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읍성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처형한 해미 진영
해미 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 절도사의 처소를 둔 곳으로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반 영장이 현감을 겸해 지역을 통치하던 곳이다. 내포 일원의 해안 수비를 명목으로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1790년에서 1890년에 이르는 100여 년의 기간 동안 해미 진영은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처형했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정이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할 때뿐만 아니라 해미 진영은 끊임없이 내포 지방의 교우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이 박해 기간 동안 해미 진영에 있었던 두 채의 큰 감옥은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교수형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어 갔다. 또 더욱 잔인하게 돌다리 위에서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돌에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기도 했고, 여러명을 눕혀 두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꿈틀거리는 몸뚱이를 발견하면 횃불로 눈을 지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쟁이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 한다.
해미는 일찍이 천주교가 전파된 내포 지방의 여러 고을 가운데서 유일하게 진영이 있던 군사 요충지 였다. 1418년에 병영이 설치 되었고. 1491년에 석성이 완공된 해미 진영(사적 116호)은 1790년대로부터 백 년 동안 천주교신자들을 무려 3천 명이나 국사범으로 처결한 곳이다. 1790년대에 순교한 박취득(라우렌시오)을 비롯한 순교자들은 1870년대에 까지 수십 명이 이름을 남겨놓고 있지만 그외의 수천 명의 이름은 그들의 목숨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해미의 땅은 이렇게 알 수 없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쓰러져 갔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1799년에 이보현과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1814년에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가 10년 옥고 후 옥사 하였으며, 충청도 지방의 대대적 박해 시기였던 18159(을해) 년과 1827(정해)년 기간동안에는 손여옥 등 수많은 신자들이 집단으로 체포되어 순교 하였다. 주로 면천, 덕산, 예산, 등지에서 살던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을 해미 진영 군졸들이 수시로 급습하고 재산을 약탈한 후 신자들을 체포하여 해미 진영 서문 밖 사형장에서 처형하였다.체포된 신자들 가운데엥 신분을 고려하여야 할 사람들(양반층)은 상급 치소인 홍주, 공주, 서울로 이송되었으며 대부분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은 심리 절차(기록) 없이 해미에서 처형되어 글자 그대로 무명 신자들이 수천 명 순교한 곳이 해미 땅이다.
1866(병인)년 이후 몇 년 간의 대박해 동안에만 순교한 숫자를 1천명에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790년대 부터 희생된 순교자가 3천여 명으로 추천된다.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는 박취득(라우렌시오)등 수십 명 뿐이다.
◆ 감옥터와 호야나무
높이 5미터 길이 1.800미터의 석성으로 옹벽을 두른 해미 진영안에는 동헌 동남쪽 1.800평 대지 위에 내옥, 외옥으로 구분되던 감옥이 있었다. 이조 시대의 감옥은 높은 담으로 둘러쌓인 울 안에 있었다. 바닥에 멍석을 깔아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말할 수 없이 더워 한여름 매 맞은 상처는 곪기 일쑤였다. 고문과 굶주림과 갈증과 질병으로 순교자들의 몸이 스러져 가던 감옥은 헐려 없어지고 그 자리만 남아 있다.
그 감옥터 옆에는 지금도 묶어 매달고 몽둥이로 치면서 고문하던 흔적으로 오늘도 이 나무의 묵은 가지는 녹슨 철사줄에 움푹 패이도록 옛님들의 아픔을 살갗에 두르고 있다.
◆ 관아터와 장터길
진영장이 호령하던 옛 동헌은 지금은 헐려 없어지고 그 집터만 철책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 옆자리에 아문과 호서좌영의 옛 모습이 복원되어 있고 뜨락에 있었을 법한 노송 여섯그루가 당시 호령소리, 곤장치는 소리, 비명 소리를 이파리마다 묻혀 놓은 듯 그 터에 서 있다. 관아터로부터 남서 쪽으로 헐려진 옛 집터 사이사이에 질퍼덕한 길이 있다. 옛 저자길이다. 옛님들이 저주의 욕설을 온몸에 묻혀가며 형장으로 호송되던 길이다.
◆ 서문 밖 순교지
저자길을 따라 서쪽 하수로에 다다르면, " 재앙을 떨쳐내는문 " 이 비껴 있다. 재앙의 씨알머리를 서쪽에 내어 버리듯이, 사학 무리를 이 문 밖으로 끌어내어 쳐 죽었다. 잡아 들일 때 빼앗았던 십자가의 묵주 등을 이 문의 난간에다 넣어놓고, 지나가면 밞게 하여 천주학을 버리고 목숨을 살려보라 하였다. 그러나 그님들은 성물에 머리 숙여 절을 하고, 문턱을 넘어 가서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다. 이 문의 누각에는 지성루라 쓰여 있는데, 본래 탱자나무로 둘러쳐진 해미 진영이었기 때문이지만 이 서문이란 그님들이 가시밭 이 세상을 떠나가던 마지막 문이었다. 이 문을 나가면 그 님들을 밀어넣고 돌로 찧던 하구수가 입을 벌리고 있다. 하수구를 가로 질러 놓여 있던 돌다리는 그야말로 사람 도마였고, 여기저기 시체가 쌓여 썩고 피가 땅에 젖어 남아 흐르는 곳이 서문 밖이었으니 여기서 죽은 목숨이 몇 천이나 되었는지 헤아릴 수 없어 그저 "시산혈하를 이루던 곳이었다 "라는 말만 남아 있다.
