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언제부터 사용했나요
주석성경 / 성경입문
성경은 무엇인가? 목차만 흝어보아도 성경은 하나의 '문고', 매우 다양한 책들의 총서임을 알수 있다. 이 책들의 '입문'을 참조해 보면 이와 같은 첫인상은 더욱 확실해진다. 약 십 세기에 걸쳐 작성되었기에 그 출처가 서로 다르며, 어떤 책들은 히브리 말로(몇몇 구절들은 아람 말로) 또 어떤 책들은 그리스 말로 저술되었다. 이 책들은 또한 이야기, 법전, 훈계, 기도, 시, 서간, 소식 등과 같은 다양한 유형을 보여 준다.
이 총서의 이름으로 불리던 '책들(그리스 말로 ta biblia)은 단수로 '책'(그리스 말로 he biblos 또는 to biblion). 곧 '성경'이 되었다. 이처럼 성경은 단 한 권으로 되어 있는 가장 탁월한 책으로 여겨진다. 어떤 이유에서일까?
* 출처: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주석성경
성경은 누구에게서 나왔는가?
성경 저자들과 편집자들은, 개인적으로서 그리고 한 백성의 구성원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역사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나타나심과 부르심을 증언하며 일상생활 속에서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하게 되는 반응들을 (예를 들어 질문, 탄원, 찬미, 감사 등) 이야기한다.
그리스도교 성경의 첫 부분인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모르고는 이해할 수 없다.이 역사는, 이집트 탈출로부터 유배 이후 유다교 탄생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을 하나의 독특한 백성으로 만들어 준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구약 성경 입문'Ⅱ참조). 이스라엘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초월적 존재이신 한 분 하느님, 곧 야훼(주님)를 고백한다.
상당수의 성경 본문들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밝힐 때에 법률 개념인 '계약'을 사용한다. 이스라엘은 이제 이 계약과, 계약에서 흘러나오는 율법을 자신의 모든 삶을 내맡기도록 부름을 받는다. 성경 가운데 히브리 말로 된 모든 부분들은 이와 같은 계약 신학을 하나의 특징으로 내세운다.
기원후 70년과 135년에 종교적 중심지 예루살렘이 파괴되면서부터 급속하게 흩어져 나갔던유다 공동체 안에서 그 맥을 이어 가는데, 이 공동체의 파란 많은, 때로는 비극적인 역사는 대부분 유배의 땅에서 펼쳐진다. 이 공동체에 활기를 불어넣은 다양한 경향들은 모두 성경, 특히 하느님에게서 직접 나온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율법을 기초로 한다.
유다인들은 성경을 열심히 읽고 성경을 근거로 전승들의 범위 내에서 그들의 관습을 일구어 나갔다. 이 전승들은 옛 이스라엘의 삶 속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기원후 2세기 국가가 멸망하고 난 다음 편집되기 시작하여 결국 라삐 문학에 자리하게 된 것들이다.
기원후 1세기 후반에 이르러 첫 그스리스교 공동체가 탄생하며 이 공동체는 유다교로부터 갈라져 나간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 백성의 역사와 예언자들의 예고는 나자렛 사람 예수의 오심으로 그 완성을 본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새 계약으로 다스릴 백성을 이루시고자 모든 민족을 불러 모으신다.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계약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단계였으나, 예레 31,31-34의 신탁에 따라 새 계약으로 대체되어야 했던 계약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의 전승들을 옛 계약이라 불렀고, 나중에는(바오로 사도의 서간, 특히 2코린 3,14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스라엘로부터 물려받은 성경 전체를 구약 성경이라 일컬었으며, 예수라는 인물과 그의 메세지에 대하여 말하는 책들은 신약성경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신약 성경을 기초했던 제자들과 그 후계자들은 예수라는 인물 안에서, 이스라엘의 희망을 성취시키고 그 백성 한가운데에서 드러난 보편적 기다림에 응답하시는분을 보았다. 이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의 거룩한 책들이 즐겨 사용한 언어는 물론 오랜 세기 동안 축적되어 온 종교적 체험과 역사의 가치를 받아들였으며, 이들의 뒤를 이어 그리스도교는 구약 성경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보았다.
