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3주간 토요일] 영원한 생명의 말씀 (요한6,60ㄴ-69)

2025. 5. 9. 오후 4: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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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0일 토요일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영원한 생명의 말씀 (요한6,60-69)

 


1독서<교회는 굳건히 세워지고,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사도9,31-42)

31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32 베드로는 모든 지방을 두루 다니다가 리따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가게 되었다.

33 거기에서 베드로는 애네아스라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중풍에 걸려 팔 년 전부터 침상에 누워 있었다.

34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그러자 곧 애네아스가 일어났다.

35 리따와 사론의 모든 주민이 그를 보고 주님께 돌아섰다.

36 야포에 타비타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이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카스라고 한다. 그는 선행과 자선을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

37 그 무렵에 병이 들어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어 옥상 방에 눕혀 놓았다.

38 리따는 야포에서 가까운 곳이므로, 제자들은 베드로가 리따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사람 둘을 보내어, “지체하지 말고 저희에게 건너와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9 그래서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갔다. 베드로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그를 옥상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그러자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에게 다가가 울면서, 도르카스가 자기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어 준 속옷과 겉옷을 보여 주었다.

40 베드로는 그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다음 시신 쪽으로 돌아서서, “타비타,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가 눈을 떴다. 그리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

41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운 다음,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다시 살아난 도르카스를 보여 주었다.

42 이 일이 온 야포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화답송>시편116,12-13.14-15.16-17(12)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께 나의 서원 채우리라. 주님께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주님 눈에는 참으로 소중하네.

, 주님, 저는 당신의 종. 저는 당신의 종, 당신 여종의 아들. 당신이 제 사슬을 풀어 주셨나이다. 당신께 감사 제물 바치며, 주님 이름 부르나이다.

 

복음<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6,60-69)

60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6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65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6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제1독서 (사도9,31-42)

 

"야포에는 타비타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이 이름은 그리스말로 번역하면 도르카스라고 한다. 그는 선행과 자선을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 그 무렵에 병이 들어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어 옥상 방에 눕혀 놓았다." (36~37)

 

사도행전 9장 36절에서부터 42절까지는 베드로가 죽은 타비타(Tabitha)를 살림으로써 야포(원문에는 '이옵페'; ioppe)지역에서도 이것을 계기로 복음이 전파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사건이 일어난 야포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50km정도 떨어진 항구도시이다. 베드로는 팔레스티나 서부 지역에 복음을 전하던 중에 리따를 거쳐 리따의 북서쪽에 있는 야포에도 이른 것이다.

 

'여제자'라고 번역된 '마테트리아'(mathetria)는 '마테테스' (mathetes; '제자')의 여성형으로서 '여성제자'이다. 사도행전에는 교회에 속한 모든 모두에게 '제자'(사도6,1.2.7; 9,10.19.26; 11,26.29; 13,52)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다.

 

이 명칭은 반드시 예수님에게서 직접적으로 배운 직속 제자와만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고 이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명칭이다. '타비타'라는 여제자도 주님께 대한 헌신적인 섬김을 통해 이렇게 불려지고 있었다.

 

특히 '도르카스'(Dorkas)는 선행('에르곤 아가톤'; ergon agathon; doing good)과 자선('엘레에모쉬논'; elleemosynon; helping poor)하는 일을 맡아 주변 사람들에게서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모범적인 주님의 제자였다.

 

A.D.1세기경 팔레스티나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상당수가 두 개의 이름 즉 아람어(예수님의 모국어)이름과 그리스식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 여제자도 '타비타'라는 아람어 이름과 '도르카스'라는 그리스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것을 보아 그녀는 그리스계 유다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이름은 둘다 '영양'(羚羊; gazelle)을 뜻하는데, 영양은 빨리 달리고 품위가 있어 '은혜로움' 혹은 '아름다움'의 상징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런 이름과 뜻과 같이 누구보다도 선행과 자선에 헌신적이었던 아름다운 심성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의 시신을 씻어 옥상방에 눕혀 놓았다.'

