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교구 언양성당 죽림굴

2006. 5. 21. 오후 10: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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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굴

천연 석굴로 된 박해시대의 공소


천연 석굴로 된 박해시대의 공소(대재공소)(1840~1868)이다. 간월산 정상 가까이에 위치한 죽림굴은 박해를 피해 교우들의 피신 하였던 곳으로, 연기를 내지 않기 위해 생식을 하면서 은신하였다고 전한다. 1840년 부터 1860년 사이에는 샤스땅 정신부, 다블뤼 안신부가 사목을 담당하였고, 특히 경신박해(1859년)때에는 최양업 신부가 이곳에서 은신하던 곳이다. 최양업 신부는 이곳에서 약4개월간 은신하며 미사를 집전하였고, 그의 마지막 서한을 남긴 곳이기도 합니다. 토마스 신부는 이곳에서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한 채 교우들과 함께 생쌀을 먹으며 박해를 피했고, 스승에게 마지막 서한(1860년 9월 3일자)을 작성하면서 자신의 애처로운 모습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최양업 토마 신부의 마지막 편지 중에서)

대재 공소는 현재 경남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천리의 간월산 일대의 옛 신자촌인 간월 공소에서 왕방재라는 고개를 넘어 왕래한 박해 시대의 피난처이다. 이곳은 기해박해 당시 천주교 교우에 대해서는 인정 사정 없이 잔혹했던 관아의 손길을 피해 더욱 안전한 곳을 찾던 신자들이 모여 움막을 짓고 토기와 목기를 만들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던 곳이다. 재 넘어 간월 쪽에서 포졸들의 움직임이 보이면 100여 명의 신자들은 한꺼번에 넓은 굴속에 숨어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대나무와 풀로 덮인 낮은 입구 덕분에 동굴에 숨으면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아 박해시대 교우들의 피난처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울산 장대벌에서 순교한 아양등(베드로), 허인백(야고보), 김종륜(루가)등 3인의 순교자도 한때 이곳에서 생활했다고 전해진다.죽림굴과 관련된 순교자 중에는 24세의 나이로 순교한 김 아가다가 있다. 그녀는 부산 지방의 첫 신자로 기록되고 있는 김재권(프란치스코)의 손녀이자 병인박해 당시 '장하 순교(杖下殉敎)'한 김영제(베드로)의 누이동생이기도 하다.

김영제가 잡혀가던 병인박해 때 붙잡혀갔다가 다시 풀려 나온 아가다는 17세, 18세의 다른 두 처녀와 함께 자진해서 잡혀가기를 청했다. 압송되다가 이들을 농락하려는 포졸들을 피해 간신히 도망 친 아가다는 집안이 풍비 박산이 난 것을 알고 방황하다가 마침내 최양업 신부가 숨어 있던 동굴, 즉 죽림굴로 찾아 든다. 극심한 고생으로 인해 탈진한 그녀는 죽림굴에 도착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병석에 눕는다. 그녀는 죽기 전 몇 달간 전교에 여념이 없던 최 신부를 도왔고 양식이 떨어지면 최 신부가 손수 삼은 짚신을 언양 등지에 나가 팔아 식량을 마련하기도 했다. 때로는 등억, 화천 등 가까운 동리에 나가 구걸도 하면서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는 일도 했다고 한다. 후세에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그녀가 밖에 나갔다가 굴로 돌아올 때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운데 산기슭 입구에서부터 등불이 나타나 험한 길을 인도한 기이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결국 병석에 누워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둔 아가다의 유해는 간월 공소에 모셔졌다. 간월 공소는 1860년 경신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동정녀 김 아가다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기에 순례자들은 여인의 몸으로 천주를 고백하고 자진해 붙들려 가려 했던 그녀의 용감하고도 숭고한 정신만은 이어받을 수 있을 것이다.  

죽림굴을 찾아가는데는 언양 성당의 박만선 회장님의 노고를 잊을 수가 없다. 2003년 11월 17일 배내고개를 넘어 가는데 벌써 얼음이 얼었고, 첫 번째 죽림굴 입구 표시에는 죽림굴까지의 거리가 7.4km로 표시되었고, 좀더 가서 또다시 입구 표시에는 3.5km로 표시되어 있어 이곳이 지름길이다 생각하고 승용차로 진입하다 산 중턱에서 얼음이 녹은 자갈길에서 차가 밀려 10여 m 아래로 차가 전복되었다. 119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병원으로 후송되고, 승용차는 현지에서 폐차하고 귀경하였다. 2004년 11월 5일 1년만에 다시 찾아가서 언양 성당 박만선 회장의 안내로 첫 번째 입구(죽림굴까지 7.4km)로 진입하여 무사히 죽림굴을 방문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입구(죽림굴까지 3.5km)로는 거의 45도 이상 경사이니 차를 세워 놓고 걸어서(약 1시간 거리) 올라가는 코스로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최양업 토마 신부님의 편지


※ 경신박해(1860)의 언양지역 상황에 대해..