이렇게 해서 유다인들의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첫 번째 성경이 되었으며, 이들은 기원후 3세기경에 가서 이 성경을 신약 성경으로 보완하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약 성경은 이제 새로운의미를 지니는 새로운 책이 되었다.
이처럼 유다인들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근본으로 삼기는 하지만 같은 시각으로 읽는 것은아니다. 그러함에도 성경은, 모든 나라와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모든 신앙인들에게 성경을읽는 공동체는 들오와 과거를 통해서 그리고 현재 안에서 성경이 갖는 의미와 의의를 찾도록끊임없이 초대하는 작품이다.
* 출처: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주석 성경
우리가 구약성경이라 부르는 것을 유대교에서는 타나크(Tanakh)라 부른다. 구약성경 내용인 율법(토라 Torah)과 예언서(네비임 Neviim) 그리고 교훈서(케투빔 Ketubim)의 앞 글자를 합성해 만든 용어다. 유대교 경전(구약성경)은 대략 기원전 1000년부터 시작해 600여 년에 걸쳐 완성된다. 처음엔 구전으로 전해지다 기록으로 남았다. 메소포타미아 지방과 팔레스티나 그리고 이집트가 무대다. 낱권으로 기록되었다가 오랜 세월을 거쳐 한 권이 되었다. 지금은 타나크는 2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약성경과 타나크는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 지금은 모두 한 권의 책으로 되어 있지만 원래는 여러 지역에서 쓰인 낱권이 모인 것이다. 따라서 서로 다른 낱권도 있었다. 이들이 하나로 묶인 뒤에도 어떤 낱권을 경전으로 삼을지 의견이 분분했다. 유대교는 히브리어로 쓰인 사본이 남아 있는 문서를 우선했다. 다시 말해 히브리어로 쓰인 낱권이 있어야 정경으로 인정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기원후 90년경 열린 얌니아 회의 결정이다. 이 규정에 따라 희랍어 사본만 있고 히브리어 사본이 없는 문서는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한편 기독교는 70인역을 근거로 구약성경을 정립한다. 히브리어 경전을 BC 3세기 희랍어로 번역한 것이 70인역이다. 모든 경전이 번역된 것은 아니었다. 정경이 될 수 없다고 판단된 것은 일차적으로 걸러졌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는 성경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타나크는 70인역 일곱 경전을 정경으로 인정 않고 있다. 히브리어 사본이 없기 때문이다. 가톨릭에서 제2경전으로 부르고 있는 성경이다.
타나크 역시 구약성경 사본 가운데 하나다. 성경의 원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어떤 사본이 원문에 더 가까운지도 판단은 쉽지 않다. 다만 오래된 사본이 그만큼 원문에 가깝기에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히브리어 성경 표준은 마소라 사본이다. 유대교 학자들의 작업으로 이루어졌기에 타나크도 받아들이고 있다. 1세기까지 타나크란 말은 쓰이지 않았다. 읽는다는 뜻의 미크라(Mikra)가 사용되었다. 회당에서 경전이 공적으로 읽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그리스도교는 미크라 대신 라틴어 스끄립뚜스(Scriptus)를 사용한다. 직역하면 적힌 것이란 의미다. 이 영향으로 영어에서 성경은 홀리 스크립춰(Holy Scripture)다. 현재도 미크라는 히브리 성경을 가리키고 스크립춰는 라틴어 성경을 뜻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
[2015년 3월 1일 사순 제2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아모스 예언자는 흔히 ‘정의의 예언자’라 불린다. 그의 예언이 당시 지도자와 가진 자들의 횡포를 꾸짖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는 정의를 ‘관계’에서 찾았다. 먼저 하느님께 충직해야 했고 부모와 자녀에게 충실하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성실해야 정의로운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베들레헴 남쪽의 사해 인근도시 ‘트코아’ 출신이다. 양을 치며 무화과나무를 가꾸던 농부였는데 어느 날 부르심을 받는다. 양떼를 몰고 가던 그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내린 것이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아모 7,15) 이 명령에 그는 즉시 삶을 바꾼다. 그러기에 교육받은 예언자가 아니었지만 힘이 있었다. 주님께서 직접 말씀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의 역할은 ‘주시는 말씀’을 전달하는 일이었다.
