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5월 22일 수요일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예수님 이름으로 (마르9,38-40)
제1독서<여러분은“주님께서 원하시면”하고 말해야 합니다.>(야고4,13-17)
13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14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15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16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
17 그러므로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
<화답송>시편49,2-3.6-7.8-10.11(◎마태5,3) ◎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모든 백성들아, 잘 들어라. 세상 모든 사람들아, 귀를 기울여라. 천한 사람 귀한 사람, 부유한 자 가난한 자 다 함께 들어라. ◎
○ 뒤쫓는 자들이 악행으로 나를 에워쌀 때, 그 불행한 날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랴? 그들은 자기 재산만 믿고, 재물이 많다고 자랑한다. ◎
○ 사람이 사람을 어찌 구원하랴? 하느님께 제 몸값을 치를 수도 없거늘. 그 영혼의 값 너무 비싸, 언제나 모자란다, 그가 영원히 살기에는, 구렁을 아니 보기에는. ◎
○ 정녕 그는 보리라, 지혜로운 이도 죽고, 어리석은 자도 미욱한 자도 사라진다. 재산을 남들에게 남겨 둔 채 모두 사라지리라. ◎
복음<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9,38-40)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제1독서 (야고4,13-17)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15)
앞의 야고보서 4장 13절, 14절에서 자신의 뜻대로만 사는 인생의 어리석음에 대해 경계한 야고보는 4장 15-17절에서는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할 성도의 인생 자세에 대하여 피력하고 있다.
야고보서 4장 15절에서 야고보는 계획을 세우려고 할 때 하느님의 뜻을 고려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도리어'로 번역된 '안티'(anti)는 '~에 대항하여', '~에 반대하여'라는 뜻으로 하느님을 고려하지 않고 인생의 계획을 세우는 자들의 교만한 태도(13절)에 반대하여 참되고 겸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지를 대조적으로 나타내는 기능을 한다.
즉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때 반드시 '주님의 뜻 안에서' 세워야 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글 새 성경에서 번역하지 않은 단어 '에안'(ean)은 '만일'(만약)이라는 의미의 조건 접속사로서 성도는 항상 '주님께서 만약 원하신다면'이라는 전제 조건을 가지고 인생 계획을 세워야 함을 강조한다.
이것은 반대로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으신다면 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서간 왕래를 할 때 그들은 편지에 'D.V'라는 문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을 나타내는 라틴어 'Deo Volente'의 약자이다.
다시 말해서 초대 교회의 신심있고 경건한 성도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이 구현될 수밖에 없음과 또한 구현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사도 바오로 역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미래의 계획이라도 하느님의 뜻에 종속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신념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에페소의 성도들에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여러분에게 다시 오겠습니다"(사도18,21)고 말했고, 또한 코린토의 성도들에게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여러분과 함께 지내고 싶습니다"(1코린16,7)라고 말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절대 주권이 하느님께 있다는 사실을 삶 속에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어떤 계획을 세우고자 한다면 먼저 하느님의 뜻을 고려하는 것을 전제하고 선행해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주님의 뜻 안에서 적극적으로 이것저것을 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또한 그것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뜻을 배제한 채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채우고자 계획하는 자들과 달리 자신이 얼마나 덧없고 허무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하느님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의탁하는 겸손함으로 살아야 한다.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현대인들은 대개 바라는 목표를 이루고자 빈틈없이 계획을 세우고, 그렇게 정해진 시간표대로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데 익숙합니다.
‘시간이 없다’, ‘바쁘다’는 표현을 습관처럼 사용하는 사회에서 정해진 시간을 잘 쪼개어 쓸 줄 아는 사람은 칭송을 받지만, 시간을 허투루 보내거나 낭비하는 사람은 한심한 취급을 받습니다.
이 세상의 삶은 죽음으로 한정된 시간이기에 그 가치는 더욱 귀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귀한 시간이 주로 무엇을 얻으려는 데 소비되는지 들여다보면, 많은 경우 현세에서 가지고 싶거나, 되고 싶거나, 누리고 싶은 것을 얻고자 사용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주님의 선물임을 일깨워 줍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현세의 시간을 언제까지 허락하실지 우리는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고귀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물론 먹고 사는 일도 중요하고, 각자 종사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며 살 권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현세의 가치만 좇으면서 주님께 받은 한정된 시간을 모두 써 버린다면, 오히려 그것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약속된 하느님 나라를 구하는 일, 곧 기도와 말씀 읽기, 이웃 사랑 실천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내세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행복은, 현세에서 우리가 어떻게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의 마지막 말씀을 기억하며 더 ‘좋은 일’에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내어 주면 좋겠습니다.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7주간 수요일 복음 (마르9,38-40)
"막지 마라."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 자신의 모습과 공동체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가 얼마나 복음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가를 반성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 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마도 요한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잘했다고 칭찬듣기 위해서 말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라고 잘못된 요한의 행동을 꾸짖으셨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요한의 행동의 기준은 어떤 사람이 옳은 일을 하였는지 착한 일을 하였는지 또는 예수님의 일을 하였느냐가 아니고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냐 아니냐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우리 편이냐 아니냐가 그 판단의 기준이다.
