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간 금요일]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 (마르10,1-12)

2024. 5. 23. 오후 7:5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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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4일 금요일

[연중 제7주간 금요일]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 (마르10,1-12)


   


1독서<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십니다.>(야고5,9-12)

9 형제 여러분,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심판받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십니다.

10 형제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끈기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11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관하여 들었고, 주님께서 마련하신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은 동정심이 크시고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

12 나의 형제 여러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그 밖의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 할 것은 .”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십시오.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화답송>시편103,1-2.3-4.8-9.11-12(8)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끝까지 캐묻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가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네.

 

복음<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10,1-12)

예수님께서 1 유다 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다시 그들을 가르치셨다.

2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하고 되물으시니,

4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6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제1독서 (야고5,9-12)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관하여 들었고,주님께서 마련하신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은 동정심이 크시고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  (11)

 

'사실'로 번역된 '이두'(idu; '보라')는 야고보서 5장 10절과 연관성을 가지면서 야고보서 5장 4절의 경우와 동일하게 수신자들의 관심을 인내의 두번째 모범인 욥에게로 집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끝까지 견디어 낸'으로 번역된 '휘포메이난타스'(hypomeinantas)의 원형 '휘포메노'(hypomeno)는 '~아래에'라는 의미의 전치사 '휘포'(hypo)와 '머무르다'(마태10,11)라는 의미의 '메노'(meno)의 합성어로서 어떤 상황 아래에서 피하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것, 무거운 짐 아래에서  버티고 견디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며, 여기서는 과거 분사형으로 쓰여  시련 가운데 흔들림없이 자신의 믿음을 고수한 자들을 가리킨다.

고난이 엄습해 올지라도 도망가지 않고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인내하는 자들을 야고보 당시의 성도들이 행복하다고 칭송한 사실을 나타내기 위하여 '우리는 행복하다고 합니다'에 해당하는 '마카리죠멘'(makarizomen; we count them happy; we consider blessed those who)이 현재 직설법으로 쓰였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설교에서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5,11.12)라고 말씀하셨다.

또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22)고 말씀하셨다.

 

고통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끝까지 온전히 인내하는 자에게는 주님의 축복이 뒤따른다. 이것은 신실한 주님의 약속이다.

따라서 우리 역시 고통 가운데서도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인내한다면, 구약의 예언자들과 동일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관하여 들었고, 주님께서 마련하신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구약의 예언자들에 이어 인내의 가장 대표적 인물로 당시 '욥'을 들고 있다. 그러나 '욥'은 야고보서 5장 9절의 '원망하지 마십시오'라는 야고보의 진술에 위배되는 인물이다. 

왜냐하면 '욥'은 자신이 처한 비참한 환경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 불평을 과도하게 늘어 놓았던 인물이기 때문이다(욥기7,11-16; 10,18; 23,2; 30,20-23). 

그러한 '욥'을 어떻게 인내의 좋은 예로 들 수 있는가? 야고보가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야고보는 비록 하느님께 불평을 늘어놓는 자라고 하더라도 그가 끝까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믿음으로 자신의 고통스러운 환경을 잘 인내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성도들에게 모범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사실 '욥'보다 더 극심한 고난을 겪은 자도 없고, 그 극심한 고난을 이겨낸 후 그보다 더 많은 축복을 받은 자도 없다. 따라서 '욥'은 고난 중에 인내한 모범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한편 야고보는 수신자들이 주님께서 '욥'에게 마련하신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에이데테'(eidete; have seen)는 '너희가 보았다'라는 뜻인데, 이것은 두 눈으로 본 것처럼 뚜렷이 알고 있다는 표현이다. 

사실 '욥'에게 주어진 결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고난을 인내로 이겨낸 후 잃어버린 물질을 두 배로 돌려받았고, 또 열 자녀를 다시 새롭게 얻었으며(욥기42,12-17), 하느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더 깊이 알고 그분과 더 친밀하게 통교하게 되었다(욥기42,5).

 

'욥'에게 회복된 가시적인 물질적 축복이나 비가시적이지만 하느님과의 친밀한 통교의 축복은  궁극적으로 주님의 강생 후 고난을 인내한 성도들이 받게 된 축복의 예표가 되는 것이다. 

비록 고통을 믿음으로 인내한 것에 대한 보상이 욥과 같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나타나지 않고, 스테파노 부제처럼 순교로 끝난다고 할지라도(사도7,55.56) 궁극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축복을 하늘에서 반드시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믿음으로 인내한 자에게 궁극적으로 축복을 내리신다는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고통을 믿음으로 감당하는 데에 있어 너무나 큰 힘이 된다. 

하느님의 심판과 보상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무고한 고통을 기쁘게 인내할 이유가 전혀 없다(히브12,2; 로마8,18.25; 묵시21,4). 

