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보 그는 구세주인가???(펌글)

2006. 1. 26. 오전 11:09:31

글자

*우리가 축구에 관하여 알고자하면 감독을 우선적으로 알아야 한다.

우리의 언론은 아드보카드감독에 대하여 우호적인 기사를 양산하여  축구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장미빛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한쪽만 바라보지말고 양면을 보는 여유를 갖고자 오마이 뉴스의 정윤수기자

의 칼럼을 감히 발췌하여 실었다.

축구를 보는 시야와 생각의 전환을 기대한다.

알아야 축구하고 볼 수있다.

 

*오늘 저녁(1/25)의 대표팀의 대핀란드전에서 아감독의 전술을 눈여겨 볼

여유가 우리에게는 있다.(없다)

 

아드보카트 띄우기가 걱정되는 이유
[정윤수 칼럼] 그는 과연 '무결점의 구세주'인가
 
"지휘자는 과연 필요한 존재인가?"

저명한 음악비평가 어네스트 뉴먼의 질문이다. 그의 질문은 낭만주의적 해석과 정격 연주 사이의 길항 관계에 대한 것이지만 이 현문을 우답으로 대신한다면 "그때 들리는 소리는 그저 소리일 뿐"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지휘자가 없어도 얼마든지 연주는 가능하다. 그러나 지휘란 시작과 끝을 알리는 프롬프터가 아니라 오선지의 기호를 실질의 음악으로 견인하고 쉼표까지 철저히 계산하고 해석하는 행위다. 수십 명의 단원 중에서 지휘자는 유일하게 악기를 연주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또한 그는 악보에 담긴 작곡가의 의도를 해석하고 이를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유일무이한 연주자인 것이다.

▲ 부천 필 교향악단의 지휘자 임헌정이 단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그렇다면 스포츠에서 감독이란 어떤 존재인가.

현상의 측면에서 감독은 경기장의 열정 바깥에 존재하는 방외자다. 그는 참견할 수는 있어도 직접 참여할 수는 없다. 실제의 경기는 역시 선수들의 물리적 움직임이며 감독은 터치라인 바깥이나 덕아웃이나 벤치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이 공간을 벗어나면 반칙까지 주어진다.

축구라면 사정은 좀더 딱해 보인다. 농구 감독은 작전 타임을 걸 수 있으며 무제한으로 선수 교체를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선수들과 몇 미터밖에 떨어져있지 않다. 야구 감독도 형편이 낫다. 볼 하나 하나마다 작전을 걸 수 있으며 굳이 할 말이 없을 때에도 공수 교체 때문에 늘 선수들은 감독 있는 곳으로 우루루 몰려 온다.

그러나 축구 감독은 딱하다. 소리를 지르고 휘파람을 불고 팔을 휘젓지만 저 맞은 편의 수비수나 저 멀리 있는 골게터는 잘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4만 명 이상이 운집한 축구장이라면 가까운 거리의 선수들도 서로 잘 들리지 않는 상황, 백전노장의 감독이라면 벤치에서 고함을 지르다가 혈압이 걱정되기도 할 것이다. 그의 영혼은 그라운드 속으로 잠입하였으나 무심하게도 그의 육체는 터치라인 바깥을 서성거릴 뿐이다.

그럼에도 역시 위의 현문에 대한 답은 같다. 지휘자 없는 연주는 다만 소리일 뿐 철학을 지닌 음악이 아니듯이 축구 역시 감독이 없어도 얼마든지 선수들은 뛸 수 있지만 그것은 전술이 없는 뜀박질에 불과한 것이다. 마치 지휘자가 악보를 해석하고 추상적 음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처럼 감독은 11명의 선수들에게 화학 반응을 일으켜 고도의 집중력과 창조적인 플레이를 가능케 하는 축구 철학의 실천가인 것이다.

▲ 아드보카트 감독이 터치 라인까지 나가 선수들을 독려하고 있다
아주 간단하게 확인되는 이 사실에 대한 증거물로 전지 훈련 중인 아드보카트 감독을 보자. 그는 훈련지에서 한 첫 인터뷰에서 "프랑스, 스위스, 토고 등의 정보전을 의식해 선수들의 등 번호를 바꾸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그들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오히려 그들이 우리를 두려워하도록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 단순한 결정에서 우리는 아드보카트 감독의 어떤 측면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좀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감독의 무덤'이라는 오명이 채 가시지 않은 한국 축구의 현황, 그 우여곡절의 3년여 세월 때문인지 현재 아드보카트 감독에게 쏟아지는 지지는 너무 감정에 치우쳐 있다는 느낌이다.

본 프레레 전 감독에 대한 실망, 흐트러진 팀 분위기, 축구협회의 불확실한 보폭, 연이은 졸전. 이런 조건에서 등장한 아드보카트는 지난 해 10월 12일 부임하자마자 첫 평가전을 시작으로(그때 신예 조원희는 휘슬이 울리자마자 59초 만에 첫 골을 선물하였다) 순식간에 대표팀의 흐트러진 분위기를 사로잡았으니 그에 대한 지지가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의 성공이 곧 한국 축구의 성취가 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확인하며 말하건대, 틀림없이 지금의 아드보카트에 대한 열정은 우려되는 바가 있다.

다음의 두 가지 사실 때문이다.

