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베드로는 조선말 최초로 영세를 받은 이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처형당합니다.
반면 남강 이승훈 선생은 조선말과 일제하에 활동한 국어학자이자 민족운동가로서, 원산학사가 아니라 오산학교를 세웠습니다. 혹시 원산학사를 세운 이 중에 이승훈이라는 또다른 동명이인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원산학사가 설립된 해는 1883년, 즉 이승훈 베드로가 순교한 뒤이므로 최소한 이승훈 베드로일리는 없습니다.
* 이승훈 베드로
세례명은 베드로. 강원도 평창(平昌) 출생. 자 자술(子述). 호 만천(蔓川). 1780년(정조 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심하다가 천주교인 이벽(李蘗)을 만나 천주교에 심취, 1783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인부친을 따라 청(淸)나라에 가서 베이징[北京]천주교당 북당(北堂)에서 교리 증부를 한뒤, 이듬해 예수회(會)의 루이 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 해 교리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을 가지고 귀국, 1785년 명례방(明禮坊:현 명동)의 김범우(金範禹) 집을 교회로 삼고, 가성직(假聖職)제도를 채택, 사제대행권자로서 주일(主日)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를 시작하였다. 이듬해 당국에 발각되어 체포되자 가족들의 권유로 배교(背敎)하고 척사문(斥邪文)을 공표하였으나, 1787년 복교(復敎)하여 자치적으로 교회활동을 개시, 자신이 주교가 되어 성사(聖事)를 집행하였다.
1789년 평택현감(平澤縣監)에 등용되었는데 이듬해 베이징에 밀파되었던 윤유일(尹有一)이 가성직제도와 자치운동은 위법이며, 조상에 대한 제사도 철폐해야 한다는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회신을 받고 돌아오자, 그는 제사문제로 두 번째로 배교하였다. 그 후 다시 교회에 돌아왔으나 91년(정조 15)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 서학(西學) 서적을 발간했다는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하고 투옥되었다.
옥중에서다시 배교하고 석방되었다가 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밀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교인이 되었는데, 이듬해 주문모를 맞아들인 죄로 최인길(崔仁吉) ·지황(池璜) ·윤유일 등은 붙잡혀 처형되고 그는 예산(禮山)에 유배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의금부(義禁府)에서 취조를 받고 이 해 2월 서소문 밖 형장에서사형되었는데, 1856년(철종 7) 아들 신규(身逵)의 탄원으로 대역죄만은 신원(伸寃)되었다. 그러나 1866년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가 순교한 데 이어 1871년에는 증손연구(蓮龜) ·균구(筠龜)가 순교함으로써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낸 집안이 되었다.
* 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은 조선조 말기인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호적상의 이름은 인환(寅煥), 자(字)는 승훈(昇薰), 호(號)는 남강(南岡)이다. 1919년 3·1 독립운동시 기독교측 대표였던 이승훈은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일본 관헌에게 검거되어 수감되었다. 이승훈은 대표들 중 최고형인 3년형을 언도 받아 3번째의 옥고를 치르다 59세에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과 관계자 15인등 48명중 마지막으로 경성 감옥에서 가출옥한 후, 곧 이상재(李商在), 유진태(兪鎭泰) 등과 함께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를 창립하여 전국의 사학교육을 지도하는 등 계속 그의 뜻을 펴 나갔다.
1924년 이승훈은 희갑을 맞아 이때부터 그는 한층 성숙되고 깊이 있는 민족정신으로 일하였는데, 5월에는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제4대 사장이 되어 친일세력에 맞서 민족의 언론창달에 힘썼으며, 조만식(曺晩植)과 함께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을 주도하여 국내외 투쟁에 앞장서서 일하기도 하였다. 이승훈은 민족의 존경과 염원에도 불구하고 여러해의 옥고와 힘든 생활로 인해 강인하던 체력이 쇠잔되어 마침내 1930년 5월 9일, 67세를 일기로 그의 생을 마치고 말았다. 이승훈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슬픔을 주었으며 오산학교에서 사회장으로 장례식을 하였다. 그는 '낙심하지 말고 겨레의 광복을 위하여 힘쓰라,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학 표본을 만들어 학생들을 위해 쓰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일제의 방해로 유언을 이루지 못하였다.
선생은 세 번에 걸친 9년간의 옥고와 시대의 여러 어려운 일들을 감수하면서도 오직 민족의 독립과 영광을 위해 생을 바친 분이다. 명예나 지위나 아무런 반대급부를 바라지 않고 절대애국(絶對愛國), 절대애민(絶對愛民)한 것이다. 그의 생을 나타내는데 '무조건 나라를 사랑하였고 무조건 백성을 사랑하였다'는 표현 외에 더 의미가 있는 표현은 없을 것이다. 말보다 행동이 앞선 실천의 사람이요, 행동의 애국자요, 의(義)의 신앙인이요, 솔선수범한 교육자 이승훈선생! 사업이나 교육이나 독립운동에 펼친 치밀한 구상과 웅대한 계획과 대담한 실천력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계승해야 할 덕목이며 영원토록 후세에 본보기가 될 지표이다.