그리스도교는 현세적 기복 신앙을 조장하지는 않지만, 내세의 삶을 약속하는 희망의 종교인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야고보가 제시한 예언자들과 욥의 예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선하심을 확신하며 믿음에 굳게 서서 고난 중에 인내하도록 하기에 충분한 동기 부여가 되는 것이다.  

 

'과연 주님은 동정심이 크고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 

야고보는 '욥'에게 주신 하느님의 축복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규명한다. 이 구문을 이끄는 접속사 '호티'(hoti)는 이유를 나타낸다. 주님께서 '욥'에게 주신 결말이 축복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그분이 동정심이 크고 너그러우신 분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여기서 '동정심이 크고'라는 의미로 번역된

 '폴뤼스플랑크노스'(pollyspllangchnos;very pitiful)은 '많은', '큰'을 의미하는 '폴뤼스'(pollys)와 '창자', '자비심', '동정심'을 의미하는 '스플랑크논'(spllangchnon)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형용사로서 '자비심이 흘러넘치는', '동정심이 많은'이라는 의미이다.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에 해당하는 '오익티르몬'(oiktirmon;  of tender mercy)도 비슷한 의미를 전달한다.  하느님께 대한 이와 같은 진술은 구약 성경의 일관된 사상이다. 

 

탈출기 34장 6절에는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라고 시나이 산에 현현하신 하느님께서 스스로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으며, 다윗 역시 시편 103장 8절에서 "주님께서는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신다."고 노래하였다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오늘 복음은 이혼을 금하는 우리 교회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주요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혼인이 가지는 참된 의미와 신비를 묵상하게 하는 예수님의 소중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완고함’ 때문에 모세가 이혼을 용인해 준 것이지, 본디 하느님 뜻은 그렇지 않다고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창세기의 말씀(1,27; 2,24)을 직접 인용하시면서 태초부터 계획된 혼인의 신비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이처럼 남녀가 혼인을 통하여 이루는 결합은 하느님께서 창조 때 남자와 여자의 인간성 안에 부여해 놓으신 심오한 계획이 비로소 온전히 실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삼위이신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시듯,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 또한 서로의 사랑을 통하여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게다가 부부의 사랑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가 나누는 사랑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교회를 위하여 온전히 자기 자신을 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부부가 서로에게 내주어야 하는 사랑의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부부 생활이 서로에게 상처받거나 이해받지 못할 때도 많고, 실망도 많이 하기에 순탄한 여정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듯합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주는 사랑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렇지만 부부가 함께 걸어가는 여정에 늘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이기적인 ‘나’를 지우고 ‘우리’로 하나가 되어 가는 시간 속에, 부부의 사랑은 더욱 단단해지고 그 사랑은 서로를 신앙인으로 더욱 성장하게 하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7주간 금요일 복음  (마르10,1-12)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에게 결혼은 왜 하느냐? 고 했더니 “사랑하기 때문에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항상 예뻐해 주고 모자라는 것을 채워주는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한다.”며 어떤 이가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결혼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고 말했는데 살아가면서 그것도 체험해 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좋은 면만 봤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은 면도 감싸줄 수 있는 마음을 키워가겠다고 다짐하는 그를 그 약속 변치 않기를 기원하며 마음 다해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면 계약에 충실할 수 있고 계약에 충실함으로써 또 사랑하게 된다는 깨우침을 얻기를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마르10,7-9)고 하시며 결혼의 신성함과 존엄성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부부, 즉 합당하게 결혼한 부부는 두 인격체 이면서도 동시에 한 인격체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일심동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일부다처제, 남편이 아내를 일방적으로 쫓아내는 소박 등 남존여비사상이 빚어낸 결혼, 이혼, 재혼은 가부장이 다스리는 세상에서는 가능할지언정 이제 하느님이 다스리는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에서는 혼인의 단일성, 즉 ‘일부일처’, 그리고 혼인의 불가 해소성 즉 ‘이혼 불가’, 혼인의 성사성 즉‘부부애’, 창조사업의 직접적인 참여, 다시 말하면 ‘자녀의 출산’을 중요시하여 가르칩니다. 그런데 요즘 결혼하는 부부 2쌍 중 1쌍이 이혼한다는 통계가 나오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족함을 채워주고 계약에 충실하며 사랑하겠다는 다짐은 어디 가고 그리 쉽게 헤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때는 사랑했던 사람이고 아이들의 어머니요, 아버지임이 분명한데 그들을 뒤로 하고 차라리 몰랐던 사람보다도 더 악하게 마주서고 있으니 그러고도 복을 받을 수 있을까? 염려됩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닌지요? 어려움이 몰려올 때 그래도 사랑해야 할 나의 동반자임을 다시 한 번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시다. “말로나 혀끝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1요한3,18).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커지면 그에 상응하는 법률이 만들어 집니다. 우리는 서로를 갈라서게 하는 일이 아니라 일치를 도모하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결혼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예레31,3)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써 한 몸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20240524일 금요일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 오늘 독서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창조 때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실 때 의도하셨던 불가 해소성과 단일성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맺는 모든 관계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이기에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됩니다.

