부와 경험하지 못한 다른 신부를 비교 평가하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에스파니아어를 사용해서 본당 교우들에게 괴리감을 심어 주기도 했 다. 또한 본당 활동에서도 끼리끼리만 어울린다는 비평은 꾸르실리스따들 끼리만 몰려다닌다는 뜻이었고, 또 꾸르실리스따들은 우리 교회의 특권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처럼 행세한 경우도 많 았다.
③ 인정받은 꾸르실료 운동
일부 교우들은 물론이거니와 성직자들로부터 받는 많은 오해와 비난은 꾸르실리스따들에게 많은 시련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꾸르실료 운동은 꾸준히 계속될 수밖에 없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저 항 요소가 차차 정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놀랍게도 하느님의 보살핌은 반대론자의 가슴에 훈훈 한 미풍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대관절 꾸르실료란 무엇일까? 꾸르실료를 경험한 사람마다 왜 그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꾸르실리스따란 사람들은 왜 물불을 가리지 않고 교회 일에 혼신의 힘 을 다하는가? 이런저런 의문들은 한 정점으로 모아지기 시작했다. 좋다! 그렇다면 나도 꾸르실 료를 한번 받아 봐야지! 무조건 비난할 것이 아니라 비난하더라도 한번 경험을 해봐야겠다." 이 런 생각들이 알게 모르게 성직자는 물론 신자들 사이에도 번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꾸르실료 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차차 많아지면서 꾸르실료 운동에 대한 오해는 말끔하게 풀리기 시 작했다.
서울 제27차 꾸르실료를 경험한 장대익 신부의 이야기를 듣는다.
"내가 꾸르실료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것은 1965년의 일입니다. 브라질 한국 이민 지도신부로 있을 땝니다. 뽄타코로사 교구 신학교 교장 신부님 말씀이 '당신이 이곳에 와서 사목을 하기 위 해서는 아무래도 꾸르실리스따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매우 좋을 것입니다. 그들의 도움을 받는 다는 것은 사목적인 이유도 충분합니다. 내 말을 부디 명심하십시오. 꾸르실리스따에게 도움을 청하십시오.' 이렇게 당부 말씀이 계셔서 대체 꾸르실료가 뭔가 하는 의문만 가진 채 적당한 기회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헌데 귀찮을 정도로 꾸르실리스따들의 성화가 뒤따랐습니다. '신부님! 역시 꾸르실료가 최곱니 다. 하루빨리 꾸르실료를 받으셔야만 합니다.'
꾸르실료를 경험하고 온 몇몇 교우들은 한결같이 벌겋게 상기된 모습으로 이렇게 이상한 압력(?) 을 가해 왔습니다. 결국 좋은 노래도 한두 번이라고, 계속되는 이런 강요 때문에 그만 꾸르실료 에 대해 언짢은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낯선 외국에 와서 아직 정착되지 못한 데에도 약 간의 이유는 있겠지만 꾸르실리스따들의 강압적인 언행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가령 나로서는 그 사람을 생각했을 때 별로 믿을 만한 신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꾸르실료 를 경험하고 돌아오더니 갑자기 교회 일에 열성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런 행동이 나 에게 신뢰심을 불러일으켜 주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못 믿을 처신이었습니다. 어쩐지 거짓에 찬 행동으로 비쳤어요. 기회주의적이구요. 아마 자기들이 아니면 교회 일이 잘 안 될 것 으로 여긴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습니다. 또 꾸르실리스따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성직자를 비난 하거나 평가하는 모습이며, 신자들도 참다운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꾸르실료를 모두 경험해야 한다는 식의 발언은 내 기분을 몹시 자극했습니다.
