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루카1,39-56)

2024. 5. 30. 오전 7: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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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31일 금요일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루카1,39-56)

 

1독서<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신다.>(스바3,14-18)

14 딸 시온아환성을 올려라이스라엘아크게 소리쳐라딸 예루살렘아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5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16 그날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하리라. “시온아두려워하지 마라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17 주 너의 하느님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18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나는 너에게서 불행을 치워 버려 네가 모욕을 짊어지지 않게 하리라.

 

또는<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로마12,9-16)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여러분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

10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11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12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13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14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15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16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화답송>이사12,2-3.4ㄴㄷㄹ.5-6(6ㄴㄷ) ◎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너희 가운데 계신 분은 위대하시다.

○ 보라내 구원의 하느님나는 믿기에 두려워하지 않네주님은 나의 힘나의 굳셈나를 구원해 주셨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 주님을 찬송하여라그 이름 높이 불러라그분 업적을 민족들에게 알리고높으신 그 이름을 선포하여라

○ 위업을 이루신 주님을 찬양하여라그분이 하신 일 온 세상에 알려라시온 사람들아기뻐하며 외쳐라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너희 가운데 계신 분은 위대하시다

 

복음<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1,39-56)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제1독서(스바3,14~18)

 

주님께서 보호하셨다' 이름 뜻을 지닌 '스바니야'서의 작중 연대를 1장의 머리글을 보면 요시야 임금 통치 시절(B.C.640-609년)로 제시한다.

한 세기 이상 고대 근동 전체를 호령하던 아시리아 대제국이 서서히 몰락해 가는 것을 보면서 유다 임금 요시야는 가나안의 바알 숭배와 아시리아의 천체 숭배를 근절하는 종교개혁을 단행한다(2열왕23,4-14).

 

이런 상황에서 스바니야 예언자는 주님의 권능이 온전히 드러나게 될 주님의 날 선포한다. 스바니야서는 니네베의 파괴를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임금이심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계시한다.

스바니야서의 대부분은 요시야 임금의 통치 시절과 부합하지만 일부 대목은 유배 이후의 상황을 반영한다. 예를들어 오늘 독서의 예루살렘의 재건을 노래하는 마지막 대목 3장 14-20절은 이 책의 다른 대목보다 적어도 한 세기 이상 늦게 곧 6세기 말에 작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스바니야서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①첫째부분(1,2~2,3)은 예루살렘의 주민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신탁이다. 그들은 야훼 종교와 주변의 다른 다신교를 혼합함으써 결과적으로 야훼 하느님의 주권과 권능을 제대로 인정하지도 않고 거기에 존경을 표하지도 않았다. 

 

②둘째부분(2,4-15)은 이스라엘 이외의 다른 민족을 거슬러 선포한 신탁이다. 주님의 주권은 사방의 민족뿐만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모든 신들에게까지도 미친다. 

 

마지막 ③세째부분(3장)은 다시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관심을 집중한다. 먼저 예루살렘 주민을 대표하는 지도자, 통치자, 예언자, 사제들의 잘못을 고발함으로써 그 곳을 단죄한다(3,1-4).

 

대신과 판관들은 백성들을 착취하고, 예언자들은 거짓 예언으로 사람들을 속이며

사제들은 종교 혼합주의로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짓밟는다. 이런 예루살렘의 불의와는 달리 하느님께서는 날마다 올바른 판결을 내리시는 공정한 분이시다(3,5).

 

그분은 당신의 도읍인 예루살렘만은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가르침을 받들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들은 그분의 기대를 저버리고 빗나갔다(3,7).  그래서 그분은 뭇 민족과 더불어 당신의 백성도 없애 버리기로 작정하셨다(3,8~9).   

그러나 주님의 뜻을 받드는 적은 수의 겸손한 이들을 살아남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서 당신의 백성을 새롭게 일으키리라고 하신다. 이들이 바로 '남은 자들'이다.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그들 입에서는 사기치는 혀를 보지 못하리라.  정녕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풀을 뜯고 몸을 누이리라." (스바3,12~13)

주님께서 친히 보살피시고 다스리시는 이 남은 자들을 통하여 주님의 도성 시온은 회복되고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은 온 세상 민족들의 칭송을 받으며,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다(3,16~20참조).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스바3,14) 

여기서 제시되는 '시온의 딸' '이스라엘' '예루살렘 딸' 모두 동격이다. 