어떤 사람이 좋은 일을 하는지 나쁜 일을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편이냐 아니냐가 중요하다면 우리편이라면 나쁜 일을 하더라도 괜찮고 다른 사람은 좋은 일을 한다하더라도 우리 편이 아니기 때문에 하면 안 된다는 논리는 얼마나 이기적인 발상인가?
개인적인 이기주의와 집단적인 이기주의가 자신을 망치고 사회를 망친다.
우리 사회를 보라. 모든 판단의 기준은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안 되는가, 우리편인가 아닌가? 에 달려 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구조는 대부분 지방색, 학교의 선후배 관계, 당리당략에 좌우되는 일이 많다.
무엇이 정의이고 진리이고 선인지가 중요하지가 않은 사회가 되어 버렸다. 모든 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면 좋은 것이고, 우리 편이면 눈 감아 주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신앙인이면 무엇하는가? 모든 생각과 행동의 기준이 일반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데. 신앙인의 생각과 행동의 기준은 항상 복음적 이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이 또는 상대방이 하는 일이 복음적인가 아닌가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굳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 없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이익이 아니라 또 자기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에 따라서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 자신이 복음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즉 우리의 이익과 편가르기 때문에 악을 저지른 일이 얼마나 많은가? 남에게 피해를 준 일이 얼마나 많은가?
요한이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 내는 것을 보고 그를 막은 이유가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그 일을 못하게 막았다고 하였다.
개인적인 죄의 근원이 하느님의 자리에 자기(나)를 놓았다면 요한의 잘못은 그리스도교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셔야 하는데 요한은 그 자리에 "저희"를 갖다 놓은 것이다. 교회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따르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곳이다. 인간이 인간을 따른다는 것은 불행을 재촉하는 것이다. 예수가 아니라 "우리"를 따르게 할 때 또 다른 분열이 일어나는 법이다.
본당에서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은 되고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안되고 하는 서로 편을 가르는 일은 없는가? 본당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성가대는 성가대끼리, 성령기도회는 성령기도회끼리 등등 편을 가르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런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한다.
끼리끼리만 모인다면 그리고 자기들이 하는 일만을 인정한다면 끊임없이 남을 나쁜 쪽으로 판단해야 하고 경계해야 한다. 이것은 또 하나의 적을 만들고 스스로 자신들만의 울타리 속으로 갇히는 것이다. 우리는 갇히지 말고 밖으로 나와야 한다.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교류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로 개방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에게 "막지 마라."고 대답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교회는 아무리 작은 공동체라도 항상 보편적이고 모든 세계를 향해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 개인주의를 깨닫지 못하면 선한 일도 이기주의의 명목으로 한다.
요한의 자세에서 우리가 반성해야할 또 다른 것은 특권의식을 버리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악령을 쫓아내는 일을 하셨던 것과 같이 좋은 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 요한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다. 그 이유는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이외에 자기들만의 특권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마귀 쫓아내는 일은 제자들인 자기들에게만 주신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즉 자기들의 특권인줄로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마귀를 쫓아내고 있으니 기분 나쁜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특권을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자기들은 마귀를 쫓아낼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내용은 예수 시대가 아니라 사도들의 시대에 쟁점으로 떠오른 문제였다. 사도단이나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교회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이가 예수의 이름으로 일할 때, 특히 성령의 은사를 받아 일하고 있다고 주장할 때 그를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는 실로 미묘한 문제였다.
초대 교회에서 이러한 사건은 흔히 벌어졌으며 다양한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이에 대해 마르코가 전하는 답변은 분명하다. 교회는 독점되어서는 안 되고 배타적이 되어서도 안 된다. 요한처럼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반대하는 자세는 예수를 따라야 하는 제자의 본분을 잃어버린 자세이다.
다시금 어제 복음에서 묵상했던 "받아들임"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 가를 생각하게 한다. 즉 넓은 마음으로 좀더 대범하게 교회 울타리밖의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특권의식을 버려야 한다.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하면 안 된다."는 특권 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편가르는 식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와 함께 다니고 안 다니고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는가가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을 도와주는 일이다. 하지 못하게 막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 못하게 막았다는 것은 순전히 집단 이기주의에서 나온 발상이다.
