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6월 01일 토요일
[연중 제8주간 토요일] 무슨 권한(權限)으로 (마르11,27-33)

제1독서<하느님은 당신의 영광 앞에 흠 없는 사람으로 나서도록 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유다17.20ㄴ-25)
17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고한 말을 기억하십시오.
20 여러분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아가십시오.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21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22 의심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23 어떤 이들은 불에서 끌어내어 구해 주십시오.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의 살에 닿아 더러워진 속옷까지 미워하더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십시오.
24 여러분이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 주시고 당신의 영광 앞에 흠 없는 사람으로 기쁘게 나서도록 해 주실 수 있는 분,
25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 하느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과 위엄과 권능과 권세가 창조 이전부터, 그리고 이제와 앞으로 영원히 있기를 빕니다. 아멘.
<화답송>시편63(62),2.3-4.5-6(◎ 2ㄷ) ◎ 주님, 저의 하느님,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은 당신을 애타게 그리나이다. ◎
○ 당신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고, 성소에서 당신을 바라보나이다. 당신 자애가 생명보다 낫기에, 제 입술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
○ 이렇듯 제 한평생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 부르며 두 손 높이 올리오리다. 제 영혼이 기름진 음식으로 배불러, 제 입술이 환호하며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
복음<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르11,27-33)
예수님과 제자들은 27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28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31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말할 터이니,
32 ‘사람에게서 왔다.’ 할까?” 그러나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을 두려워하여,
33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연중 제8주간 토요일 (유다1,17.20ㄴ-25)
"여러분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아가십시오.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20)
이미 17-19절에서 이단자들의 출현에 대한 사도들의 예언을 상기시키고 그들의 정체를 밝힌 유다는, 이어지는 20-21절에서 신도들에게 이단들의 미혹에 빠지지 않기 위한 거룩한 순결과 정통 신앙을 가질 것을 권면한다.
베드로 후서나 유다서에서 공통적으로 경계하는 이단은 전(前) 영지주의자들(pro-Gnostics)이었다.
복음이 어느 정도 널리 확산된 1세기 후반에 등장하기 시작한 전영지주의자들은 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신도들의 신앙을 훼손했다.
먼저 교리적으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강생)을 부인하였다. 그리고 윤리적으로 극단적 금욕주의를 주장하든지, 아니면 그와 정반대로 극단적 방종과 쾌락주의를 조장하였다.
유다서를 비롯해서 베드로 후서와 요한의 서신들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이단자들은 윤리적인 면에서는 후자 쪽이었다.
유다서 1장 4절에서도 나오지만, 이들은 도덕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방탕한 생활의 방편으로 악용하고, 교리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에 맞서서, 20절에서 자신을 성장시키는데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갈 것을 권면한다.
여기서 '지극히 거룩한 믿음' 이란, 하느님께 속한 거룩한 것으로(1베드1,15.16) 하느님께로부터 온 선물이다.(에페2,8)
이 믿음은 특히 교회의 전통에 의해 주어진 신앙 내용인 진리나 가르침(교리)이라고 할 수 있는데(사도2,32;20,32), 전승된 신앙의 토대 위에 각자 자신의 신앙적 삶을 형성시킬 뿐만 아니라, 신앙적 공동체를 구현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믿음은 이단자들과 신도를 명확히 구분시켜주는 표지이다.
한편, '성장해 나가십시오' 로 번역된 '에포이코도문테스'(epoikodomuntes)의 원형 '에포이코도메오'(epoikodomeo)는 '~위에' 란 뜻의 전치사 '에피'(epi)와 '건축하다'(로마15,20), '세우다'(마태16,18)라는 뜻이 있는 동사 '오이코도메오'(oikodomeo)의 합성어로서, '~위에 세우다', '쌓아 올리다'(사도20,32; 1코린3,10; 에페2,20; 콜로2,7)라는 뜻이 있다. 본문에서는 명령 현재 분사 능동태로 쓰였다.
따라서, 본문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기초로 하여서 거기에 의지하고 신앙의 진보를 이룩하며, 지어져가는 건축물처럼, 계속하여 자신을 성장시켜 나가라는 말이다. 이단자들을 대적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토대는 바로 거룩한 믿음위에 굳게 서는 것이다.