반면 남강 이승훈 선생은 조선말과 일제하에 활동한 국어학자이자 민족운동가로서, 원산학사가 아니라 오산학교를 세웠습니다. 혹시 원산학사를 세운 이 중에 이승훈이라는 또다른 동명이인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원산학사가 설립된 해는 1883년, 즉 이승훈 베드로가 순교한 뒤이므로 최소한 이승훈 베드로일리는 없습니다.
* 이승훈 베드로
세례명은 베드로. 강원도 평창(平昌) 출생. 자 자술(子述). 호 만천(蔓川). 1780년(정조 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심하다가 천주교인 이벽(李蘗)을 만나 천주교에 심취, 1783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인부친을 따라 청(淸)나라에 가서 베이징[北京]천주교당 북당(北堂)에서 교리 증부를 한뒤, 이듬해 예수회(會)의 루이 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 해 교리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을 가지고 귀국, 1785년 명례방(明禮坊:현 명동)의 김범우(金範禹) 집을 교회로 삼고, 가성직(假聖職)제도를 채택, 사제대행권자로서 주일(主日)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를 시작하였다. 이듬해 당국에 발각되어 체포되자 가족들의 권유로 배교(背敎)하고 척사문(斥邪文)을 공표하였으나, 1787년 복교(復敎)하여 자치적으로 교회활동을 개시, 자신이 주교가 되어 성사(聖事)를 집행하였다.
1789년 평택현감(平澤縣監)에 등용되었는데 이듬해 베이징에 밀파되었던 윤유일(尹有一)이 가성직제도와 자치운동은 위법이며, 조상에 대한 제사도 철폐해야 한다는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회신을 받고 돌아오자, 그는 제사문제로 두 번째로 배교하였다. 그 후 다시 교회에 돌아왔으나 91년(정조 15)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 서학(西學) 서적을 발간했다는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하고 투옥되었다.
옥중에서다시 배교하고 석방되었다가 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밀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교인이 되었는데, 이듬해 주문모를 맞아들인 죄로 최인길(崔仁吉) ·지황(池璜) ·윤유일 등은 붙잡혀 처형되고 그는 예산(禮山)에 유배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의금부(義禁府)에서 취조를 받고 이 해 2월 서소문 밖 형장에서사형되었는데, 1856년(철종 7) 아들 신규(身逵)의 탄원으로 대역죄만은 신원(伸寃)되었다. 그러나 1866년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가 순교한 데 이어 1871년에는 증손연구(蓮龜) ·균구(筠龜)가 순교함으로써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낸 집안이 되었다.
* 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은 조선조 말기인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호적상의 이름은 인환(寅煥), 자(字)는 승훈(昇薰), 호(號)는 남강(南岡)이다. 1919년 3·1 독립운동시 기독교측 대표였던 이승훈은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일본 관헌에게 검거되어 수감되었다. 이승훈은 대표들 중 최고형인 3년형을 언도 받아 3번째의 옥고를 치르다 59세에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과 관계자 15인등 48명중 마지막으로 경성 감옥에서 가출옥한 후, 곧 이상재(李商在), 유진태(兪鎭泰) 등과 함께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를 창립하여 전국의 사학교육을 지도하는 등 계속 그의 뜻을 펴 나갔다.
1924년 이승훈은 희갑을 맞아 이때부터 그는 한층 성숙되고 깊이 있는 민족정신으로 일하였는데, 5월에는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제4대 사장이 되어 친일세력에 맞서 민족의 언론창달에 힘썼으며, 조만식(曺晩植)과 함께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을 주도하여 국내외 투쟁에 앞장서서 일하기도 하였다. 이승훈은 민족의 존경과 염원에도 불구하고 여러해의 옥고와 힘든 생활로 인해 강인하던 체력이 쇠잔되어 마침내 1930년 5월 9일, 67세를 일기로 그의 생을 마치고 말았다. 이승훈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슬픔을 주었으며 오산학교에서 사회장으로 장례식을 하였다. 그는 '낙심하지 말고 겨레의 광복을 위하여 힘쓰라,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학 표본을 만들어 학생들을 위해 쓰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일제의 방해로 유언을 이루지 못하였다.
선생은 세 번에 걸친 9년간의 옥고와 시대의 여러 어려운 일들을 감수하면서도 오직 민족의 독립과 영광을 위해 생을 바친 분이다. 명예나 지위나 아무런 반대급부를 바라지 않고 절대애국(絶對愛國), 절대애민(絶對愛民)한 것이다. 그의 생을 나타내는데 '무조건 나라를 사랑하였고 무조건 백성을 사랑하였다'는 표현 외에 더 의미가 있는 표현은 없을 것이다. 말보다 행동이 앞선 실천의 사람이요, 행동의 애국자요, 의(義)의 신앙인이요, 솔선수범한 교육자 이승훈선생! 사업이나 교육이나 독립운동에 펼친 치밀한 구상과 웅대한 계획과 대담한 실천력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계승해야 할 덕목이며 영원토록 후세에 본보기가 될 지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