아모스는 ‘남쪽 유다왕국’ 출신이다. 그런데 그는 ‘북쪽 이스라엘 왕국’에서 활동했다. 정치적으로 갈라져 있었지만 종교적 교류는 있었던 것이다. 당시 남쪽 임금은 ‘우찌야’였고 북쪽 왕은 ‘예로보암 2세’였다. 이 무렵 남북왕조는 정치적 ? 경제적으로 안정을 누리고 있었다. 북 왕조는 국경을 맞대고 있던 시리아(암몬)를 정복했고 남쪽은 위협의 대상이었던 이집트가 내분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정과 번영은 ‘빈부의 차’를 벌어지게 했다. 물질을 위해서는 부정도 서슴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민중에 대한 착취는 줄어들지 않았고 종교생활 역시 속화되어 갔다. 지도자들은 화려한 예절과 외적 행사에만 몰두했다. 사회 전반에 걸친 부패였다. 이러한 때에 아모스는 북 이스라엘을 향해 ‘주님의 말씀’을 외쳤던 것이다.
그는 수도 ‘사마리아’와 성소인 ‘베텔’에서 활동했다. 예언의 핵심은 언제나 ‘정의의 실천’이었다. ‘시나이 산’ 계약을 통해 주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지금의 삶을 ‘바꾸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즉시 멸망할 것이라 했다. 그 예언이 ‘주님의 날’에 대한 선포다(아모 5,18-20).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견제하며 비난했다. 베텔의 대사제였던 ‘아마츠야’는 예로보암 2세에게 사람을 보내 아모스의 추방을 건의했고(아모 7,10), 아모스에게는 남쪽으로 돌아가라고 압박했다. 그러나 예언자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은 더 빨라질 것임을 확신을 갖고 외쳤다. 아모스는 자신의 설교를 기록에 남긴 이스라엘 최초의 작가 예언자로 알려져 있다.
[2009년 11월 22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가톨릭마산 14면]
http://www.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558350&path=201503

12월 초에 구약 시대의 역사를 훑어 보았지만, 많이 잊어버리셨을 것입니다. 그 역사는 몇 번 반복하지 않으면 머리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들여다볼수록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도 많고, 등장 인물도 많고, 갈수록 태산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읽을까요?
역사서를 읽는 첫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역사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예를 탈출기에서 보았습니다. 탈출기에서 하느님께서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고 말씀하셨고, 그다음에는 교리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역사를 겪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역사를 통하여 하느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은, 말하자면 “하느님은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라는 식의 추상적인 개념들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이 체험한 역사를,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그 역사를 후손들에게 들려주고 전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야기로 들려주던 것이 나중에는 문서로 기록되고, 그렇게 해서 역사서들이 시작됩니다. 그 책을 통해서 후손들이,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역사서를 읽는 두 번째 이유는, 역사서들이 사실 기록으로 그치지 않고 인간 역사에 대한 이해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역사서들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역사 기록은, 진공 상태처럼 중립적인 사실들의 열거일 수 없습니다. 일간 신문을 쓴다 해도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은 일들을 기록할 수는 없고, 따라서 선택이 필요합니다.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 가운데 어떤 일들을 더 중요한 것으로 보느냐, 여기에는 이미 역사 해석의 문제가 연관됩니다.