◆ 피의 제사장 자리개 돌
서문 밖 순교지에서 순교자들의 목숨을 빼앗는 방법은 가지가지였다. 돌로 쳐 죽이기도 하고, 돌구멍에 줄을 꿰어 목에 옭아 지렛대로 조여 죽이기도 하고, 묶어서 눕혀 놓은 여러명을 돌기둥으로 내리 눌러 죽이기로 하였으며, 얼굴에 백지를 덮고 물을 뿌려 질식시켜 죽이기도 하고, 나무에 매어 달고 몽둥이로 죽이기도 하였다.
특히 잔인하게는 돌다리 위에 연약한 순교자를 서너명의 군졸들이 들어올려 자리개질(태질) 하여 머리와 가슴을 으스러지게 하기도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시 양촌 사람 방영창 안토니오 등 수많은 분들이 순교하였다. 꿈틀거리는 몸둥이가 있으면 횃볼로 지져 숨을 끊어 버렸다. 이 자리개 돌은 서문 밖 순교 성지 일부를 확보하여 보존하고 있다.
▒ 여전히 식지 않고 (해미에서) <김영수> ▒
내포벌의 하늘이
끝없이 쪽빛으로 빛나는 것은
땅에다 뿌린 피들 있었음이요
내 아직도 꿈을 놓지 않았음입니다
결코 늙지 않는 햇살 속에서
약속 푸르게 익어 있는 노래 들으며
땅과 하늘 사이에서
슬픔으로 설렐 수 있는 것은
가슴 속에는 기도 품은 죄 있음입니다
내 속을 돌고 있는 밤의 안개는
자리를 조금씩 옮길 때마다
한 줌씩의 새벽을 남기면서
가장 깊은 슬픔의 샘에 닿아
얼굴 씻은 물소리 하나 되기를 바랍니다
눈물 어린 기도 하나 되기를 바랍니다
해미를 흐르는 바람은
여전히 식지 않고 있습니다
■ 순교자
◆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 (1737-1800년)
1737년 충청도 덕산 주래(현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인언민(印彦敏) 마르티노는 온순하면서도 꿋꿋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상당한 학식도 쌓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평소에 알고 지내던 황사영(알렉시오)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이내 그로부터 교리를 배운 뒤 한양으로 올라가 주문모(야고보)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때 마르티노는 장남 요셉을 신부 곁에 남겨두었으며, 얼마 후에는 차남을 유명한 교우의 딸과 혼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집과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하였다. 이때 친척들이 그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자, 그는 이주하는 이유를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친척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797년에 시작된 정사박해가 한창 진행되던 어느 날, 마르티노는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밝히고,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를 원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고백한 뒤 옥으로 끌려갔다. 그런 다음 청주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감사의 명에 따라 다시 그의 고향을 관할하던 해미 관장 앞으로 이송되었다. 인언민 마르티노는 청주에서 받은 형벌로 인해 걸을 수조차 없었다. 그러므로 청주에서 해미까지 가는 동안 조정 관리들이 이동할 때 사용하는 말을 타고 가야만 하였다.
해미 옥에서 마르티노는 젊은 이보현(프란치스코)을 동료로 만나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언제나 서로를 권면하였고, 갖은 형벌과 문초와 유혹 아래서도 전혀 변함이 없이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어쩔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인언민도 이보현과 같이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형리들은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인언민 마르티노에게 갖다 준 뒤, 그를 옥에서 끌어내 매질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그중의 하나가 엄청나게 큰돌을 들어 그의 가슴을 여러 번 내리쳤다. 이내 그의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는 부서지고 말았다. 결국 마르티노는 이러한 형벌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마지막으로 매질을 당하는 동안에도 그는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이 되뇌었다고 한다.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고통중에 있는 사람을 위해 봉사하도록 빌어 주소서.
■ 순례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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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군 해미면 읍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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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처 |
해이 성지 관리소 사무실(041) 688-3188,688-4886, FAX(041) 688-90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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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
해미성지 http://www.haemi.o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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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시간 |
평일 및 주일 : 오전 11:00(단, 월요일 미사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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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편 |
<승용차> 서해안 고속도로 해미 IC에서 내려서면 곧 해미성지에 이른다. |
※출 처 : www.paxkorea.co.kr
한국의 성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