'환성을 올려라' '크게 소리쳐라'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점층적 표현을 사용하여 그 기쁨을 매우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환성을 올려라' 해당하는 '란니'(ranni)의 기본형 '라난'(rannan)은 '소리내어 노래하다'는 의미를 가지며 기쁨에 겨워 크게 소리내어 노래하는 것을 말한다. 

'크게 소리쳐라' 해당하는 '하리우'(hariu)의 기본형 '루아흐'(ruah)는 '부르짖다', '외치다', '즐거이 부르다'등으로 번역되는데, 여기서는 부르짖듯 큰소리로 즐거이 노래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란 표현에서 사용된 '즐거워하여라'에 해당하는 '웨알레지'(wealezi)의 원형 '알라즈'(allaz) '기뻐 날뛰다','몹시 기뻐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전쟁의 승리와 같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인하여 잔치를 열거나 격렬하게 움직이면서 기뻐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본절에 사용된 이러한 점층적 표현은 하느님께서 가져다주실 선민의 복락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선민의 이러한 기쁨에 대한 세 단문처럼, 하느님의 기쁨에 대한 세 단문이 3장 17절 하반부에 점층적 표현으로 교차 대구를  이루며 나온다.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 하시리라." (스바3,17)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려 기뻐하시리라' 사실상 같은 개념으로 삼중적으로 강조해서 표현하고 있다. 

이전에 하느님의 분노와 진노의 대상이었던 선민들이 완전히 용서받고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의 사랑과 기쁨의 대상이 됨을 보여주고 있다.

 

원문은 '그가 베푸는 그 사랑 안에서 스스로 만족하시고 기뻐하시며, 조용히 그 사랑을 향유하실 것이다.' 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드러낸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애틋함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시면, 그 사랑에 스스로 빠져서 만족과 기쁨으로  잠잠히 안식하실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이보다 더욱 절실하게 나타내는 표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전능하신  용사의 강한 이미지(스바3,17절 전반부)가 그가 구원을 베푸신 그 자녀를 향한 어버이의 사랑으로 놀랍게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스바3,17절 후반부). 

이러한 선민에 대한 하느님의 기쁨을 묘사하는 표현은 결국 하느님의 선민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장차 선민들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흠없이 거룩하게 성화될 것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스바3,15)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란 표현은 주님의 사죄의 은총 나타낸다.

여기서 '거두시고'로 번역된 '헤씨르'(hesir)는 '제하다', '제거하다'란 뜻의 동사 '쑤르'(sur)의 사역형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어서 행하신 하느님의 주권적 역사를  '쑤르'란 동사를 사용하여 다시 한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 가운데서 '거만스레 흥겨워하는 자들을 치워 버리리라'(11절) 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두렵게 하는 형벌을 제거하기까지 하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그들의 구원을 가로막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제거하신다. 이러한 능력을 지니신 주님만이 진정하고도 완전한 구원을 이루실 수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더 나아가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외부적 위협마저 철저히 제거하신다. 즉 이스라엘의 원수를 쫓아내시는 것이다.

 

여기서 '판결'(형벌)은 주님께서 판결하여 내리시기로 결정하신 심판을 의미하며 '원수'란 심판의 형벌을 수행하기 위해 주님께서 모으셨던 이방의 여러나라와 민족들(8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심판을 끝마치시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 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은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그들은 이 남은 자들에게 위해를 가할 소지가 충분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들을 쫓아내신 것이다.

 

'힘 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스바3,16) 

'두려워하지 마라'는 직설적인 표현에 이어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간접적인 표현이 사용된다. '손을 늘어뜨린다'고 하는 것은 절망이나 낙심의 상태를 묘사하는 히브리적 관용구이다(2사무4,1; 이사13,7; 예레6,24).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그들의 왕으로 계시기 때문에 결코 두려워할 것도 그리고 낙심하거나 좌절할 일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전달한다. 