'성령안에서 기도하십시오'
유다는 둘째로 기도하되, 성령안에서 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것은 유다가 이단자들을 향해 단정지은 '성령을 지니지 못한 자들'(19절)이라는 말과 대조를 이루는 표현으로, 유다는 신도들에게 기도하되, 그들과 친교(통교)하고 있는 성령 안에서 기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진정한 기도는 타종교에서 행하는 것 같은 깊은 명상에 잠기거나 경문을 외우거나 통성으로 크게 기도하는 정도가 아니라, 성령안에서 하느님과 통교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즉 진정한 기도란, 자신의 의지의 발로라기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요한4,23-24 ; 로마8,15.26.27 ; 갈라4,6 ; 에페6,18)
이 시대는 바야흐로 '종교적 관용의 시대'(The Age of Religious Tolerance)로 특정지어지고, 다양한 종교적 주장과 교리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다. 그러나 관용의 정도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유다서는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이단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관용과 포용이 아니라 '영적 싸움'으로써 대응해야 함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연중 제8주간 토요일 복음(마르11,27~33)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30)
여기서 '아니면', '혹은'이라는 뜻을 가진 접속사 '에'(e; or)는 상호간에 서로 배타적인 사물이나 사상을 구별할 때 사용되는 접속사이므로, 마르코 복음 11장 30절의 '하늘에서'와 '사람에게서'는 단순히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배타적인 관계로서 세례자 요한의 진정성을 몯는 말씀이다.
따라서 '하늘에서'라면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참예언자로 취급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요, '사람에게서'라면 그를 거짓 예언자로 취급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리고 원문의 구조를 보면, '하늘에서'에 해당하는 '엑스 우라누'(eks ouranou; from heaven)라는 부사구가 본동사인 '온 것이냐'의 의미로 번역된 '엔'(en; was it)보다 먼저 나오고 있으며, 맨 나중에 '사람에게서'에 해당하는 '엑스 안트로폰'(eks anthropon; from men)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문장 구조는 예수님께서 '하늘에서'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음을 간접적으로 증거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이 증거한 당신의 권세 역시 '하늘에서' 왔음을 시사하시는 것이다.
아 량
예수께서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시고 그에게 어부의 반지 즉 교황권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1) 베드로가 떼부자라서 2) 베드로가 꽃미남이라서 3) 베드로가 몸짱이라서
4) 베드로가 부려먹기 좋은 사람이라서 5) 이중에 답이 없다
왜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선택하셨을까요?
인간적으로 보자면 사실 베드로사도는 그리 훌륭한 분은 아니십니다.
직업은 갈릴레아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던 어부셨고, 예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의 참뜻을 몰라서 헛다리를 짚은 경우도 많을 정도로 지적 능력이 뛰어난 분도 아니었고, 심지어는 자기 스승이 잡혀가는 와중에 세 번이나 자신이 제자가 아니라고 부인할 정도로 강인한 리더십을 가진 분도 아니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그토록 아끼신 것인가? 딱 하나, 베드로사도가 아량이 넓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도자의 덕목으로 ‘아량’을 손꼽습니다. 세계 역사상의 지도자들의 심성을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대제국을 이루고 번성한 지도자들의 특성은 아량이었다고 합니다.
그중의 대표적인 인물을 손꼽으라 하면 이란의 전 왕조, 페르시아제국의 왕이었던 키루스2세 -구약성경에는 ‘고레스’라는 명칭으로 등장하며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 묘사되고 있을 정도로 유대인들에게는 하느님의 사자와 같은 인물로 매우 유명하다-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란 왕궁의 벽화에는 수많은 외국 대신들이 조공물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들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조공을 바쳤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페르시아 왕이 자신들의 땅을 점령하기는 했을지언정 해치지 않고 최대한의 존중을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큰 아량을 보여 주어 구약성경에서는 이 왕이 이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사람이라고 기록하였을 정도입니다.
역으로 역사상 큰 인물이 되지 못하고 악명을 떨친 지도자들의 특성은 아량이 좁은, 그릇이 작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든 것을 네 편, 내 편으로 갈라서 보고 정권을 잡으면 숙청부터 하는 사람들이어서 그 권력이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고 그 이름 역시 오래 기억되지 못하고 역사 속에 묻혀 버렸습니다.
초대 그리스도교는 사실 오늘날의 작은 신흥 종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교회가 거대한 세계적인 교회가 된 이유 중에는 초대 교황 베드로사도의 아량을 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사도가 아량이 넓은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영성심리학에서는 베드로사도가 자기용서를 잘하신 분이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용서 그러면 우리는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받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용서에는 자기용서와 타인에 대한 용서 두 가지가 있고, 그중에 특히 중요한 것이 자기 용서입니다.