질문. 역사책을 읽을 때에 기록자의 해석이나 판단은 배제하고 객관적인 사실들만을 찾아내려고 해야 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역사책을 읽는 것은 단순히 어느 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유다 왕국이 바빌론에 멸망한 것이 기원전 587년인지 586년인지 열심히 토론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가 그저 그 사실을 알아서 무엇합니까? 오히려 우리는 그 사건이 지금의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말해주는지를 찾아야 하고, 역사 기록자는 그 작업을 도와줍니다. 우리보다 앞서 그가 그 사건들을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서가 작성된 시기라는 문제는 역대기를 읽을 때에 다시 생각하게 되겠지만, 지금부터 역사서들을 읽을 때 늘 염두에 둘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탈출기를 읽는다면, 이집트 탈출 시대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탈출기가 기록된 시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상 이스라엘의 역사 기록은 대개 국가적 위기를 겪을 때에 작성되었습니다. 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과거를 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했을 때, 기원전 6세기 남 왕국 유다가 멸망하고 바빌론 유배를 겪게 되었을 때, 기원전 2세기 마카베오 시대와 같은 어려운 시기에 이스라엘은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그렇게 기록된 역사서들은, 위기에 이르게 된 이스라엘 역사의 모든 사건들이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런저런 인간적 요인들만으로 역사의 흐름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역사의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77,20-21에서는 “당신의 길이 바다를, 당신의 행로가 큰물을 가로질렀지만 당신의 발자국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당신 백성을 양 떼처럼 이끄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끄셨다고, 이끄셨을 것이라고 믿지만, 물속을 걸어가셨으니 발자국이 남지 않지요. 그냥 맨눈으로 역사를 보아서는 하느님께서 지나가신 흔적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역사서들은 그 발자국을 짚어 줍니다. 여기, 이렇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들어오셨다고 가리켜 보여 주는 것입니다. 특히 역사 안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계신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 그렇게 가리켜 보여 주는 역사서들이 필요했습니다.
앞으로 읽을 역사서들의 분류에 대해서만 미리 언급해 두겠습니다.
먼저 형성된 것은 신명기계 역사서입니다. 여기에는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열왕기가 속합니다. 이 책들은 특히 남 왕국 유다가 멸망했을 때, 그 멸망을 배경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신명기 다음에 이어지는 이 책들은, 신명기의 가르침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이미 신명기계 역사서가 있었는데 그보다 훨씬 더 늦은 시기에 다시 작성된 역사서가 역대 기계 역사서들입니다. 역대기, 에즈라기, 느헤미야기를 보통 역대기계 역사서라고 부릅니다. 이 책들은 유배에서 돌아온 후에 작성되었습니다.
그 밖의 역사서들은 “기타 역사서”라고 하는 룻기, 토빗기, 유딧기, 에스테르기, 마카베오기 상하권입니다. 마카베오기는 그래도 다른 역사서들과 비슷한 역사서이지만, 다른 책 네 권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의미의 역사서는 아닙니다. 교훈적인 이야기라고 보는 편이 좋습니다.
역사서들을 읽으면서, 물속에 새겨져 있는 하느님의 발자국들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저희 귀로 들었습니다. 저희 조상들이 저희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들 시대에 당신께서 업적을 이루셨습니다”(시편 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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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기원과 실낙원 이야기(에덴 동산)/정태현 신부
1.창세기가 말하는 고통의 기원:
세상의 악과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기원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문제는 인류의 오랜 숙제입니다. 고금의 모든 철학과 신학, 신화와 민담 등에서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주제이지요. 창세기 저자도 이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루었습니다.
창세기 저자의 결론은 세상의 악과 고통, 그리고 인간의 죽음은 죄 때문이고 죄는 인간이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망각하고 하느님과 경쟁하며 그분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그분과 대등한 존재가 되려 하는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죄를 짓도록 부추긴 제3의 존재를 상정합니다. 이상의 생각을 창세기 저자는 고대 근동인들에게 익숙한 신화와 설화를 활용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 이야기에 담아 전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 2장과 3장의 이른바 '실낙원'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실낙원 이야기는 인간 실존에 대한 신학적 통찰을 전달하기 위해 저자가 만들어낸 가상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고 이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 에덴이라는 낙원은 어디에 있었는가? 말하는 뱀이 있었는가? 하느님은 예전에는 사람처럼 말을 하시고 산보도 하셨는가? 아담과 하와가 따먹은 지선악과는 사과인가 복숭아인가?