즉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그들의 왕으로 그들 앞에서 싸우실 것이기 때문에 결코 어떤 대적, 어떤 전쟁에서도 그들은 패하지 않으며, 어떤 원수도 그들에게 해악을 끼치지 못하니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스바3,17) 

'승리의 용사' 해당하는 '낍보르'(gibor)는 전투의 문맥에서는 '용사', '전사'를 언급하고 있다.(여호1,14; 6,2; 판관5,13; 2사무1,19 등).

그러나 이 단어가 하느님께 적용될 경우에는 단순히 '용사'를 언급하는데 그치지 않고 모든 싸움에서 승리를 가져다 주시는 '전능하신 용사'라는 개념을 내포하게 된다.

즉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전능하신 용사이심이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이사10,21). 그는 이러한 능력으로 그의 백성들을 모든 전투에서 구원하시며 승리로 이끄신다.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은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궁극적으로 안전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다. 

 

'축제의 날인양 그렇게 하시리라. 나는 너에게서 불행을 치워버려,  네가 모욕을 짊어지지 않게 하리라.' (스바3,18) 

새 성경의 번역이 좀 잘못된 것 같다. 여기서 선민은 '축제(절기)로 인하여 근심하는 자들'로 묘사된다. 이것은 이방인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신분의 제약으로 '축제'(절기)때마다 그 '축제'(절기)를 지켜야하는 장소였던 예루살렘에 사실상 참여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것임을 전제한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그들은 '축제'(절기)로 인하여 항상 근심하는 처지에 놓일 수 밖에 없었는데(이것이 '불행'이요, '모욕'으로 표현), 본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자들을 모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주님의 구원이 선포되고 성취되는 그 날에 그들은 그들의 거룩한 산 시온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마음껏 주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쁨으로 축제(절기)를 지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느님의 회복의 역사로 인해 그들의 어깨 위에 드리워진 모욕(치욕)의 짐은 벗어지게 될 것이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에인카림에 있는 사촌 언니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5월 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로 정한 것은 '주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6월 24일) 사이에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을 수태한 성모님이 구약과 신약의 교량 역할을 하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선구자 역할을 할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엘리사벳에게서 수태되었기에 구세사 안에서 보잘것 없는 시골뜨기요, 촌부인 그들에게 이루어 놓으신 위대한 주님의 업적을 나누고, 기리고, 감사하고, 찬양하기 위해서 방문한 것이다.

단순히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엘리사벳을 도와주기 위해 봉사하고 애덕을 실천하러 간 것이 아니다.

 

교회가 루카복음 1장 39~56절의 말씀과 더불어 스바니야서 3장 14~18절을 묵상하는 것은 '시온의 딸', '이스라엘', '예루살렘' 자모이신 성교회를 상징하는 성모 마리아로 보기 떄문이다.

죄로 말미암아 멸망과 지옥과 저주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세속사(인간사)를 구원의 역사로 바꾸시는 단초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로서 성모 마리아 엘리사벳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수태한 성모 마리아를 엘리사벳이 '주님의 어머니'('천주의 모친'; 루카1,43)로 알아보고 그 태중의 예수님을 알아 뵌 것은 성령으로 가득차서(루카1,41)가능한 것이다.

 

성모님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의 태안에서 세례자 요한이 성모님의 인사말에 즐거워 뛰놀았다라는 것은 성모님으로 말미암아  아니 성모님의 태중에 계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원죄의 사함을 받았다는 의미가 있다. 

무죄하신 주님께서 인류구원 사업이라는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실 것이기에 이제 악의 세력들은 완전히 패배할 것임을 스바니야서 3장 15절에서 미리 예언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과 엘리사벳처럼 기뻐할 수 밖에 없고, 감사하고 찬양할 수 밖에 없다.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이 둘의 만남은 참으로 기구하면서도 놀라운 하느님의 섭리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던 처녀였지만 성령에 힘입어 아이를 갖게 된 마리아가, 나이가 많아 아이를 가질 수 없었지만 하느님의 손길로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을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상황에서 하느님을 체험하였지만, 자신들의 남은 인생 전부를 그분의 구원 역사를 위하여 내놓습니다.