확실히 불쾌한 느낌이 울렁거렸습니다. '열대 지방에 살다 보니까 별스런 일도 다 보는군!' 했 습니다.'맞아! 꾸르실료를 받은 자들은 교회 안에서 자기 명예를 지키려고 처신하는 사람들이 나 또는 신자들앞에서 어떤 행세를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집단이야.' 이렇게 나름대로 낙인 을 찍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꾸르실료에 들어가겠다고 하면 '무슨 소리야! 도깨비 쇼하는 델 왜 가느냐?' 고 반대했습니다. 그래도 정히 들어가겠다고 하면 '나는 추천할 수 없으니 꾸르실료 신부들한테 가서 추천을 받으시오. 나는 꾸르실료를 안 받았으니 당신을 추천할 권한이 없는 사람이오'라고 말하면서 그 자릴 피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내가 지나치게 보수적인 사고 방식의 소유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교회 안에 새로운 조직이 생겨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쪽입니다.
또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마지막 날 폐회식을 마치고 그 많은 사람들이 마당으로 쏟아져 나와서 '데 꼴로레스' 를 합창합니다. 그 광경을 보 고 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들이 3박 4일 동안 기도하고 피정을 했다더니 저렇게 이상 하게 돌아가는구나.
나도 사제 생활 25년 동안에 여러 차례 피정 신공도 바쳐 봤고 기도회다 연수회다 하는 곳엘 가보았지만 저런 일은 없었어. 점잖치 못하게 아코디언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야단을 피우다니. 게다가 남녀가 섞여서 정신없이 춤추고 노래하면서 돌아가다니 저 저 저 사람 들이 마침내 정신이 어떻게 된 게 아냐! 이거 안 되겠구먼.' 이렇게 되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 니 내가 아무리 건전한 생각을 보유하고 있다 해도 꾸르실료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내릴 수가 없었지요. 단지 그 광경만 보고서 꾸르실료는 일종의 광신적인 집단이 분명하다고 했지요. 그 것은 순전히 선입견이었습니다. 모르긴 해도 지금도 꾸르실료를 잘 모르는 사람은 틀림없이 내 가 전에 생각했던 것과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상당수가 있을 겁니다.
또 한 가지 못마땅한 게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나 외국에서도 꾸르실리스따들끼리는 서로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을 예사롭게 보아 왔습니다. 그런데 '주교 형제' 또는 '신부 형 제', '수녀 자매'라고 부르는 것은 도무지 마음에 와닿질 않았어요. 그것은 정말로 이해하기 힘 든 부분이었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신부나 수 녀에게 형제 자매란 말을 써도 괜찮겠지만 주교에게 '주교 형제'라고 호칭한다는 것이 못내 아 쉽습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한국, 한국인의 오랜 전통적인 관습에 의한 정서에 바탕을 두고 하는 말이니 오해없길 바랄 뿐입니다. 좌우간, 내가 알고 있는 상식에서도 받아들 여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직자에게 형제 자매란 어휘를 사용하는 그 자체가 싫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더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세속 사람들끼리야 형제 자매란 말을 허물없이 사용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직자들에게 형제 자매를 붙인다는 것은 공산주의적 인 사고방식에 따라 '아버지 동무, 어머니 동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었고 또는 비밀 결사 단체들 사이에서 암호처럼 통하는 말로도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꾸르실료는 극 단적인 단체라고 나름대로 단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우리 본당에서 무슨 회합이란 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알고 보 니까 꾸르실료를 받은 지도신부가 오시지 않았겠어요. 그 회합이란 게 사실은 울뜨레야였습니다 만 그 당시 나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 친구들은 나에게 참석해 달라고 말했으나 나는 꾸 르실료 신부가 아니라서 참석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했는데도 굳이 강권하기에 정말로 사목적인 이유, 그러니까 나는 신부고 그들은 신자들이니까 그들을 지켜줘야 한다는 사 목적인 이유로 그들의 회합에 참석한 일이 있었습니다. 헌데 울뜨레야 회합 광경이 과히 싫진 않았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꾸르실리스따들의 언행과는 너무 많이 달랐습니다. 활동 보고 하는 모습도 나쁘진 않았습니다. 평소엔 못 믿을 사람으로 여기고 있던 사람이 병원에 문안을 다녀왔다, 혹은 영세를 시키기 위해 몇 차례 사람을 찾아갔었다고 하면서 지난 일주일 간의 신 앙 생활을 낱낱이 보고하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내마음이 돌아선 것은 아니었 죠. 