인류의 시조는 단일조상인가 복수 조상인가 등등 이야기의 주제와는 상관없는 의문들을 제기합니다. 특히 뱀에 대해서는 성경 전통에서 악마 또는 사탄과 동일시되면서 구약 외경에서 타락한 천사의 우두머리와 동일시되고 요한묵시록에서 악의 화신인 '옛 뱀' 또는 '용'과 동일시됩니다. 따라서 00씨처럼 도대체 왜 하느님은 악의 화신인 뱀을 창조하시어 인간을 죄로 유혹하게 하고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고통과 죽음을 맛보게 하셨는가? 하고 묻는 것은 창세기 저자의 집필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입니다.
에덴 동산은 무위도식하며 완전한 행복을 누리는 이상향이 아닙니다. 아담은 그곳에서 동산지기로서 피조물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곳은 인간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생명나무와 지선악수 사이에서 인간은 선택을 해야 하고 하느님의 명을 어기고 잘못 선택하여 자신과 하느님, 자신과 이웃, 자신과 자연 사이에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자신의 잘못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하느님이나 동료나 피조물에게 전가시킴으로써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고통을 자초하고 피조물까지도 파멸로 이끕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이 끌어들인 파멸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시고 인간을 구원할 방도를 찾으신다는 기쁜 소식도 이 이야기 안에 들어 있습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 는 말씀은 최초의 복음, 또는 원복음이라 불리는 하느님의 자애로운 개입입니다. 구원 역사 전체가 이 실낙원 이야기 안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뱀을 악마나 사탄으로 여기면 왜 하느님이 이런 존재를 만드셨나? 아니면 그런 존재가 하느님과 맞선 세력으로 처음부터 있으면서 선과 악의 한 축을 담당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이 뱀을 인간의 지나친 경쟁심과 탐욕을 형상화한 것으로 여긴다면 이런 의문은 제기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결론적으로 창세기 저자는 인간이 겪는 고통의 기원은 죄에서 비롯되는데, 이 죄는 인간의 허황된 경쟁심과 탐욕에 이끌려 하느님의 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2. 세상의 악과 인간의 고통에 대한 성찰:
세상의 악을 물리적인 악과 윤리적인 악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겠습니다. 여기서 물리적인 악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자연 재해, 전염병, 인체의 고통과 노화 등을 말하고 윤리적인 악은 우리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초래된 불행, 이를 테면 이웃과의 적대 관계, 사회적 혼란, 무절제와 방종으로 생겨난 각종 질병 등을 말합니다.
먼저 물리적인 악으로 꼽는 가뭄, 홍수, 화산 폭발, 자연적 산불, 지진 등은 지질을 새롭게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연현상입니다. 그것 때문에 피해를 받는 생물체에게는 악일지 모르지만 자연계 전체로 보면 악이 될 수 없습니다. 세균으로 인한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생물이나 바이러스가 인체내에서 무질서하게 증식하면 인간을 괴롭히지만 이것들이 없으면 동식물은 생존과 소멸을 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생명체들의 시체는 누가 처리합니까? 인체 내의 통증과 발열도 매우 중요합니다. 인체를 더 큰 질병이나 손상에서 보호하기 위해 꼭 필요한 신체 반응입니다.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자연계의 현상들은 전부 긍정적인 이유와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 그 자체는 본디 전체적으로 균형을 유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조화롭게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탐욕이 이 세상의 질서와 조화를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지구온난화 문제, 오존층의 파괴, 급속한 사막화와 황사와 미세 먼지, 생명체 종(種)의 멸종 등이 그 좋은 예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온갖 여건을 다 마련해 놓으셨는데, 인간의 탐욕과 무절제로 그 좋은 여건을 망가뜨린 다음, 하느님께 그 불행의 책임을 돌리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다른 사람에게 탓을 돌리는 행태와 똑같습니다.