그러고는 서로 만나 자신들에게 섭리하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따뜻한 인사를 받으며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하여 더 큰 확신과 위안을 얻었을 것입니다.

엘리사벳도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마리아의 모습을 보며 하느님의 섭리에 끝까지 충실하겠다고 다짐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긴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믿음 안에서 서로에게 진정한 위로와 힘이 되어 줍니다.

우리는 현대를 살아가는 또 하나의 마리아이며 엘리사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 안에서 끊임없이 머무르시고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만남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처럼 서로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 주고 있는지요?

한 신앙인으로서 다른 신앙인에게 힘과 용기가 되어 주는 만남이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기억하며, 우리의 만남이 신앙 안에서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 힘과 용기가 되어 주기를 희망해 봅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복음 (루카1,39-56)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어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1~53)

 

루카 복음 1장 51절에서 53절까지는 하느님의 공평하신 속성에 대한 찬양이 이어진다. 

루카 복음 1장 51절의 '팔'로 번역된 '브라키오니'(brachioni; arm)는 단순히 신체의 한 부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야드'(yad)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구약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신명26,8; 시편29,14).

 

이 단어가 '권능'으로 번역된 '크라토스'(kratos; strength; mighty deeds)와 함께 사용되어 하느님의 크고 무한하신 힘과 능력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또한 '교만한 자들'에 해당하는 '휘페레파누스'(hyperephanus; the proud)는 '~위에', '~을 넘어서', '~이상의' 등의 뜻을 가진 전치사 '휘페르'(hyper)와 '나타나다', '자신을 나타내 보이다'등의 의미를 가진 '파이노'(phaino)의 합성어에서 파생한 단어로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지나치게 내보이는 자들',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이것은 루카 복음 1장 50절의 '경외하는 이들'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그 결과 또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그분의 자비가 미치지만, 반면에 그분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흩어지는'심판이 따른다는 것이다.

 

루카 복음 1장 51절은 '주님이신 그분께 맞서는 자들은 깨어진다'(1사무2,10)는 한나의 노래를 연상시키는데, 여기서 마리아는 교만한 자들을 치시는 하느님의 성품을 정확하게 깨닫고, 자신의 모습을 비천한 종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높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이제 루카 복음 1장 52절은 '가난한 이를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이를 거름 더미에서 일으키시어 귀인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1사무2,8) 라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으로서,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통치자들' '비천한 이들', '끌어내리시고'와 '들어 높이셨으며'라는 단어들이다. 

권세있는 자와 비천한 자에 대한 하느님의 공평하신 심판을 다루고 있는 루카 복음 1장 52절은 이 단어들의 대조를 통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먼저 '통치자들'로 번역된 '뒤나스타스'(dynastas; the mighty; rulers)는 '주권자', '통치자' 등을 의미하는 '뒤나스테스'(dynastes)의 복수이므로, '권세있는 자들', '통치자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왕좌'로 번역된 '트로논'(thronon; thier thrones)은 그 통치자들이 앉는 '권좌들', '보좌들'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끌어내리신다'는 것은 비록 세상 가운데서 권세있는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합당치 않는 자들을 얼마든지 그 권좌에서 내리칠 수 있는 능력의 하느님이심을 밝히는 것이다.

 

한편, '비천한 이들'로 번역된 '타페이누스'(tapeinus; the humble)는 '낮은 지위의', '천한', '겸손한'이란 뜻을 가진 형용사 '타페이노스'(tapeinos)의 복수형이므로, '비천한 이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이 단어는 앞의 '통치자들'과 대조를 이루면서 직접적으로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낮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의미하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자들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비록 그들이 세상에서는 낮고 천한 자들일지라도, 하느님 대전에 겸손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을 높이시는 분임이 드러난다.