심리학자 베브 스몰우드는 자기용서의 효과에 대하여 몇 가지 이야기를 합니다.
우선, 자기용서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케 한다고 합니다.
우리말에 죄지은 놈은 제대로 다리 뻗고 잘 수가 없다는 말이 있는데, 용서받지 못한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불안해서 편안하게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보고 난 후에도 마음이 편치 못하다,
왠지 가식적인 행위를 한 것 같아서 마음이 괴롭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고해신부가 사죄경을 해 주어도,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셨다고 해도 여전히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자기용서가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통하여 편안함을 얻으려면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의 용서를 구함과 동시에 자기용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자기용서는 아량을 넓혀 준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용서받았을 때 마음이 관대해집니다. 특히 큰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대한 용서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대하여 관대합니다.
왜냐? 내가 한 잘못을 용서받고 나면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이 더 깊어지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싶은 마음이 줄어듭니다. 그리고 용서받았다는 안도감을 경험하면서 자신도 다른 사람들을 수용하고 격려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 역시 언제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그 실수를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부드럽게 격려해 주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 줄 아는 아량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폭넓은 대인관계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은 사람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즉, 실수를 저지를 수 있고 약점을 가질 수도 있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자기용서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원만한 성격을 갖추게 되어서 원만한 대인관계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 어떤 곳에 동창신부들이 근처근처에서 사목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신부는 지나치게 엄격해서 자신이 조금이라도 잘못한 것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해 매일같이 자기 성찰을 하고 매일같이 고해성사를 보면서 자기 같은 죄인은 주님을 가까이 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미사 때에도 성체와 성혈을 영하지 못하는 신부였습니다.
그리고 늘 강론 때마다 터럭만한 죄를 지어도 성체를 영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본당 신자들은 아무도 영성체를 못해서 감실 안의 성체가 썩어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신부는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보려고 하면 “사는 게 다 죕니다. 그냥 넘어가세요” 하고 대충. 자신도 실수란 실수는 다 하고 살아서 신자들로부터 빈축을 사기 일쑤인 사람인데, 그래도 사람이 좋은지라 늘 희희낙락하고 살아서 주위 사람들이 저 신부는 속도 없나 하는 놀림을 받는 신부였습니다.
이 두 사람이 차 한 대로 놀러가다가 사고로 함께 죽어서 천당 문 앞에 대기 중인 베드로사도를 면담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베드로사도는 아주 정중하게 평생 참회를 한 신부를 아주 조용하고 깔끔한 천당 산장에 데려다 주었는데, 날나리 신부에게는 아무 말도 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나리 신부는 그냥 자기 마음대로 천당에 갔다가 지옥이나 연옥으로 놀러갔다가 하면서 재미있게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 참회신부가 베드로사도를 찾아와서 항의하였습니다.
“내가 그토록 평생 참회하는 삶을 살았건만 왜 하느님께서 나를 한 번도 찾아오질 않는 겁니까?” 물으니 베드로사도 말하길 “니가 하도 성격이 까칠해서 하느님께서 니가 어려워서 찾지 못하시는 거다.
그리고 네가 가르친 신자들이 자기들 스스로 연옥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아무리 부르셔도 본당신부님이 자기들은 하느님께서 용서치 않으실 것이라 했다면서 연옥에서 나올 생각을 안해서 하느님께서 화병이 나셨으니 책임져라.”
그러자 이번에는 “그럼 왜 저 날라리 신부는 자기 멋대로 살게 두는 겁니까?” 따지자 “니가 그렇게 소갈딱지가 밴댕이 소갈딱지이니 하느님께서 너를 싫어하시는 거다.
저 신부는 두루두루 성격이 좋은지라 천당 총리감으로 만들려고 지금 내세 연수 중이다. 그리고 그 신부한테 교육받은 신자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천당 구석구석에 가더니 화장실 청소니, 궂은일은 도맡아 하고 있어서 복덩이 신부가 들어왔다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신다.” 하더랍니다.
우리는 흔히 완전한 신앙인, 거룩한 성인들은 흠 없는 삶을 사는 완전한 사람들일 것이라 생각하는데 착각입니다.
사람은 빛과 어두움, 이성과 감성, 이상과 욕구가 공존하는 존재인지라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신적 존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용서하고 용서받는 용서의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누가 잘못을 하면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는데, 이런 용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자신을 용서하는 삶을 통하여 아량을 키우는 신앙인 되시길 바랍니다.