윤리적 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월호 사건, 아프리카나 북한의 기아 문제, 전쟁, 종교 분쟁 등, 00씨가 제기한 세상의 악들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지 하느님이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다 마련해 줄 수는 있어도 아이들 대신 공부해 줄 수는 없습니다. 제 탓으로 시험에 낙방한 다음에 그 탓을 부모에게 돌리는 것은 잘못입니다.
인간은 세상의 악과 인간의 고통 앞에서 그 탓을 하느님께 돌리지 말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개선책을 마련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종교인들이 이런 노력을 기울일 생각은 안 하고 하느님이나 부처님이나 다른 신에게 우리를 세상의 악과 고통에서 구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만 하는 것은 진정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망가져 가는 자연과 인간성을 회복하는 일에 투신하지 않으면 인류 공동체는 물론이요 하느님이 선물로 주신 하나밖에 없는 지구는 오래지 않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묵시록의 재앙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탐욕과 집단적 죄악이 그 재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3. 악인의 득세와 의인의 고통:
세상에서 악인이 모두 득세하고 의인이 까닭없이 고통을 당한다고요? 그리고 하느님이 계시다면 그것을 방치하실 리가 없다고요? 먼저 악인과 의인의 구분이 문제입니다. 누가 구분합니까? 또 무슨 기준으로 구분합니까? 대부분의 인간 안에는 악과 선이 공존합니다. 100% 순수한 악인도 100% 순수한 의인도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 객관적인 악이 존재하고 그 악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한 사람의 행실을 겉으로만 보고 악인으로 낙인을 찍어 영원히 단죄하는 일은 조심해야 합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어느 교부의 말씀을 새겨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다음 악인이 모두 득세하고 의인이 모두 손해를 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람에게 닥치는 모든 일은 다 원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원인을 잘 살펴 대처하면 모두 잘 될 것입니다. 또 득세와 손해, 행복과 불행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도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돈 많이 벌고 권력을 누리며 온갖 사치를 다 누리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가난하고 평범하고 부족한 것이 많지만 화목한 가정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이 제시하신 참 행복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 전혀 다릅니다(마태 5장과 루카 6장).
구약에서야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세 가지 축복으로 현세적인 가치, 곧 장수와 후손과 재산을 내세웠지만 예수님의 경우만 보더라도 이 세 가지 축복에서 완전히 제외되셨지만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기쁨에 넘쳐 행복하게 사시고 그 행복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4. 하느님은 인간의 불행과 행복에 대해 방관자이신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불행과 행복에 민감하셨습니다. 병자를 낫게 하시고 장애인들을 고쳐 주셨으며 슬퍼하는 이를 위로하시고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심지어 죽은 이를 살리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악과 인간의 고통에 맞서 투쟁하셨습니다.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세상의 악에 맞선 그분의 투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느님 나라의 선포'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베푸시는 자애로운 통치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나라는 물질적인 차원과 영적인 차원을 모두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악과 인간의 고통 앞에서 이론적인 답변만을 제시하지 않으시고 직접 당신의 몸을 던지시어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세상의 악은 지나친 경쟁과 탐욕으로 인한 폭력과 거짓에 기인하고 인간의 고통은 이 악이 가져온 결과임을 간파하시고 이를 없애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그분은 진정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러 오신 분입니다. 그분의 삶 자체가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물인 동시에 과제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받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과 용서를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마태 18,23-35 참조). 언제까지나 책상에 앉아서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고 인간에게 고통이 닥쳐야 하나? 하느님은 왜 이런 악과 고통을 허용하시고 방치하시는가? 하느님은 존재하기나 하시나? 이런 한가로운 담론이나 하고 있을 새가 없습니다.
선과 악, 행복과 불행, 생명나무와 지선악수, 생성과 파괴가 혼재하는 역동적인 세상에 뛰어 드십시오. 극심한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들, 참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신기루를 쫓고 있는 사람들, 눈물과 고통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천막을 치고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십시오.
출처: 한님성서연구소 정태현 신부님의 답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