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신부님들께, 대만에서 양재오 신부가 문안 인사드립니다. 아마, 심흥보 신부님의 열성으로 이런 웹 공간이 마련된 것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아무쪼록 이 공간이 신부님들을 서로 연결하는 좋은 끈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신부님들 두루 평안하시고 기쁜 사목생활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글 모음에 들어갈른지 모르겠습니다만, 또 신부님들에게는 진부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천진난만한 글이 아니될른지 저으기 걱정은 되지만, 신학교에 들어갈 때, 그리고 막 새 신부가 되었을 때의 순진한(?!) 심경으로 한 번 보셨으면 합니다.
교회와 권력(敎會與權力)
교회와 권력. 이에 대하여 80년대에 신학교에서 경험하였다. 나는 (사람도 타고 짐도 싣는) 소형차를 한 대 갖고 있었다. 여러 해 동안 사용하였는데, 평소 일주일에 한 번은 세차를 하였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지 않고 스스로 하였다. 어느 해 관할 주교는 나를 신학교 원장(학장)으로 임명하였다. 원장직을 수락하고 근무한 이튿날이었다. 나는 늘 하던 대로 물통과 세차도구를 갖다놓고 내가 오랫동안 사용하고 있는 내 차를 씻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신학교 관리를 담당하는 이가 주방에서 뛰어나오면서, 마침 그 때 유리창을 닦고있던 고용원에게 유리창 닦는 것 중지하고, 빨리 원장신부의 차를 닦으라고 불렀다. 그 때 나는 상관하지 않고 내가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내가 내 차를 계속 닦을 수 없게 되었으니, 그것은 내가 쓰던 물통을 이미 다른 사람이 낚아채 가고 없었기 때문이다. 그 뒤, 내가 8년간이나 끌고 다닌 그 소형차는 매일 깨끗하게 닦여서 윤이 반짝 반짝 나게 되었다.
어느 날, 신학교 관리원과 함께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러 시내에 나갔다. 도중 백화점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 때 마침 중국 대륙의 예술작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나는 공예품을 좋아하기 때문에 들어가서 둘러보았다. 그 중 산동(山東)에서 출품한 자기(瓷器)에 입힌 타이산(泰山)의 산수화(山水畵)가 눈에 들어와서, 한 참을 바라보았다. 그 때 점원이 나에게 다가와서 말하기를 이 그림은 이 전시회를 위해서 만든 전 중국에서 유일한 작품의 견본이라고 한다. 세 주간이 지난 뒤, 내 생일을 맞이한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집무실에 내려가서 일을 시작하려는 참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문을 여니, 신학교 관리를 담당하는 이가 직원들을 모두 데리고 와서 나에게 생일 인사를 한다. 그런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직원 중 두 사람이 일 전에 백화점에서 내가 감상하였던 바로 그 도자기 그림을 나에게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교회는 줄곧 권력은 봉사를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 천주교와 같은 너무나 방대한 단체(조직)를 잘 다스리려면 일정한 행정기구가 필요하고, 그 제도 안에는 일정한 권력(혹은 권한)과 책임이 있게 된다. 권력과 책임 자체는 하나의 도구요 수단으로써, 실제적인 공공의 이익과 필요에 따른 것으로, 형편에 따라서 고쳐져야만 한다. 그리고 대단히 나쁜 관건(關鍵)은 권력은 그 행사하는 사람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장악한 초기에는 의식이 상당히 깨어있고, 그에게 주어진 권력을 의식(意識)을 갖고 행사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사람은 권력을 올바로 행사하는 것에 대한 의식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권력이 사람에게 주는 제일 큰 유혹은 바로 너무 편리하다는 것이다. 권력이 있기 이전의 얻기 어려웠던 조그만 편리함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기 어려운 과분한 봉사나 마음 씀이, 권력이 있고 나면 금방 쉽게 얻게 된다. 많은 경우 네가 요구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알아서 네게 보낸다. 권력이 사람에게 주는 두 번째 것은 더 위험스러운 것인데, 그것은 권력을 가진 당사자가 참으로 자기가 누구인지 잊어버리는 것이다. 편리한 것이 습관이 되고, 사람마다 내(자기)가 가는 길을 비켜주고, 분부한 일은 누군가 나서서 척척해 치운다. 어떤 말을 하면, 누구나 다 주의해서 듣는다. 어떤 일에 대하여 토론을 한 뒤, 최후에 여전히 네가 방망이를 두들겨 결정을 한다. 많은 일이 본래는 참여자들이 손을 들고 결정한 뒤 시행하게 되었으나, 네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다는 큰 이유를 들어 이 절차를 생략해버린다. 이러한 가운데 권력을 가지 사람은 점차 정말로 자기는 대중(大衆)과 다른 존재라고 여기게 되고, 급기야 자신의 참된 신분, 곧 사람은 모두 평등하고(衆生皆平等) 너와 나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며 우리모두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망각해 버린다.
교회 안에서 가지고 있는 권력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같고 있는 권력이 어떠한 것인지 분명한 의식을 지니고 있어야, 이를 무책임하고 등한히 행사하게 되지 않게 될 것이다.
로마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의 교회론을 공부할 때였다. 정말 공부에 열중하였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 안에서 스스로 그리스도의 참된 면모를 인식할 수 있게 되어서 기뻤다. 그러나 수업이 끝나고 로마의 거리를 거닐 때 부딪히는 많은 이들은 바티칸의 각 부문에서 일을 마치고 나오는 이들인데, 보면 모두 무표정한 모습의 성직자들이다. 게다가 어떤 때는 호화로운 승용차 뒷자리에 빨간 모자를 쓰고 한가롭게 성무일도를 손에 받쳐들고 입으로 기도문을 쫓아 읽는 추기경 어른을 보게된다. 당시 나는 정말로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셨다는 것, 고생스레 이리저리 떠다니시고 때로는 머리 둘 곳조차 찾지 못했던 것이 무슨 까닭 때문인지, 그리고 어찌하여 종중의 종이 결국 이런 모양으로 변해버렸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N.B) 이 글은 탕쥐엔쥔(唐雋君)이 지엔쩡위에칸(見證月刊) 2000년 7월호에 기고한 글을 양재오가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