우리도 이런 특권 의식을 갖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은 "막지 마라."고 말씀하셨다.
선은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그것이 비록 우리의 것이 아니더라도.....
가톨릭은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즉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뜻이다.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뜻이다. 계속해서 타종교와도 대화의 장을 만들어 가야하고 다른 사상과도 대화의 장을 활짝 열어 놓아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란 옹졸한 사람이 아니다. 선한 이에게나 악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같이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는 사람이고 모든 이를 포용하는 사람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나의 적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고 비록 생각이 다를지라도 또 가톨릭 신자가 아닐지라도 그를 포용하고 그가 하는 좋은 일을 칭찬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려면 우선 나의 생각부터 개방된 사고 방식이어야지 자기 생각으로 갇혀있는 옹졸함을 갖고서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알을 깨고 새가 나오듯이 우리의 좁은 낡은 사고를 깨어버려야지만이 새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고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좀 더 큰 그릇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좀 더 개방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까지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이다. 그것이 곧 "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는 것 "이다.
그것이 머리로만 하던 신앙 생활에서 몸과 마음으로 하는 참다운 신앙생활로 옮겨지는 과정이다.
저희라는 이기주의를 넘어라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라고 하시며 제자들에게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 것을 당부하시고는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모든 것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자신들만을 위해 똘똘 뭉친 폐쇄적인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피아 집단이나 조직 폭력단도 자기들끼리는 피를 나눈 형제처럼 서로 극진히 위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우애는 자기 집단의 경계를 넘지 못합니다. 제자들의 삶은 이들과는 달리 이웃에 대한 사랑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요한이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하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막지마라.”고 이르셨습니다. 그 이유는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는 것이고,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비록 당신 제자의 무리에 속하지 않더라도 인간구원이라는 당신의 사명에 협조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긍정적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나와 조금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막아서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정말 막아야 할 것은 막지 않고 도리어 막지 말아야 할 것에는 많은 제한을 두는 현실입니다.
인간은 편 가르기를 좋아해서, 어떤 사람이 자기편에 속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좋은 일을 해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하면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편 가르기를 합니다. 그러나 저희를 따르는 사람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면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협조하는 사람이라면, 내편 네 편 가르지 않고 존중하는 개방된 자세를 갖춰야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라는 것은 집단 이기주위를 낳을 수도 있고, 사실 교회는 “나”나“저희”를 따르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야지 성직자나 수도자, 영적지도자에 매이면 불행해 질 수 있습니다.
각 본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단체가 있는데 독선과 편 가르기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본당, 저희 단체, 저희 공동체....’,성경을 공부하면서도 공부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서로 편 가르기를 하는데, 이는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성가대는 성가대끼리, 꾸르실료는 꾸르실리스타끼리, 성령기도회는 성령기도회끼리, 빈첸시오회는 빈첸시오회끼리, 레지오 마리애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끼리..등등 편을 가르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스스로 적을 만들고 울타리 안에 갇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권을 움켜쥐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폐쇄적인 집단이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개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막지 마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선한 이에게나 악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같이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는 사람이고 모든 이를 포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적을 만들 것이 아니라 그를 받아들이고 그가 하는 좋은 일을 칭찬해 주는 넉넉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해야 할 형제로 보셨습니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그야말로 미래의 고객입니다.
가톨릭’은 보편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있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뜻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 신부
2024년 05월 22일 수요일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하느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은 그러한 일이 제자들 안에서 일어났음을 알려 줍니다. 제자들은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 ‘어떤 사람’이 자기들 무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 보려” 하였다고 보고합니다. “우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좋은 일도 금지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우리’의 영역을 단단하게 다지고자 누군가를 배제하고 소외하는 일은 사실 빈번히 벌어진 비극이었습니다. 이 부당함을 알고, ‘하느님 백성’으로서 참다운 교회의 모습을 되찾고자 제안된 것이 ‘시노달리타스’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교회를 모독하는 자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배제되거나 소외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배제와 소외야말로 하루빨리 배제하고 소외하여야 할 절대 악인 것입니다.
오늘 독서 또한 고착된 이념이나 판단 기준으로 사람을 배제하지 말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열려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우리의 ‘허세와 자랑은 악한 것’입니다.
‘우리’라는 말에는 배타성이라는 금기가 은밀히 숨어 있습니다. ‘우리’를 유지하고자 견고한 철벽을 치고 그 어떤 이질적 존재도 들어오지 못하게 감시함으로써, 또 다른 소외와 변방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대와 공동체가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대신하는 권력이 될 때 교회는 결코 복음적일 수 없습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연중 제7주간 수요일]
말씀이 일하시게 하라.