홍성남 마태오 신부

마음이 굽으면 큰일이다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존경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옳은 말이지만 그 소리가 듣기 싫은 때도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자기의 기득권이나 권위를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그 말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존경을 받기보다 미움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신이 뭔데 쓸 데 없이 나서서 나의 공든 탑을 무너뜨리느냐?’ 는 마음을 지닐 때가 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예수님시대의 수석 사제들은 ‘하늘로부터 온’ 율법에 의해 ‘이 땅에서’ 합법적으로 성전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세를 받고 그곳에서 성행하는 장사꾼들을 이용하여 경제적 이득을 챙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예수님께서 성전에 나타나셔서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 되어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르11,1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확고한 권위에 심각한 도전을 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바르고 옳은 말씀을 하셨지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법을 찾았고(마르11,18). 어떻게 해서든 꼬투리를 잡으려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르11,28).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하고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요한을 참 예언자로 여기고 있는 군중 앞에서 그의 권위를 깡그리 부정할 수도 없고 더군다나 요한이 하느님으로부터 권위를 받아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진 그들은 자신의 신념이나 소신, 진리보다는 대중의 인기를 중하게 생각하여 “모르겠소” 하는 핑계로 얼버무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권한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암시하면서도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르11,33). 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명확하게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마음의 문이 닫힌 사람에게 아무리 얘기해봐야 엉뚱하게 받아들일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과 그대로 행하려는 실천의 의지가 없으면 하느님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소용이 없는 법입니다. 사물이 굽으면 그 그림자도 굽은 대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굽으면 큰일입니다. “모르겠소”하고 말한 것은 책임을 회피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가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때를 기다리시면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그대로 사시면서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기를 바라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3,20). 당신이 무엇을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의 결단을 내리길 기대하십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께서 삶의 모범으로 보여주신 길을 걷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깊은 침묵으로, 때로는 인내의 행동으로, 때로는 불이익과 미움을 감당하면서 믿음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응답하고 그 권위를 증언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연중 제8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원로들이 예수님의 권한을 가지고 시비를 겁니다.
유다교 최고 권위자인 이들은 자기들 권위의 바탕이 되는 성전에서 예수님께서 보이신 무례한 행동,
곧 상인들을 내쫓으시고 탁자와 의자를 둘러 엎으시는 그분의 결기를 보고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에 감탄하는 군중을 보고 굉장한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자신들만 누리던 지위와 명예를 곧 예수님께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문하시며 오히려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으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정답을 찾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자기들이 고를 답변이 군중에게 어떻게 비추어질지, 그리고 어떤 영향을 미칠지만을 고려합니다.
만일 세례자 요한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그 요한이 ‘내 뒤에 오실 분’이라고 증언하였던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신들의 꼴이 우스워질 것을 미리 걱정합니다.
반대로 요한의 권위를 부정한다면, 그를 참예언자로 여기던 군중에게서 외면당할 처지에 놓일까 미리 걱정합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모르겠소.” 하며 답하기를 피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유다 지도자들은
세상에서 누리는 지위와 명예와 권한에 집착하는 인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가는 우리도 이런 모습에서 자유롭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어렵게 차지한 지금의 자리와, 그 자리에 주어진 권한을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주변 사람을 경쟁자나 적으로 쉬이 생각하여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한 욕망과 집착은 결국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영혼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온갖 종류의 힘과 권한은 어떤 개인에게만 국한된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비롯되며
개인의 영광이 아닌 모든 이의 선을 위하여 쓰이는 봉사의 도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8주간 토요일]
우리의 영원한 보호자 성령님! 신앙의 버팀목이 되어 주셨네.
(마르11,27-33)
27 예수님과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28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 앞 15절에서 사람이 자신들의 소원 성취를 위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 깨끗하고 흠 없는 제물을 사고파는, 그 열심히 강도짓이라 하시며 둘러 엎으신 권한이다.
병행 요한복음에서 “그 성전을 허물어라 사흘(3-세번째 것)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셨고 허물어진 성전이 당신임을 말씀하셨다.(요한2,19-21) 그것은 예수님 당신의 허물어짐, 곧 죄(강도)의 대속인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신 것이며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신 후, 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 모든 것에 대한 권한(權限)은 아버지께 받은 것이다.
