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5월 23일 목요일
[연중 제7주간 목요일]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마르9,41-50)
제1독서<일꾼들에게서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야고5,1-6)
1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2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3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4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5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6 그대들은 의인을 단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대들에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화답송>시편49,14-15ㄱㄴ.15ㄷㄹㅁ-16.17-18.19-20(◎마태 5,3) ◎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이것이 자신을 믿는 어리석은 자들과, 그 말을 좋아하며 따르는 자들의 운명이다. 그들은 양들처럼 저승에 버려져, 죽음이 그들의 목자 되리라. ◎
○ 아침에는 올곧은 이들에게 짓밟히고, 저마다 그 모습이 썩어, 머나먼 저승으로 사라지리라. 하느님은 내 영혼을 구원하시고, 저승의 손아귀에서 기어이 빼내시리라. ◎
○ 누군가 부자가 된다 하여도, 제집의 영광을 드높인다 하여도, 부러워하지 마라.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으며, 영광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 ◎
○ “네가 잘한다고 사람들이 칭찬한다.” 사는 동안 스스로에게 말할지라도, 조상들이 모인 데로 내려가,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리라. ◎
복음<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마르9,41-5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4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45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6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47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49 모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연중 제7주간 목요일 제1독서 (야고5,1-6)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2-3)
야고보서 수신자들이 살던 지역의 당시 부자들이 축적한 부의 대상물은 곡식, 호화스러운 옷, 값비싼 금과 은들이었다. 여기서 '재물'로 번역된 '플루토스'(pllutos; richedl wealth)는 당시 부의 척도가 되었던 '곡식'을 의미한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것들 모두가 '썩었고'('세세펜'; sesepen; are corruptes; has rotted), '좀 먹었으며'('세토브로타 게고넨'; setobrota gegopen; are moth-eaten; moths have eaten), '녹이 슬어버렸다'('카티오타이'; katiotai; is corroded; is cankered)고 말한다.
여기서 그들이 축적한 부의 쓸모없음을 표현한 '썩었고'로 번역한 '세세펜'(sesepen)과 '좀 먹었으며'로 번역한 '세로브로타 게고넨'(setobrota gegonen), 3절에서 '녹슬었으며'로 번역된 '카티오타이'(katiotai) 동사 모두가 완료시제이다. 희랍어 문법에서 완료시제는 말하는 시점에서 이미 완료된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재물은 썩었고'라는 것은 불의한 부자들이 자신의 곡식을 가난한 자들과 나누지 않고 그것들을 창고에 쌓아 놓기만 해서 쓸모없이 이미 썩어버렸음을 말한다. 그들에게는 썩어서 버릴 만큼 많은 재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옷은 좀먹었습니다'라는 것은 입지 않고 옷장에 보관해 둔 옷이너무 많아 좀 먹을 정도였다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다. 당시 의복은 재산 중 큰 가치를 차지했는데(마태5,40; 사도20,33) 좀이 먹어 입지 못할 정도로 옷이 많았으며, 자신에게 필요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자들은 그들의 공동체 내의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던 것이다(야고2,2).
그들이 소유한 것들은 모두 영원한 것이 아니고 그저 이 세상에 살 동안 잠시 잠깐 있다가 사라지게 될 아주 일시적인 것들에 불과함에도, 그들은 그것들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을 것처럼 아끼고 또 아꼈다.
그래서 야고보는 '썩었고', '좀먹었으며', '녹슬었으며'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바로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부가 궁극적으로는 전혀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강조하고 있다(루카12,16-21; 사도20,35; 마태6,19-21참조).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부자들은 금과 은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야고보는 그것들이 모두 녹슬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금은 녹이 슬지 않는 물질이다. 여기서 '카티오타이'(katiotai)라는 동사는 분명히 금속이 녹이 스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따라서 3절의 이 표현은 상징적 표시로서, 불의한 부자들이 다량 소유하고 있는 금과 은이 가난한 자들 및 필요한 자들, 그리고 그들이 고용하여 일한 자들에게 나누어지지 않음으로 해서 쓸모없게 되어버렸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좋다.
불의한 부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금과 은이 그것을 주신 하느님의 본래 의도에 맞게 쓰여지지 않았으며, 그런 자들은 하느님 대전에 그들이 인정받는데 어떠한 효용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 녹이'에 해당하는 '호 이오스 아우톤'(ho ios auton)은 '그것들의 녹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사용된 복수 인칭 대명사는 그들이 활용하지 않은 재물들이 많았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되고'에 해당하는 '에스타이'(estai)는 직설법 미래 시제 동사로서 확실하게 발생하게될 미래의 사실을 지칭한다.