 

'씻어'라고 번역된 '루산테스'(lusantes; they had washed)는 '씻다'를 의미하는 '루오'(luo)의 부종(不定) 과거 분사이다. 이 '루오'동사는 신약 성경에 5회 등장하는데, 문자적인 '씻음'(사도9,37; 16,33; 2베드2,22)과 비유적인 의미에서의 '정결'(요한13,10; 히브10,22)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물론 장례 절차로서 염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또한 타비타가 죽었다는 사실을 의심치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옥상방'으로 번역된 '휘페로오'('hyperoo'; an upper chamber)의 기본형 '휘페로온'(hyperoon)은 '집의 가장 높은 부분','여인들이 물러가 거하는 위층'을 의미하며, 때때로 지붕 위 평평한 곳에 지어진다.

 

시신을 씻는 것은 장사를 위한 일반적인 관례이지만, 그것을 옥상방(다락)에 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아마도 장사되기 전까지 시신을 조용한 곳에 두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옥상방에서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구약 성경의 예언자들의 일로 널리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믿는 사람들이 헌신적이었던 그녀에게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가 내려질 것으로 믿고 미리 예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열왕기 상권 17장 19절에서 엘리야가 사렙타 과부의 죽은 아이를 품에 안고 자기가 머무는 옥상방으로 올라가서 자기 잠자리에 누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한 열왕기 하권 4장 10절과 21절에 엘리사의 옥상방 이야기가 나오는데, 수넴 여자가 위로 올라가 하느님의 사람의 침상에 죽은 아이를 눕히고는 문을 닫고 나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말하자면, 선행과 자선에 힘썼다가 죽은 타비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사도 베드로에 대해서 구약의 엘리야나 엘리사 예언자처럼 생각하고, 예언자들의 옥상방에서 일어난 소생 사건이 타비타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추정은 사도행전 9장 38절에서 사람들이 사도 베드로를 지체하지 말고 자신들에게 건너와 달라고 다급하고 간절하게 초청하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오늘 제1독서는 리따와 야포라는 도시에서 베드로가 일으킨 두 가지 기적을 들려줍니다.

리따에서 중풍에 걸려 팔 년 동안 침상에 누워 있던 애네아스를 고쳐 준 것과 야포에서 선행과 자선을 많이 베풀고 세상을 떠난 도르카스를 다시 살려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이야기는 베드로의 기적을 통하여 그곳에 사는 많은 이가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이야기의 결론은 단순히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주님께 돌아섰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문맥상 ‘믿는다’는 단어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 같지만, 여기에서 사용된 그리스 말 동사는 분명히 그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풍기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이 동사가 ‘믿다’ 또는 ‘회개하다’라는 행위의 결론처럼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참조: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사도 3,19; 26,20]; “믿고 주님께 돌아섰다”[사도 11,21]).

게다가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자신들의 복음 선포 활동의 목적이 바로 사람들을 ‘돌아서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사도 14,15).

 

그런데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체험하고 이미 그분께 돌아섰던 많은 이가 오늘 복음에서 다시 발길을 돌려 주님에게서 떠납니다. 

그분의 말씀이 듣기에 거북하고, 귀에 거슬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믿고 회개한 것처럼 살아가지만, 그 믿음이 자신의 이익에 맞지 않거나, 그 믿음 때문에 자신이 희생해야 한다고 여겨질 때 우리가 보이는 행동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던가요?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가슴에 새기며, 단순히 머리로 믿는 것을 뛰어넘어, 온 마음과 온몸으로 주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우리가 아닌 주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신다.

 

(요한6,60-69)