그런데 회합이 끝나??무섭게 꾸르실리스따들이 '신부님께서도 한 번쯤 꾸르실료를 다녀오 시지요?' 하는 겁니다. 예의 또 그 말이구나 싶어서 얼른 '녜 녜, 가지요' 라고 대답하고 그 자 릴 피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했던 거죠. 그러고 나서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 습니다. 헌데 어느 목요일 날이었습니다. 꾸르실리스따들이 구름처럼 몰려왔어요. 한편에서는 꽃다발을 챙겨들고서 짐을 꾸려준다, 혹은 택시를 부른다는 등등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았 습니다. 사실은 얼결에 당한다는 말이 바로 그때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녜 녜, 가지요'라고 대답했더니 대뜸 내 대답이 사무국에 접수되었고 또 나름대로 스케줄이 잡힌 모양이었습니다. 야단이 났더구만, 어떻게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진 겁니다. 할 수 있습니까, 꾸르실 료 회관 앞까지 끌려간 셈이었습니다. 아 그랬더니 나를 맞아주는 임원 형제의 환한 미소와 접 대가 전혀 가식이 없었습니다. '그래 기왕지사 왔으니까 한번 받아 보지! 대체 이 친구들이 무 슨 소릴 하는지 들어봐야겠어. 3박 4일 동안 폭 쉬었다가 돌아간다고 생각해도 되는거 아냐. 하 다가 싫으면 집에 가면 될꺼구' 이렇게 마음 편하게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로 놀랍게도 마 음이 편해지면서 강의 시간이 기다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시계를 보관하겠다고 해서 순순히 내주 었습니다. 내 소유품을 가져간다는 것이 싫었지만 그러려니 했죠.마침 의정부 주임 최서식 신부 와 한방에 들게 되었고 드디어 꾸르실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또 여기저기서 생전 처음 보는 신 자들과 한데 어울려 있다 보니 신부로서 상당히 몸가짐도 조심하게 되었죠. 이제 꾸르실료를 간 단히 정리해 보면 3박 4일 동안에 내가 받았던 꾸르실료는 참으로 값진 것이었습니다. 지도신 부는 물론이지만 특히 봉사를 맡은 임원의 고생이 마음에 와닿았고 평소 신학에 대해 공부도 안 한 분들이 담화 준비를 위해 많은 고생들을 했더군요. 말하자면 그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위해 일을 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나는 임원들을 보면서 '자선을 베풀 때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을 보시는 네 아 버지께서 갚아 주실것이다'(마태 6, 3∼4)란 말씀이 불쑥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 '나도 언젠가 는 저 사람들처럼 담화를 맡아서 봉사를 해봐야겠다'고 결심도 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나는 사제 생활을 이렇게 해왔었습니다. 미사는 제 시간에 꼬박꼬박 드 리고, 강론이야 별로 준비는 없었어도 못한다는 말을 들은 일이 없고, 예비자 교리도 수녀님에 게 맡겨서 수녀님의 활동 범위를 보장해 주었고, 성사를 청하는 사람들에게 거의 의무적으로 성 사도 열심히 주었고, 혼배나 장례도 교우들이 서운찮게 곧잘 해주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 께도 매우 신경을 써서 만나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교회라는 체제 속에서 아주 그럴 듯한 공 무원(?) 노릇을 지금까지는 충실하게 해왔습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사제 생활이란 일반 신자로부터 적당히 고립되어, 또는 거리를 두고서 홀로 생활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신자들 속에 함께 있으면서 울 때 같이 울고, 웃을 때 함께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제 생활 은 그 형식보다는 그 내용이 우선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과거의 타성에서 나는 벗어나 질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나??3박 4일 동안의 꾸르실료는 은총 그 자체였습니다. 갈등도 많았습니다. 지난 과거에 대한 자신의 후회였습니다. 나는 끝없이 '우리가 무슨 잘한 일이 있 다고 주의 은총을 빌겠습니까'(다니 9, 18)라고 내 자신??말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마침내 결 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벼슬을 좋아하는 신부나 혹은 신자들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신부가 되지 않고 그들 신자들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원하는 사제가 되리라'고 몇 번씩 결심을 했습니다. 누가 뭐 라고 해도 우리에겐 커다란 숙제가 있습니다. 꾸르실료에서 배운 바로 그 방법을 어떻게 하면 지속적으로 이끌어 가느냐 하는 문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마태 22, 14)고 하셨습니다. 우린 그분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뽑힐 수 있느냐'가 문젭니다. 이젠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방법 이외에는 별 수 가 없을 것입니다."