부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금과 은의 녹이 그들에게 증거가 될 것이라는 표현은 후에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실 때에 바로 그것들이 부자들을 고발하고 단죄하는 결정적 증거가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그것들이 불처럼 그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이라는 직유법의 표현은 최후의 심판 때에 그것들로 인해 부자들이 철저하게 파멸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특히 여기서 '불'로 번역된 '퓌르'(pyr; fire)는 하느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상징이며 형벌의 도구로서 지옥불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결국 불의한 부자들은 부정하게 축적한 부 때문에, 약자들을 착취하고 남을 짓밟으면서 쌓은 재물 때문에, 또한 주위에 그들의 도움을 호소하는 자들을 외면해 버리고 자신들의 배만을 채우는 데 소비한 물질 때문에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그들의 재물은 그들을 파멸에 빠지도록 재촉할 뿐, 결코 그들을 구원할 수단이 못된다는 말이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이 구절의 시제는 부정 과거 시제이므로, 미래에 있을 어떤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야고보가 이미 목격한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마지막 때'에 해당하는 '에스카타이스 헤메라이스'(eschatais hemerais; the last days)는 야고보 사도가 살고 있던 초대 교회 당시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마지막 때' 앞에 붙어 있는 전치사 '엔'(en)은 '~을 위해' 보다는 '~안에'로 번역해야 하고, 신약 성경 여러 곳에도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진술이 있기 때문에 (사도2,17; 2티모3,1; 히브1,2; 2베드3,3), 야고보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종말이라고 칭했으며, 바로 그런 때에 불의한 부자들이 재물을 쌓았음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종말은 실로 주님을 찾아야 할 때이며, 그 때 이 세상의 형상과 발자취는 지나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1코린7,25-31참조). 종말은 하느님의 심판이 찾아오는 때이며 불시에 닥치는 성질의 것이다.
연중 제7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이 섬뜩한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적잖이 당황하곤 합니다.
너무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들지요.
솔직히 나약한 인간이 죄짓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닐 텐데, 그럴 때마다 몇 개 되지도 않는 주요 신체 부분들을 정말로 하나둘 잘라 버리라는 말씀이신지 묻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의도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전달하고자 하는 바(‘죄짓지 않아야 함’)를 과장되게 표현해서 듣는 이들에게 강렬한 효과를 주는 수사학적 방법을 택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손과 발을 잘라 버려라.’, ‘눈을 빼 던져 버려라.’와 같은 다소 충격적인 표현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보다는 죄와 관련한 우리의 내적 성찰을 더 강화해서 죄짓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체의 주요 부분 가운데 특히 손과 발, 그리고 눈이 언급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인간의 온갖 행위를 돕는 ‘손’은 악행을 저지를 때에도 가장 많이 사용되는 부분입니다.
인간의 공간적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발’은 우리를 악행의 현장으로 이끄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시각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눈’은 악행을 저지르고자 하는 다양한 유혹이 들어오는 창구가 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선을 위하여 쓰도록 이 모두를 손수 우리에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손과 발, 그리고 눈은 지금 자기 역할에 충실합니까?
아니면 악행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까?
주님 보시기에 선하고 좋은 역할만 하는 아름다운 손과 발, 그리고 사랑스러운 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에게 들어 올려 바치는 거룩한 예물들은 모두, 영원한 규정에 따라, 내가 너와 너의 아들들, 그리고 너와 함께 있는 너의 딸들에게 준다. 이는 너와 너의 후손들을 위하여 주님 앞에서 맺은 영원한 소금 계약이다.” (민수18,19)
[연중 제7주간 목요일] (마르9,41-50)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국제회의에 참석할 때 마다 소금의 위력을 새삼 실감합니다. 벌써 일주일째 소금간이 제대로 되지 않은 밋밋한 음식을 먹으니 살맛이 안날 정도입니다. 먹는 재미가 사라져버리니 삶이 시들시들합니다. 머릿속은 온통 매콤 짭짤한 골뱅이 무침이며, 고등어 조림, 김치찌개 등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지당한 말씀을 하십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소금의 존재 이유는 짠맛을 내는 것입니다. 짠맛이 사라져버린 소금은 한 마디로 무용지물입니다. 그것을 대체 어디에 쓰겠습니까? 아무 쓸데없는 짠맛 잃은 소금을 어딘가 저장해두는 것도 웃깁니다. 어딘가 쌓아 놓는 것도 이상합니다. 볼 때 마다 짜증이 날 것입니다. 트럭에 실어 황무지나 계곡에 갖다 버릴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 묵상하고 있노라니 덜컥 겁이 납니다. 자주 우리는 짠맛을 잃은 소금처럼 무의미한 삶을 살아갑니다. 삶이 충만하고 신명나야 하는데, 그저 물에 물 탄 듯 아무런 재미도 의미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짠맛을 잃은 소금 같은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한 그리스도인 안에 반드시 들어있어야 할 알맹이요 핵심,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짠맛을 상실한 소금 같은 존재입니다.