(요한10,18) 18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 오늘 성경은 그 하느님의 권한의 예수님을 알고, 믿는 신앙을 사는지 살피라는 것이다.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 왜 세례로 물으실까? 세례(洗禮)는 육적 자아를 끊어 버리고(부수고) 영의 사람, 곧 하늘의 존재로 다시 태어남, 다시 세워지기 위한 하느님의 뜻이었다. 그러니까 성전이신 예수께서 부서지시고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오시는 분을, 우리의 부서짐(세례)으로 받아드려 우리가 세 번째 성전이 되어야 하는 그 뜻, 그 의미를 알고 있는지 묻고 계신 것이다.
(1코린6,19-20) 19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20 하느님께서 *값(대속)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 오늘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들면 성령께서 함께하심이다.
31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말할 터이니, 32 ‘사람에게서 왔다.’ 할까?” 그러나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을 두려워하여, 33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 정말 알고 싶은데, 믿고 싶은데, 정말 몰라서 그런다면 예수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가르쳐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뜻을 고집하기 위해, 사람들을 의식해서 모른다고 하는 그 위선을 부리는 이들에게는 “나도 말하지 않겠다.” 하신다. *우리는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이 오른 길이라 착각한다.
(이사55,8)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 뱀의 유혹, 곧 하느님의 말씀을 그분의 뜻(길), 선악의 말로 받는 거짓 가르침 때문이다.
(마태7,13-15)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 드는 이들이 적다.” 15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 많은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 사람의 뜻을 위한 제사와 도덕과 윤리의 신앙이다. 그 넓은 길은 나의 이름, 영광을 위한 신앙이다. 세상의 것을 위한 신앙으로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 칭찬 받는 인본주의 길이다. 그래서 그 세상 적 나의 부서짐 (버림, 부인)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의지하며 가는 그 좁은 길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으로 보인다.
(1코린1,23)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1코린2,14) 14 그러나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 적은 사람이 가는, 신본주의의 좁은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의 힘의 원리가 사람을 죽이는 힘’임을, 그 세상의 지혜가 오히려 구원을 줄 수 없는 어리석음임을, 세상의 문화가 죽음의 문화임을, 세상의 의로움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아는 이,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 의탁하는 이’만이 갈 수 있는 길이다.
(1코린1,30)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1코린2,4-5) 4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5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서의 말씀처럼 평생, 늘 하느님의 지혜이신 성령을 청해야 한다(청함은 이미 와계신 지혜, 성령을 깨닫는 것)~
독서 (집회51.13-14.20) 13 내가 아직 젊고 떠돌이 생활을 하기 전에 나는 기도 가운데 드러내 놓고 지혜를 구하였다. 14 나는 성전 앞에서 지혜를 달라고 청하였는데 마지막까지도 지혜를 구할 것이다. 20 나는 내 영혼을 지혜 쪽으로 기울였고 순결함(자기부인) 속에서 지혜를 발견하였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 신앙의 삶, 그 길에 늘 함께하시니 감사하며 저희 모두를 의탁하나이다. ~아멘!!!
2024년 06월 01일 토요일
[연중 제8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평생 구도자로서 진리를 탐구하던 유스티노 성인은 참된 진리를 그리스 철학에서 찾으려 하였습니다.
그리스 가정에서 태어나 그 문화 안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그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습니다.
유스티노는 스토아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피타고라스 철학, 플라톤 철학 등 당대에 유행하던 철학 사상들을 두루 섭렵하였으나 만족할 수 없었고, 결국 그리스도 안에 참된 진리가 있음을 깨닫고 그리스도교에 입문하게 됩니다.
유스티노가 그리스도교로 마음이 움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순교자들이 보여 준 용기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용감한 그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악이나 탐욕 가운데 살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제2호교론」, 12장).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하게 신앙을 증언한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태도에 그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철학에서 진리를 찾았지만 순교자들의 모습을 보고 입교하게 되었다는 유스티노의 고백은, 과학이나 다른 세속 학문에서 진리를 찾는 현대인들에게 진리의 복음을 어떻게 선포할 수 있는지 깨닫게 합니다.
바로 용기 있는 순교적 삶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피의 순교는 할 수 없지만, 삶 안에서 순교는 계속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을 모두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가치를 실천하며 신앙을 증언하는 것이 바로 일상의 순교입니다. 이 시대의 세상 사람들은 세속적 가치를 거부하고 영원한 가치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용기에서 진리의 빛을 보고, 주님을 향하여 마음이 움직일 것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