"예수 마리아 요셉

죽림굴에서 1860년 9월 3일 리보아 신부와 르그레조아 신부에게

공경하올 신부님들

먼저 두 분 신부님들에게 공동편지를 보내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이 편지를 두분 뿐만 아니라 모든 신부님들에게 보내야 할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박해의 풍파로 한 모퉁이에 갇혀서 신자들과 아무 연락도 못하고 있습니다. 벌써 여러 달 전부터 주교님과 다른 신부님들과도 소식이 끊어져 그들의 생사도 모릅니다. 이 편지도 중국에까지 도착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박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포졸들이 사방으로 파견되어 신부님들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내 지방에서 17명이 체포되었는데, 남자가 14명, 여자가 3명입니다. 남은 신자들도 그의 다 그들 지방에서 쫓겨나 집과 전답과 가산을 전부 빼앗겼습니다. 의지할 데도 없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동네에서 잡힌 신자들은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가정물건들은 포졸들이 약탈했거나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신자 친척이나 신자 친구들을 피신시켜 주었던 외교인들도 신자들과 같은 운명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동리의 주민들이 신자들 때문에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 신자들로 하여금 아무 데도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결의하였습니다. 나라에서 신자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잡아 가둘 수도 없고, 다 재판에 회부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고, 포졸들을 여기저기 파견하여 신자들을 혼란케 하고 또 외인들을 충동하여 신자들을 적발하게 합니다. 이 방법이 신자들에게는 더 가혹하고 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체포된 17명 중 3명은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왜 석방되었는지 원인을 알 수 없으나 아마 배교한 것 같습니다. 2명은 서울로 압송되었고, 1명은 대구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혔는데, 요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열심한 여신자가 하나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을 가르쳐 천주교에 나오게 인도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노파는 체포되어 용맹히 신앙을 증거한 후 혹독한 매를 맞고 순교하였습니다. 10명이 경주감옥에 갇혀 있는데 3명은 문초를 당할 때 용감히 신앙을 증거하고, 지금까지 감옥에서 고초와 굶주림과 병고로 고생하며 함구합니다. 그들 중 16세 된 소년이 있는데, 옥사장에게 간청하여 아버지와 같이 형장에 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습니다. 24세된 동정녀가 있었는데, 교리에 밝고 열심하여 모든 신자들 중에서 출중하므로 일반의 존경과 흠모를 받아왔습니다. 항상 마음으로 위주치명(爲主致命)하기를 원하더니 자기 부친과 다른 신자들이 체포될 때 포졸들한테 가서 자기도 같은 신자이니 잡아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친과 다른 신자들의 만류로 다른 집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거기서 포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포졸한테 가서 잡혀가기를 청하였습니다. 이때 이 동정녀가 가르치며 선생처럼 지도한 두 처녀를 묶어가지고 가다가 여인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없으므로 저들을 관가로 데려가지 않고, 처녀들을 농락하고 나서 다른 데 팔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세 처녀들은 놓아 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저들은 주님의 특별한 은혜로 놓여 났습니다. 동정녀의 이름은 아가다였습니다. 아가다의 부친과 오빠가 감옥에 갇혔고, 집도, 갈 곳도 없어 방황하다가 마침내 내게로 왔습니다. 너무나 고생을 많이 하여 탈진한 몸으로 병석에 누워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둘러있던 신자들과 같이 임종경의 마지막 말마디를 끝내자 아가다는 운명하였습니다. 박해 전에는 천주교에 대한 인기가 상승하여 사방의 많은 외교인들 중에서 예비자들이 속출하므로 큰 위안과 희망을 가졌습니다. 내 지방에서만도 예비자 수가 거의 1,000명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어떤 동네는 전체가 문답과 경문 배우는 데 경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박해로 모든 외교인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없애기 위해 무장하고, 동리마다 신자들을 추방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천주교에 대한 인기는 몰락하고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한 자들은 실망하고, 많은 이들이 적어도 겉으로는 배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까지 굳세게 용맹히 신앙을 지킨 신자들까지도 마음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특히 젊은 과부나 처녀들은 더욱 큰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벌써 한 신자 과부가 외인한테 겁탈을 당하였고, 남편이 감옥에 갇힌 젊은 부인  한 사람과 처녀 한 사람도 겁탈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에 저들이  아직은 몸의 순결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신자 처녀들을 할 수 없이 외인과 정혼시켰습니다. 시시각각으로 겁탈의 위험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전례200년사에서)


조선교구 사제 최 토 마 올림“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신망애 삼덕을 증진하도록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순례지 정보


소재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연락처

연양성당 (05) 262-5312

홈페이지 

언양성당/죽림굴 https://church.catholic.or.kr/unyang

https://church.catholic.or.kr/unyang/musium/musium.htm

미사시건

<언양성당>

평일:(수) 오전 10:00, (화목금) 오후 7:30(겨울 7:00),(토) 오후 4:00, 7:00

주일 : 오전 6:00, 10:30, 오후 7:00

교통편

<승용차> 경부고속국도 서울산 IC-석남사-배내고개-간월산 휴양림 지구와 죽림굴 안내판이 좌측에 나온다. 산으로 7.4km 쯤 가면 간월재가 나오고 그곳에서 우측으로 내려간다.

<버스> (언양읍)간월행 버스 종점 하차, 왕방제로 등산, 간월재에서 배내쪽으로 2km 하차




















댓글 1

  • 2006년 5월 22일 오전 1:39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