복음(마르9,38-41)
38ㄱ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가 쫓겨난 곳, 하느님의 뜻(일, 나라)이 이루어진 곳이다.(루가1,31-33. 11,20참조)
38ㄴ*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 예수님은 구원의 진리(眞理)시다. 하느님만으로 곧 하느님의 말씀만을 진리(眞理)로 먹고 의탁(依託)하며 살아야 하늘에 오를 수 있는 피조물(被造物)인 인간들이 마귀(뱀)의 거짓 가르침에 속아 스스로의 선악(善惡)의 생각으로 열심을 부리며 자신들의 힘으로 하늘에 오를 수 있다고, 또 세상의 재물(財物)과 명예(名譽)가 평화(平和)를 준다고 착각하며 세상의 노예(奴隸)로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다.
모두 마귀(魔鬼)의 거짓에 속아 열심히 죄(罪)를 짓고 있는 것이다.(에페2,1-3참조)
(1요한3,8) 8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1요한5,18) 18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 곧 말씀을 진리(眞理)로 먹고 마시고 입은 그 사람은 악마(惡魔)가 손을 댈 수가 없다. 죄(罪)로 죽음의 심판(審判)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께서 그 사람의 모든 죄(罪)를 십자가(十字架)에서 대속(代贖)하시고 없애신, 그 새 계약(契約)을 구원(救援)의 진리(眞理)로 갖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중요(重要)한 것이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重要)한 것이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일을 아직 성령(聖靈)의 깨달음을 받지 못한 제자(弟子)들은 자신들의 뜻, 스스로의 판단(判斷)으로 막으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소속(所屬)되어, 자신들의 모임을 따라야한다고 오해(誤解)한 것이다.
(1코린3,6-7) 6 나(바오로)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7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 개신교는 가톨릭에 구원이 없다고 하고, 가톨릭은 개신교에 구원이 없다고 한다.(바티칸 공의회 이후 바뀌었다) 현재도 그런 가르침을 주는 말을 들었다. 제다들의 잘못된 가르침이다. 모두 착각(錯覺)이다.
예수님의 이름, 곧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宣布)되는 곳, 말씀을 진리(眞理)로 받아들여 믿는 이들이 있는, 그 어는 곳이든 그곳이 구원(救援)이 이루어진 하느님나라(天國)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 무관심과는 다른 것이다. 무관심(無關心)은 죄(罪)다.
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 물은 말씀을 뜻한다. 말씀을 먹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지체(肢體)로 서로 받아들여, 하나 되어 하늘의 복(福), 상(償)을 받으라는 말씀이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앞 절(節)로 가보자~
앞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 같은 형제다. 높고 낮음이 있을 수 없다.
35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 그리스도 신앙(信仰)은 꼴찌가 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첫째는 가장 큰(높은, 일등) 사람?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첫째다. 예수님께서 그런 첫째를 말씀 하셨겠는가. 예수님은 당신께서 죄인(罪人)인 우리를 섬겨 주셨듯이, 우리 또한 섬김의 삶을 살아, 당신과 함께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그 첫째 사람을 말씀하신 것이다.
(마태20,28)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요한19,32)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강도, 죄인)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십자가(十字架)에 달린 두 강도(强盜) 중에~
(루가23,39-43) 39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40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42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첫째사람)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 자신의 죄(罪)를 인정(認定)하고 주님께 돌아와 주님의 자비(慈悲)를 청(請)하는 첫째 사람이다.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첫째 사람이다. 그것이 회개(悔改)다.(메타노이아-가던 길에서 돌아오다.)
*그러니 해야 한다. 꼴찌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러나 안 된다. 그래도 해야 한다. 시작(始作)해 보자, 연습(演習)으로 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 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그럴 힘이 없을뿐더러 마귀(魔鬼)가 불가능하다고 속삭이기 때문에 더욱 힘들다.
그래서 매일매일 말씀 안에 머물며 기도(祈禱)해야 한다. 말씀을 기억(記憶)하고 되새길 때, 그 말씀이 힘을 주시며 끌고 가신다.
(1테살2,13) 13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1코린12,6) 6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에페3,20) 20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
(필립2,13) 13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 말씀은 창조(創造)다. 말씀은 살아계신 하느님이시다.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분의 계약(契約)의 약속(約束)이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나를 버리는 그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소서. 이미 우리의 승리를 이뤄 놓으신 말씀(1코린5,17)에 의탁할 줄 알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