사실 꾸르실료 운동에 대한 인식 부족 현상은 어떻게 생각하면 어쩔 수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에 연연할 필요도 없고 굳이 앞장서서 변명할 필요도 없다. 이 말은 꾸르실료의 특수한 기 능을 자랑하자는 뜻이 아니라 조용히 때를 기다리자는 뜻이기도 하다. 반대론자들의 가슴에서 울려오는 불평 불만의 소리를 겸손하게 듣자는 뜻이다. '듣는다'는 것은 '찬성'이나 '동의'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읽어주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자 재교육을 위해 줄기차게 노력하고 있 는 꾸르실료 운동은 우리 교회에서 일종의 개안 수술적인 계몽 운동의 핵이 되어 한국 교회의 앞날을 열어가야만 한다.
1973년 10월 24일, 서강대학교에서는 제3차 전국 울뜨레야가 열렸는데, 이날 김수환 추기경은 꾸르실료에 대한 오해가 해소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꾸르실료 운동이 시작될 때에 교회 안에 있었던 비판적인 소리나 경계하는 태도, 혹은 경荑?따라 있었던 마찰 등도 지금에 와서는 많이 줄어들었고, 성직자들과 신자들 사이에 꾸르실료 운동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높아 져 있었있습니다. 이 변화는 거의 전적으로 꾸르실리스따 여러분들이 교회 일부의 경계와 비판 에도 불구하고 실망하지 않고 꾸준히 또는 착실히 실천으로써 이 운동의 좋은 면을 증거해 주셨 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이렇게 굳센 믿음의 정신으로 나가신다면 꾸르실료 운동의 앞날이 밝을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앞날 역시 함께 밝아지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격려사를 통해 이 같이 지적한 추기경은 꾸르실리스따와 꾸르실료 운동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은 꾸르실료 운동을 통해서 교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여러분 중 많은 분들은 각기 소속 본당에서 총회장 혹은 사목위원 또는 자치운영회 위원으로 각 본당 발전에 적극 이바 지하고 계심을 저는 잘 알고 있고, 또 어떤 분들은 평신도 사도직 단체에서 활약하심으로써 한 국 교회의 평신도 사도직 운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확실히 꾸르실료 운동은 오늘날 한국 교회, 특히 평신도 사회 안에서 평신도 재교육과 신앙 부흥의 주축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한편 교황대사 도세나 대주교도 같은 자리에서 치사를 통해 꾸르실료 운동에 의한 교회의 발전 을 기대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 아침 여기에 와서 유능하고 헌신적인 수많은 인사들이 이 대회장을 향해 물결처럼 밀려오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이 아름다운 나라의 교회 발전에 밝은 앞날 을 약속해 주는 힘찬 움직임이라고 나는 단정치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꾸르실료 운동을 오해하는 사람은 없다. 설사 있다고 해도 꾸르실료에서는 그 사람을 안아 들일 것이다. 시시비비는 끝났다. 남은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꾸르실리스따들은 주님 의 사업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