60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 거북하다(스크레로스)- 용납하기(관용하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예수님은(쉬운 말로)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며 당신의 ‘살과 피에 의해서만 참 생명을 얻을 수 있고’ 그 참 생명은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자격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자들에게만 주어진다.‘ 고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주님의 살과 피가 당신의 백성들에게 부어져야 한다는 말씀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제자들과 유대인들, 그리고 그곳에 모인 무리들은 주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보고 그분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도 기적을 일으켜서 자기들을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속에서 온 힘을 다해 주님을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당신이 죽으셔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그러한 죽음을 통해 생명이 주어진다고 하니까, 제자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용납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6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 주님은 당신의 말씀이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 주님의 말씀이 제동 장치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정해 놓고 그 방향으로의 행진을 위해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주님이 도와주시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이 진리라 했던 그 길에 태클을 걸고 들어오신 것이다.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 주님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아들로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새 생명을 주시기에 속죄 제물로 오셨던(요한3,16) 주님께서 창조 이전에 이미 ‘있었던 곳’ 하늘에 존재하셨던 ‘참 그리스도’ 이심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63 영은 생명을 준다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 예수님의 살, 몸, 피에 관한 모든 말씀이 하늘의 생명을 주는 영이었다는 것이다. 육에 속한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생명을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성령의 부어짐‘으로만 생명은 살아나게 되는 것으로 참 생명은 영에 속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1코린15,45) 45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 생명을 주는 영-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이 씀을 믿기만 하면, 그 말씀에 의해 그들에게 생명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모인 이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 안에서 제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밖에서 부터 주어지는 길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 믿지 않는 자들(복수), 팔아 넘길자(단수)로 유다를 뜻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다. 유다는 믿지 않아 끝내 돌아오지 않은 모든 이들의 대표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65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 새 생명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새 창조의 존재 양식인데(로마8,1-3참조) 죄인이 그 새 창조의 존재 양식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살리시는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은혜를 입어야 하는 그 진리의 복음은(요한14,6참조) 하느님께서 創世前 택한 당신의 백성들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에페14참조) 그들을 부르신 것이다.

 

(로마8,29-30) 29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30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 ‘십자가의 대속을 구원의 진리로 믿어 거저 의롭게 되었다’ 이 말씀을 믿고 간직하여 받는 구원이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 옛 시대의 존재양식, 곧 구약(제사와 윤리)에 의거하여 자신의 생명(힘)을 취하려는 이들은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 없다는 말씀이었기에 떠나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6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 이렇게 훌륭한 신앙고백을 했던 베드로가 왜 주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을 했을까?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도 실망하여 고기 잡으러 낙향(落鄕)을 했을까? 사실 베드로의 모든 고백은 자신이 아닌 하느님께서 알려 주셨던 것이다.

 

(마태16,16-17)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베드로의 그러한 기특한 고백들은 무엇에 대한 증거이겠는가. 불가능한 베드로를 이끌고 가시는 하느님의 손길의 현존(現存)인 것이다. 따라서 많은 제자들이 떠나고 베드로가 주님곁에 남아 있었던 것은 베드로의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이끄심 이었던 것이다.

 

(시편139,7-10) 7 당신 얼을 피해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 얼굴 피해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 8 제가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에 당신 계시고 저승에 잠자리를 펴도 거기에 또한 계십니다. 9 제가 새벽놀의 날개를 달아 바다 맨 끝에 자리 잡는다 해도 10 거기에서도 당신 손이 저를 이끄시고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잡으십니다.

= 다윗이 하느님을 떠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다윗이 가는 곳마다 쫓아가신 것이다. 그렇듯이 지금 베드로를 붙들고 있는 것은 오히려 주님인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기뜩한 고백을 한 후에도 여전히 육의 욕망에 세상에 힘을 쫓고 세상의 권세 앞에 벌벌 떨었던, 그러나 그런 그를 주님께서 붙들고 놓지 않으심으로 그가 위대한 사도로 생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듯이 성도(聖徒, 하느님 백성)는 일단 하느님의 손에 붙들리면 그가 가는 것마다 하느님께서 쫓아다니시기 때문에 어디로 도망갈 수가 없다. 당신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집요함은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은총이신 성령님! 

생명의 말씀으로 주님께서 저희를 붙들고 계심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아멘.

 

 

  

 

 

부활 제3주간 토요일 복음 (요한6,60ㄴ-69)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63)

 

여기서 '육'에 해당하는 '사륵스'(sarks; flesh)는 기본적으로 '살'이라는 뜻이며, 육체 및 혈육을 가진 인간을 가리키는 데 종종 쓰인다.

 

아담의 범죄 이후 타락하여 하느님을 찾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인간, 그리스도를 보고서도 지각하지 못하는 어둠에 속한 자들의 행위와 관련되어 있는 '육'은 언제든지 죄에 굴복하므로, 육체가 있는 곳에 언제나 죄가 있다는 것이 사도 바오로의 기본 입장이었다.