세상 사람들은 좀 더 높은 지위와 권세를 위해 목숨을 걸지만, 그 모든 것들이 

느님 앞에서는 무의미한 일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대전에 우리가 먼저 겸손한 모습으로 바로 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카 복음 1장 53절에서도 52절과 마찬가지로, '굶주린 이들'과 '부유한 자들', '좋은 것'과 '빈손', '배불리시고'와 '내치셨습니다'라는 단어들의 대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먼저 '굶주린 이들' '부유한 자들'은 복수형으로 일차적으로 경제적 의미에서의 가난한 자들과 부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이렇게 보면 부자들은 그들의 신앙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가 가난하게 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본문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5,3),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마태5,6) 등과 같은 산상설교의 표현처럼, 자신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오직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는 자들 교만하여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 '좋은 것'으로 번역된 '아가톤'(agathon)는 '선한', '적합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형용사로서, 하느님께서 굶주린 이들에게 주시는 '좋은 것'은 바로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임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배불리시고'로 번역된 '에네플레센'(eneplesen; He has filled)은 '채우다', '만족하다'는 의미를 가진 '엠피플레미'(empiplemi)가 원형인데, 이 단어는 단순한 만족이 아니라 더 이상 부족할 것이 없는, 가득차고 넘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 대전에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비우고 주리는 자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로서 부족함이 없이 가득 채워 배부르게 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빈손으로'라고 번역된 '케누스'(kenus; empty away)는 '빈', '헛된', '내용이 없는' 등의 의미를 가진 형용사로서, '좋은 것으로'라는 표현과 대조를 이루는 단어이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의미하는 '케누스'(kenus)는 부족할 것이 없는 부자들이 받게 될 심판의 엄중함을 부각시켜 주며, 두 단어의 대구를 통해 심판을 행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부자라고 할지라도, 하느님 대전에 교만한 자라면 얼마든지 '텅 빈' 가난뱅이로 만드실 수 있는 분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또한 '배불리시고'와 대조를 이루는 '내치셨습니다'라고 번역된 '엑사페르테일렌'(eksapesteilen; he has sent)은 '밖으로'란 뜻의 '에크'(ek) '내보내다'란 의미를 가진 '아포스텔로'(apostello) 에서 유래한 동사로서, '밖으로 멀리 내보내어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매우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스스로 부자라고 하는 자들을 빈 손으로 멀리 내보내시어 가까이하지 않는, 공의로우신 하느님을 드러낸다.

 

 

 

 

 

전능하신 분께서 큰 일을 하셨습니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믿음의 어머니와 함께하는 오늘 어머니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바람이 주님께 전구되고 가슴에 담았던 아픔과 시련의 상처들이 치유되기를 기도합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첫 기적이 어머니의 청을 통하여 이루어졌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어머니의 전구를 통하여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성모님을 통하여 은총을 구하십시오. 성모님을 통하여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준비된 마음 안에 여러분의 모든 바람을 성취시켜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어머니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예수님의 구원능력에 우리의 모든 소망을 맡겨 드려 풍성한 열매를 반드시 얻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뜻을 늘 곰곰이 생각하고(루카1,29), 마음속에 간직하며(2,19.51) 사셨던 성모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기를 기도합니다.

 

일상 안에서 누군가를 찾아갈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또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나서 끝까지 기쁨을 나눈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지 않았는데도 실컷 도와주고서는 그것으로 끝나면 좋은데 나중에 고맙다는 인사를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고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구지 스스로 해 놓고는 서운한 감정을 지니고 화로 가득 채우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음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서둘러 유다 산골에 있는 한 동네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리고 둘은 뱃속에 든 세례자 요한과 함께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사실 엘리사벳은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던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임신을 하였고, 더욱이 마리아의 방문에 성령을 받아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그러자 마리아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며 찬미의 노래를 합니다.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신 하느님, 돌계집의 부끄러움을 없애주신 하느님께서는 두 여인으로부터 찬미를 받으시고 또한 두 여인은 참으로 서로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석 달가량이나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서로가 통하지 않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달프고 미운사람은 봐서 가슴이 아프답니다. 해외 교포사회에서는 ‘손님이 오실 때 반가운 손님, 떠나실 때 더 반가운 손님’이라고 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행복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서로의 만남은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할 때 풍요로워집니다. 함께 나눌 수 있음이 기쁨입니다.