한 교육자의 마음 안에는 제자들의 성장을 돕고자 하는 열정과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들의 영혼을 구하고자 하는 사랑과 헌신의 마음으로 가득 차있어야 하는데, 그 대신 무기력과 냉랭함과 무관심으로 가득하다면 그는 짠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한 사목자의 삶 안에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할 복음전파를 향한 사목적 열정과 양떼를 향한 측은지심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대신 명예나 부, 권력, 안락한 생활에만 몰두한다면 그는 짠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우리 영혼을 주님의 성령으로 충만하도록 비워내야겠습니다. 비워진 내면을 빛나는 보석으로 가득 채워나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모든 음식의 맛을 돋우는 소금 같은 인생, 누구나 환영하는 맛 갈진 양념 같은 인생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딱딱한 회의의 윤활유 역할을 해주시는 인도 신부님이 잠 깨우기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로마에 온 관광객이 운전기사에게 묻습니다. 저기 저 교회는 무슨 교회인가요? 최근에 들어온 교회인데 이름 이 '하나이신 하나님의 교회'의 교회입니다.
그 옆에 있는 건물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저건요?" "저건 요즘 사람들이 많이 가는 오순절 교회입니다."
"그 옆은요?" "저 교회는 제 칠일 안식일 교회입니다."
"그 옆에 제일 큰 건물은요?" "육 일간 무신론자 교회입니다."
"뭐 그런 교회가 다 있나요?" "그 교회는 바로 천주교회입니다."
일주일 가운데 엿새 동안은 무신론자로 지내다가 하루만 그리스도인으로 지내는 사람들을 빗댄 뼈있는 농담이네요.
소금 같은 그리스도인, 참 그리스도인은 육 일간 무신론자, 하루만 신자가 아니라 일주일 내내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겠지요.
2024년 05월 23일 목요일
[연중 제7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오늘 복음과 독서의 표현들은 꽤 위협적이고 과격합니다.
‘죄를 짓게 하는 요소’를 없애라는 표현을 “잘라 버려라.”, “빼 던져 버려라.” 등으로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말 ‘아포콥토’(자르다)는 무엇인가를 잘라 내어 없어지게 하는 행위를 일컫고, ‘에크발로’(-로부터 빼내서 던지다) 또한 무엇인가를 멀리 던져서 주변에 존재하기 않게 하는 행위를 일컫습니다.
모두 점진적 과정이나 단계와는 다른 ‘급진’과 ‘극단’을 부각시킵니다.
악의 요소를 단호하게 끊어 내고 분리시키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소모적이고 무모한 시간 낭비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영성 생활에서 만나는 뜻밖의 복병은 나날의 작고 사사로운 변화입니다.
엄청난 비극과 급작스러운 불행에는 꺾이지 않는 강한 힘으로 용감히 대처하면서도 “소금”처럼 자잘한 일상의 습관에는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사소하고 평범한 습관쯤이야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고칠 수 있다고 착각하고, 그렇게 스스로 속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서는 손, 발, 눈 등 일상의 행동과 연결된 신체 부위를 말하며 그러한 사소함과 평범함이야말로 우리를 악에 노출시키는 의외의 도구임을 경고합니다.
적당한 선행이나 기도만으로 삶과 신앙이 저절로 깊어지지 않습니다.
일상적이고 사소한 죄의 도구로 쓰이는 손과 발, 눈을 조심하는 데에 단호한 결단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단호히 맞설 필요가 있습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연중 제7주간 목요일]
먼저 받아야(알아야) 할 수 있다.
복음(마르9,41-50)
4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 물은 말씀을 뜻하며, 그 말씀을 먹은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그리스도의 지체로 받아들여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하늘의 복(償)을 받는 것까지 묵상 했다. 곧 큰 계명의 실천인 이웃 사랑이다.
(1요한5,1-6) 1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 사랑은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 의로운 의무라 했다. 곧 내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하늘의 용서, 자유, 거룩한 생명을 구원 받았다면, 다른 하느님의 자녀인 이웃들에게도 그 구원의 복음을 전해서 살게 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을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며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큰 계명을 지키는 실천이다.