 

'영'이 생명을 주는 것과 대조적으로 '육'(사륵스)은 영적인 측면에서 아무 유익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쓸모가 있다', '유익하다', '돕다', '소용이 되다'에 해당하는 '오펠레이'(ophelei; profits; counts for)는 3인칭 단수 현재 시제인데, 여기처럼 사물에 대해 쓰일 때에는 '그것은 가치가 있다'(it is of value; it is of avail)는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께서는 '오펠레이'(ophelei)를 부정하기 위해 '우크~우덴'(ouk~ouden)이라는 이중 부정을 나타내는 용어를 사용하여 '육'이 구원에 전혀 도움이 안됨을 강조하시고 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육체가 원하는 것을 좇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데, 성경은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며(로마8,6), '육'의 욕망에 이끌려 살면서 육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른 결과가 하느님의 진노를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경고한다(에페2,3).

즉 '육'(사륵스)이 이끄는 데로 따라가는 사람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주장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육'의 무익함을 죄로 기울여지는 성향을 가진 인간의 본성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게서는 인생을 무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 가치를 소홀하게 여기는 육적 가치에 치우치는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계신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설교와 가르침이 매우 특별한 것임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말은'으로 번역된 '레마타'(remata; words)는 '레마'(rema)의 주격 복수로 '말하여진 것들', '예언들', '명령들'로 번역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말씀들'이다. '레마'(rema)는 기본적으로 '분명하게 말하여진 어떤 것', 즉 진술이나 성명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내가 한'에 해당하는 '에고 렐랄레카'(ego lelaleka; I have spoken)는 말하는 주체를 나타내는 1인칭 대명사 '에고'(ego)를 사용하여 말하는 주체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심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렐랄레카'(lelaleka)는 '랄레오'(laleo)의 완료 시제로서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 혹은 주장하신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내가 이미 설교한'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설교하신 그 말씀들이 '영이며 생명'이라고 단언하신다. 당신 자신의 말씀 속에 생명의 영과 생명의 능력이 존재함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것은 본성적인 죄로 말미암아 그 말씀과 성품이 죄와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생명이며 오직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만 할 수 있는 말씀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10,17)라는 성경의 증거는 그 말씀이 지닌 능력이 어떠한지를 잘 드러낸다.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레미타'(remata)가 있는 곳에서는 새 생명의 역사와 영적 갱신이 일어나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68절의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에서도 '말씀'은 '로고스'(logos)가 아니라 '레마타'(remata)가 사용된 것을 볼 때, 이것은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며, 베드로와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계심을 이해하고 있었음은 물론이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20250510일 토요일

[부활 제3주간 토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

 

한 주 내내 이어 온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요한 6장 참조)이 오늘로 끝납니다.

그런데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가 이 가르침에 걸려 넘어집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6,60)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6,66)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게 되었다고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떠난 이들은 여느 군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예수님께서 베푸신 많은 기적을 보고 권위 있는 가르침을 들으며 배운 제자들이었는데도 그분을 떠났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도 떠나고 싶은지를 물으십니다.

그때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6,68-69).

믿지 않는 이들과 믿는 이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 관계는 양팔 저울과 비슷해서 한쪽으로 조금만 쏠려도 기울어집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믿을 만한 것을 많이 보고 알게 되어도 믿음으로 기울어지지 못합니다.

한편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도 믿음과 사랑으로 하느님께 기울어져 그분을 따르고 배워 나가려는 이들이 믿는 이들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이러한 마음을 열어 주시고 비추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6,65).

이 귀한 신앙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김동희 모세 신부)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속옷으로는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음을 깨달아겉옷으로 의롭게 함을 알려준 것

 

독서(사도9,36-42)

36 야포에 타비타라는 여제자가 있었다이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카스라고 한다그는 *선행과 *자선을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 37 그 무렵에 병이 들어 죽었다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어 옥상 방에 눕혀 놓았다. 38 리따는 야포에서 가까운 곳이므로제자들은 베드로가 리따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사람 *둘을 보내어, “지체하지 말고 저희에게 건너와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 둘을 하나로, 곧 인간의 선악의 뜻, 그 두 마음이 아닌 하느님의 뜻으로 보냈음이다.(마르6,7-9 참조)

 

39 그래서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갔다베드로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그를 옥상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그러자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에게 다가가 울면서도르카스가 자기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어 준 *속옷과 *겉옷을 보여 주었다.

= 타비타의 선행, 자선이 이웃들에게 ‘속옷과 겉옷을 지어준 것’이다. (오늘 성경 말씀의 핵심이다)

 

40 베드로는 그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다음 시신 쪽으로 돌아서서, “타비타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그러자 그 여자가 눈을 떴다그리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

= 베드로가 그의 심신으로 고친 것이 아니다.(사도3,12) 그가 간직하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이 고친 것이다.