 

누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까? 루카복음 11장 27절 -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이 말씀은 성모님께서 “모든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이라는 것은 예수라는 훌륭한 아들을 낳아서 젖을 먹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행복이란 그렇게 하면 행복해진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러이러 해서 행복하다면 그 행복은 무엇이 저러저러해질 때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참 행복은 주 하느님을 믿고 믿음에 따르는 실천을 하는 것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행함으로써 복되었듯이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것이 곧 행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저러한 조건과 환경이 마련되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주님 안에 있다는 자체가 행복의 순간임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시고 마리아를 통하여 큰일을 하셨듯이 오늘 우리의 부족함도 굽어보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리라 믿습니다.

 

“가장 큰 일은 가장 작은 곳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야 그 잉ㄹ이 큰 일이라는 것이 역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가장 겸손하고 가장 작은 마음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마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런 시선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소중한 것들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모님의 영성입니다”(함께야).

 

이 시간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성모님의 믿음을 간직할 수 있는 은총이 주어지길 희망합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말합니다.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입니다.” 우리도 오직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사는 것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둠으로써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우리의 비천함을 굽어보실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2024년 05월 31일 금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에 봉독되는 독서와 복음은 기쁨과 환호로 가득합니다이유는 주님의 오심’ 때문입니다.

독서는 딸 시온아환성을 올려라이스라엘아크게 소리쳐라딸 예루살렘아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라는 촉구로 시작됩니다.

같은 뜻의 내용이 세 번이나 되풀이되며 최상급으로 기쁨을 표현하는데이토록 열렬한 기쁨의 이유는 이스라엘 임금 주님이신 주 너의 하느님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독서는 그분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시며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에게서 불행을 치워 버려네가 모욕을 짊어지지 않게” 하신다고 선언합니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보다 더한 기쁨과 구원이 있을까요?

복음 또한 조용하였던 즈카르야의 집이 마리아의 방문으로 기쁨에 충만함을 묘사합니다.

마리아의 태중의 아기가 그들 집에 오셨기 때문이고이에 성모님께서는 그 유명한 성모의 노래(마니피캇)로 응답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두려움을 조롱하고 폭력 앞에 용감할 수 있는 길은 주님께서 우리 한가운데에 계심을 알고 깨달을 때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시고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며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시는’ 참된 진리와 자유정의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기쁨은 문제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현존에서 나오는 선물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하느님의 고집을 인간의 고집으로 이기려는 어리석음.

 

1독서(스바3,14-18)

14 딸 시온아환성을 올려라이스라엘아크게 소리쳐라딸 예루살렘아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5 야훼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 하느님으로 두려워 말고, 하느님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은 정의 싣자. 원수 짓을 한 그 죄(罪)의 판결을 그냥 거두실 수 없다. 대신 죄 값을 치루신 그 사랑으로 없애신 것이다. 앞 절로 가 보면~

 

(스바3,10-11) 10 에티오피아 강 너머에서 나의 숭배자들흩어진 이들이 선물을 가지고 나에게 오리라. 11 *그날에는 네가 나를 거역하며 저지른 그 모든 행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때에는 내가 네 가운데에서 거만스레 흥겨워하는 자들을 치워 버리리라그러면 네가 나의 거룩한 산에서 다시는 교만을 부리지 않으리라.

= 부끄러워하지도, 교만을 부리지도 않게 되는 선물, 창조 이전 세우셨던 그리스도를 뜻한다.

 

(마태2,11) 11 (동방박사들은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 = 희생(犧牲)제물인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께서 받으신 황금(임금), 유향(대 사제), 몰약(죽음)이다. 곧 하늘 임금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대 사제로 우리 죄의 희생 예물로 죽으시고, 부활 하셨기에 죄인들이 죄로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고, 내 뜻, 욕망대로 살려고 했던 그 교만(驕慢)도 부리지 않게 된다는 말씀이다. (교만을 계속 부리게 되면 손수 치워 버리심으로~)

 

16 *그날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하리라. “시온아두려워하지 마라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17 주 너의 하느님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 그날, 선물의 의미인 대속(代贖), 그 사랑이 다 이루어질 그날, 그 때, 새롭게 된 우리를 보시고, 하느님께서 기뻐 환성을 올리신다는 것이다. 창조이전 희생 양(羊)으로 세워지셨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罪)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날, 그 때다.