2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3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4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 세상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적대(敵對)하며 그리스도의 대속, 그 의(義)로 얻는 하늘의 복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믿기에 하늘의 용서, 구원, 그 복을 거저 받는다.
5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6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 물은 생명수인 말씀을, 피는 대속인 피의 새 계약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말씀이다. 그 새 계약의 말씀이 구원의 진리임을 진리의 성령께서 증언(證言)하신다.
(로마8,1-2)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이 성령의 증언, 자유의 법을 믿지 못하고 율법(제사와 윤리)에 묶여 신앙을 무거운 짐으로 지고 힘들게 살고 있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할 뿐, 자유, 구원을 줄 수 없기에(로마3,20) 이웃에게 율법 신앙을 주는 것은 죄를 짓게 해 죽이는 것이다.(로마10,1-4)
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44)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46)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 말씀을 법으로 보고 행한 눈과 손, 발을 곧 ‘나의 율법의 행위를 잘라 던져버리라’ 하시는 것이다. ‘잘라 버려라, 던져 버려라’는 말은 할례(割禮), 세례(洗禮)의 단어다.
그러니까 율법의 제사와 윤리를 열심히 지킨 그 자기 의(義)를 위한 신앙을 잘라 던져버리고 성령께서 증언하시는 용서, 구원의 진리, 곧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으로 하늘을 살라는 것이다.
(히브10,19-20) 19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하늘)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20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
= 하늘 길, 문을 가로 막고 있던 휘장을 십자가의 대속, 그 죽음으로 찢으셨다.(마르15,37-38) 그 새롭고 살아 있는 길인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구원의 말씀이다. 곧 소금 같이 영원히 변질되지 않는 구원의 계약인 것이다.
49 모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 잃지 않고 믿음으로 간직했을 때 짠맛, 곧 용서로 다시 살아나는 구원이다. *간직하고- 율법에 흔들려 밖으로 흘리지 말고 마음에 지키면 하늘의 평화를 얻는다. 그 것이 실행(킵)이다. *킵- 밖으로 흘리지 않고 안에 지키다.
(민수18,19) 19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에게 들어 올려 바치는 거룩한 예물들은 모두, 영원한 규정(계명)에 따라, 내가 너와 너의 아들들, 그리고 너와 함께 있는 너의 딸들에게 준다. 이는 너와 너의 *후손들을 위하여 주님 앞에서 맺은 영원한 *소금 계약이다.”
(2역대13,5) 5 너희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소금 계약으로, 다윗과 그 자손들에게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권을 영원히 주신 것을 알지 않느냐?
(2열왕2,19) 19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어르신께서 보시다시피 이 성읍은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나빠서 이 땅이 생산력을 잃어버렸습니다.”
= 좋은 곳, 성당(교회)은 다니나 하늘의 물,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못해 생산력, 곧 하늘의 생명을 얻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2열왕2,20-22) 20 이 말에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가져오시오.” 하고 일렀다. 그들이 소금을 가져오자, 21 엘리사는 물이 나오는 곳에 가서 거기에 *소금을 뿌리며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 물을 되살렸으니, 이제 다시는 이 물 때문에 죽거나 생산력을 잃는 일이 없을 것이다.’” 22 그러자 그 물은 엘리사가 한 말대로 되살아나서 오늘에 이르렀다.
= 구약에서 예언(預言)된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되살아나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피의 새 계약이다.
(골로4,6) 6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정답고 또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누구에게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아야 합니다.
= 소금으로 맛을 내야한다. 곧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을 새롭고 살아있는 길로, 구원의 진리로 주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하늘의 평화를 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먼저 말씀으로 새롭고 살아있는 길인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을 알아야한다. 그래야 그 피의 새 계약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말씀을 피의 새 계약으로 주지 못하고, 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으로 준다면 열심히 지킨 그 자기 의로움으로 하늘의 생명을 잃는, 서로(피차) 영원한 죽음에 갇히게 되는 큰 죄악을 범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열심히 지킨 그 자기 의로움을 부자(富者)로 비유했다.
독서(야고5,5-6)
5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6 그대들은 의인(예수)을 단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대들에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 부자(富者), 율법(律法)의 의로움이 십자가의 대속, 그 의(義)를 죽인 것이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성령의 눈과 귀가 되게 하소서. 그래서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 소금 계약을 진리로 믿고 행(전)하는 손과 발이 되게 하소서. 그래서 서로 하늘의 용서, 자유를 살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