 

베드로가 태생 불구자를 고쳤을 때~

(사도3,16) 16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바로 그분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또 아는 이 사람을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었습니다. (~아멘)

 

41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운 다음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다시 살아난 도르카스를 보여 주었다. 42 이 일이 온 야포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 죽었던 시신을 다시 살리시는 주님을 믿었을까? 아니면 육이 죽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믿은 것일까? 우리의 신앙의 목적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 (로마8,24) 타비타가 사람들에게 지어준 속옷과 겉옷이 그것을 말한다.

요즘 우리는 구약의 제사가 신약의 혼인 잔치로, 옛 계약이 새 계약으로 결론 짖지 못하면 죽음임을 확인했다. 곧 타비타는 구약의 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을 속옷으로, 그리고 대속으로 이루어지는 신약의 잔치, 그 새 계약을 겉옷으로, 그 둘을 하나의 구원의 복음으로 지어준 것이다.

그러니까 속옷으로는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음을 깨달아, 겉옷으로 의롭게 함을 알려준 것이다. 그것이 참 선행, 자선임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3,21) 21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 아담이 자신의 욕망 때문에 뱀의 선악의 말을 먹고 자신의 알몸을 부끄러움으로 깨닫고, 그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곧 자신의 잘못, 죄를 스스로 해결하려 ‘스스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그것이 율법의 의(義)의 옷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스스로 해 입은 옷은 부끄러운 죄(罪)를 가릴 수 없음으로 하느님께서 그 죄악을 대신 없애줄 속죄 제물로 어린양을 죽이시고 그 남은 가죽으로 손수 옥을 지어 입혀주셨다. 그것이 새 계약의 옷이다. 그것이 구원의 원리인 하느님의 지혜, 사랑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스스로 해 입은, 그 사람의 지혜에서 나온 행위의 옷은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는, 곧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자기 의로움의 속옷인 것이고,(로마10,1-4) 하느님께서 손수 해 입혀주신 가죽 옷을 입는 것, 거저 의롭게 되는 구원의 겉옷이다.(로마3,20-24 참조)

성경은 독자들에게 그 복음을 ‘알아들어라’ 하는 것이다.

 

(마태5,40) 40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이사61,10) 10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복음(요한6,60-69)

60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 무슨 말인가? 앞 56절로 가보자

 

(요한6,56)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 ‘예수님의 살과 피’ 구원의 겉옷(새 계약)으로 알아 들어야 한다. 못 알아들으면 믿음으로 자라지 못하게 되어~

 

6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 가죽 옷을 남긴 어린양의 희생, 곧 구원의 겉옷을 입혀주실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63 영은 생명을 준다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 지금까지 하신 모든 말씀, 곧 당신의 살과 피가 당신의 육(肉)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못 알아듣는다. 그래서 못 믿는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 영(靈)의 구원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몸으로 현세의 자신들의 뜻을 이루려는 욕망 때문이다.

 

65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 자신의 뜻, 소원을 이루어주실 그 예수님이 아니라면 떠날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6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 베드로가 깨달아 믿고 고백한 것이 아니다. (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배반하게 된다.)

 

(마태16,16-17)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너는 행복하다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 베드로는 65절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그를 구원하시려 선택하셔서 예수님께서 보내신 당신의 자녀이기에 참된 고백을 하게 하신 것이다. 곧 그 고백대로 베드로를 이끌어 가실 것을 보여주심이다.

 

(요한21,18)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 내가 받아 입은 겉옷을 이웃도 입게 하는 것, 곧 나의 시간, 재물, 마음 등, 모든 것을 이용해(버리고) 그 겉옷의 효과, 효능인 영원한 생명을 알게, 받게 하는 것, 선행, 자선, 사랑이다.

 

하느님의 지혜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오늘 말씀이 믿음으로 자라나 그리스도의 대속그 피의 새 계약을 겉옷으로 입는 신앙을 살게 하소서저희 발길을마음을 붙드시어 그곳에 서게 하소서그 새 계약에 합당한 삶을 허락하소서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아버지의 나라(옛 계약의 제사)가 아버지의 뜻(잔치의 새 계약)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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