 

(히브10,10) 10 이 에 따라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에페1,7)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18 그래서~ 축제(혼인)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나는 너에게서 불행을 치워 버려 네가 모욕을 짊어지지 않게 하리라.(~아멘)

 

(로마6,9) 9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에게도 죽음이 군림하지 못한다.

 

(로마6,10) 10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신 것이고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 죄의 제사가 그리스도의 ‘단 한번의 죽음’으로 다 이루어 졌으니, 죄(罪)와 관련된 제사는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아멘으로 믿는다면 예수님의 말씀(요한4,24)대로 하느님께 감사, 영광드리는 미사(禮拜)가 있을 뿐이다.

 

(로마6,11-13) 11 이와 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12 그러므로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3 그리고 여러분의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 넘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도구로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 자신의 뜻, 욕망을 위해 스스러ㅗ 죄를 없애려 열심을 부리는 그 ‘자기(自己) 의(義)’ 의 그 교만의 도구가 되지 말고, 오히려 자신 의 죄로, 그 자신의 죄를 용서하신 십자가의 대속, 그 주님의 의(義)를 드러내는 도구(道具)가 되라는 것이다.

 

(로마6,14) 14 죄가 여러분 위에 군림할 수는 없습니다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습니다.(~아멘)

= 그런데 자신의 뜻, 욕망을 위한, 그 교만의 생각으로 계속 제사 등, 열심을 부린다면 하느님께서 다 흩으시고 끌어내려 치워버리신다. 그러나 오해 말자, 그것이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한 하느님의 자비시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께서, 성령의 이끄심으로 그 모든 것을 깨닫고 믿었기에 하느님의 그 자비를 찬양했던 것이다.

 복음(루카1,51-55)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 먼저 교만(驕慢)의 생각을 흩으신다.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부인하지) 않고, 계속 고집을 부리면, 끌어 내리시고 빈손으로 흩으신다. 그러나 그 생각을 버리면(부인하면) 좋은 것, 하느님의 영, 성령으로 높이시고 배 불리신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 하느님의 자비(慈悲)는 영원하다. 곧 우리의 교만을 끝까지 끌어 내리시겠다는 것이다. ‘비천한, 빈손‘ 으로 만드시어 당신으로 채우시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끝까지 우리를 살려 내시고야 마시겠다는  하느님의 고집스러운 사랑이다.

*성경 속 인물들 중에,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이’ 성모님이다. 그래서 ‘레지오마리애’ 활동을 열심히 했고, 다른 단체와 온갖 전례, 성사생활에 열심을 부렸다. 

그러나 성모님께서 깨달은 하느님의 자비, 그 사랑의 깊은 뜻을 몰라 헤매는 무거운 짐 같은 신앙을 살았다. 말씀을 몰랐기 때문이다. 곧 오해된 성모신심에 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내 뜻, 소원을 위한 생각을 흩으시고 내가 고집했던 모든 잘못에서 끌어 내리시고 내치신 후에, 말씀 안에 머물렀고,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청하는 기도를 하고 서야 신앙의 목적지, 방향이 틀렸음을 알았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분의 십자가(十字架)가 거저 주시는 하늘의 의(義), 거룩, 그 진리를 몰랐고, 믿지 않았고, 의지하지 않은, 그 하느님의 뜻을 벗어난 신앙을 살았던 것이다.

말씀 안에 머무르고 서야 그 하느님의 뜻, 진리, 그 사랑을 깨닫고 모든 것에서 자유하게 되었다. 다 온전해 졌다는 말이 아니다. 올바른 진리의 길을 알았기에, 믿기에 앞을 향해, 내일의 영원한 시간, 생명, 그 하느님 나라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다는 말이다.

내 뜻, 욕망(慾望)이 살아나서 자주 넘어진다. 그때마다 나의 죄성 , 불가능을 보며, 확인하며 다시 일어나 달린다. 그러다 또 넘어지고, 또 이러나 달린다. 물론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신 말씀의 힘으로 다.

 

(로마7,21-25)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 23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이렇게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

 

은총이신 천주 성령님!

우리의 삶속에서 오늘도 함께 하시며 말씀의힘인 사랑을 주시니 감사 합니다저희 모두의 마음을 불을 놓으시어 오늘 말씀이 믿음으로 자라나 하느님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하소서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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