먼저 그리스와의 두 번째 평가전 당시 아드보카트 감독은 전반전 35분 경 우측면 윙백으로 선발 출전한 조원희 선수 대신 장학영 선수를 투입시켰다. 그 경기에서 조원희는 자기 공간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고 공중 볼 처리에 실수가 있었으며 무엇보다 부상을 입었다.

그 자리를 장학영 선수가 맡았다. UAE 전에서 왼쪽 미드필더로 뛰었던 장학영이지만 그는 원래 성남 일화의 4백 수비수 중 한 명. 아드보카트는 자신의 4백 라인 구상을 위하여 장학영을 실험하려고 했다. 비록 그것이 조원희의 부상으로 일찍 투입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오마이뉴스>를 비롯해 방송이나 매체의 언급은 대체로 감정적이고 더러는 감상적이었다. "신예에 대한 배려", "감독의 용병술", "첫 경기에 주눅 든 선수에 대한 섬세한 격려" 등이었고 어떤 매체는 조원희 선수에 대해서도 아드보카트 감독이 자상한 격려와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썼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선수들이 '축구 기계'가 아닌 이상 교체하고 투입할 때마다 감독이 따뜻하게 격려하는 것은 인지상정의 일이다. 이러한 행위는 우리가 보았던 그 많은 대표팀 감독들이 늘 해온 일이다.

문제는 이러한 감정적인 표현과 감상적인 접근이 아드보카트 감독의 축구 철학, 그 전술과 변용을 이해하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선수를 교체하고 투입하는 것을 전적으로 '신인에 대한 배려'로 이해하는 것은 단견이다. 은퇴 직전의 노장을 위한 것이라면 몰라도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 하는 평가전이 '배려'일 수는 없는 것이다. 현지의 24명 선수 중에는 여태 출장 한번 못한 선수들도 많은데 이들에 대해서는 '배려가 없다'는 말인가.

감독은 무엇보다 냉정하게 평가하고 철저하게 분석하는 자리다. 이를 위하여 수많은 선수(혹은 포지션)를 기용하고 자신의 도상학을 실전 속에서 반복해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격려와 배려가 따르는 것은 인지상정일 뿐 우선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전술적 선택에 대한 이해인 것이다.

두 번째로 기억할 만한 것은 전임 본 프레레 감독의 인터뷰 건이다. 지난 1월 21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2006 아프리카 네이션스 컵 대회를 참관하고 있는 본 프레레 전 감독이 한국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네덜란드 축구 기자들은 아드보카트 감독을 좋은 감독이 아니라고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 말의 뜻을 알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다른 지면에 따르면 이 발언에 대해 아드보카트 감독이 "그런 말을 했다고 믿어지지 않는다. 빨리 팀을 맡아 건승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설전 아닌 설전을 한국 언론은 '옹졸한 본 프레레 vs 대범한 아드보카트'라는 구도로 전달했다. 사실상 경질된 전임 감독이 이전의 소속 팀에 대하여 냉소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것도 보기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이에 대한 현 감독의 코멘트에 대해 '큰 배포', '아량', '충고' 등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2002년 당시 히딩크 감독이 전지훈련과 평가전에서 졸전을 벌였을 때 한국의 스포츠 언론은 숱한 비판 기사를 양산했다. 그러나 그는 4강을 이뤘고 언론은 히딩크의 전설을, 아니 부임 초기부터 아예 4강을 예고한 듯한 영웅 서사시를 새로 써야만 했다.

그때의 상처를 재생하지 않으려는 듯 현재의 국면에서 아드보카트에 대한 인상과 기사는 '난세의 영웅'이요 '무결점의 구세주'와 같은 인상을 준다.

이러한 '무오류의 언어'는 위험하다. 무오류의 프리즘은 감상적인 언어로 이어지고 '자상한 배려', '강력한 카리스마', '넓은 아량', '큰 배포' 등의 언어는 아드보카트 축구의 진면목을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된다.

▲ 경기전 운동장을 바라보는 아드보카트 감독
나는 그리고 이 글의 그 어떤 독자도 아드보카트가 실패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의 축구 철학이 한국 선수들과 화학 반응을 일으켜 16강 이상의 성취를 거두기를 기대한다. 뉘라서 근거 없이 그를 비난하자고 하겠는가. 아무 이유도 없이 이제부터는 비판부터 하자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좀 더 냉정한 시선을 보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무오류의 신화'에 바탕을 둔 감상적인 언어는 축구의 미학에 대하여, 감독의 철학에 대하여, 각 경기의 섬세한 내러티브에 대하여, 그 결정적 순간에 대한 감독의 선택에 대하여 다양하고 깊이 있는 해석을 방해하게 된다.

이러한 감상적 접근은 축구를 즐기는 최선의 방법, 즉 그 자신은 연주하지도 않으면서 풍요롭고 절실한 공기의 울림을 들려주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도 같은, 저 벤치의 고독한 감독이 지닌 풍부한 축구 철학과 실전 속에서 일궈내는 아름다운 전술을 읽는 즐거움을 빼앗아 갈 뿐이다.

이는 꽃다발을 들고 환호만 할 뿐 그 지휘자가 어떤 음악을 들려줬는지 무지한 것과다름없다.

댓글 2

  • 2006년 1월 26일 오후 10:23

    재욱아 이렇게 길면 댓글이 올라오냐!!!!! 오죽하면 광조도 그냥 나가잖아! !!!

  • 2006년 1월 27일 오전 11:29

    아~하 알겠습니다.....

*^^*한마음출석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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