사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관계없이 살 수 없습니다. 이미 둘이 하나가 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와 진심 어린 관계를 맺으면 서로의 생명이 살아나고, 그러한 관계를 맺지 못하면 죽은 상태처럼 되고 맙니다.

관계의 상호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신실함입니다.

영어에서(다른 많은 서양 언어에서도) ‘신실함을 뜻하는 fidelity는 라틴어 fides(믿음, 신앙)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가 신앙의 선물임을 어원에서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관계가 하느님의 선물이요 은총인 이유는, 이 관계를 통하여 진정한 구원에 이르는 과정을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여정은 수난과 고통, 죽음과 부활을 반드시 포함합니다.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이나 불화, 후회와 좌절은 우리가 걷는 구원 여정에서 요구되는 감정인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 여정을 걷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은 행복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모든 관계의 시작과 끝은 하느님께서 주관하실 것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일 [연중 제7주간 금요일]

 

*다시다시~

 

복음(마르10,1-12)

1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을 떠나 유다 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으로 가셨다그러자 군중이 *다시 그분께 모여들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다시 그들을 가르치셨다. 2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는 곳에는 늘 그분을 적대하는 세상과 하나 된 율법자들이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의 길, 뜻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루가3,34 요한15,19-20 참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4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 당시 모든 남자들이 여자를 무시하며 쉽게 버리는 못된 완악(完惡)함으로 이혼(離婚)이 성행했었다. 그래서 함부로 버리지 못하도록 하느님께서 이혼장을 허락하신 것이다. 곧 하느님은 인간들의 이혼보다 다른 차원의 이혼을 막으시려 하신 것이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 하느님은 남자와 여자, 둘로 분리해서 창조하셨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 한 몸이 되었을 때 비로소 사람, 곧 존재가 되는 것이고 그 둘이 하나가 되는 과정을 통해서 당신의 창조의 목적, 뜻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 창조에 이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혼장(離婚帳)은 ‘케리투투’호 ‘분리하는 책’이라는 뜻이다. 곧 성경을 선(善)과 악(惡), 그 둘로 분리해서 보고 행해 버리면 이혼이라는 것이다.

구약에 머물러 율법의 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을 열심히 지키는 그 사람의 의로움이 참(眞)이라 여기며, 신약의 예수그리스도의 대속, 그 새 계약, 구원의 의로움으로 건너가지 못해 그분과 하나가 되지 못하면 구원과 분리가 되는 이혼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남자, 신랑이신 예수님과의 이혼(離婚)이 되는 것이다. 첫 창조는 하늘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救援), 곧 우리의 새 창조를 예표한 것이다. (요한3,7 2코린5,17 갈라6,15 참조) 그러므로 구원자(남자)와의 이혼은 절대 불가 한 것이다.

오늘 말씀을 인간들끼리의 이혼만을 말한다면 그리스도와의 이혼을 막지 못하는 것이다. 하늘의 용서(容恕), 자유(自由), 의(義), 생명(生命)을 받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이혼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로마7,1-4) 1 형제 여러분여러분이 율법을 아는 사람들이기에 말합니다율법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 위에 군림한다는 사실을 모릅니까? 2 혼인한 여자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율법으로 그에게 매여 있습니다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남편과 관련된 율법에서 풀려납니다. 3 그러므로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남자에게 몸을 맡기면 간통한 여자라고 불리지만남편이 죽으면 그 율법에서 자유로워져다른 남자에게 몸을 맡겨도 간통한 여자가 되지 않습니다. 4 나의 형제 여러분여러분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대속덕분에 율법과 관련해서는 죽음으로써다른 분 곧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분의 차지가 되었습니다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위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 율법(律法)의 죄를 대속으로 완성하시려 죽으셨다 사흗날에 되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차지가 된 우리다. 그렇게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뜻)이다.

 

(에페5,24-32) 24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5 남편 여러분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아내를 사랑하십시오. 26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말씀과 더불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7 그리고 교회를 티나 주름 같은 것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며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8 남편도 이렇게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9 아무도 자기 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시는 것처럼 오히려 자기 몸을 가꾸고 보살핍니다. 30 우리는 그분 몸의 지체입니다. 31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둘이 한 몸이 됩니다.” 32 이는 큰 신비입니다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 하느님의 뜻인 새 계약, 그리스도의 대속, 그 하늘의 의(義)와 분리된 인간의 뜻, 의를 위한 율법(제사, 윤리)교회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열심한 행위의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야 한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다시 받아 주신다. 다시 받아 주시는 사랑, 자비(慈悲)의 신랑이시다.

 

(호세3,1-2) 1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다시 가서다른 남자를 사랑하여 간음을 저지르는 여자를 사랑해 주어라주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해 주어라그들은 다른 신들에게 돌아서서 건포도 과자를 좋아하고 있다.” 2 그래서 나는 은 열다섯 세켈그리고 보리 한 호메르와 한 레텍으로 그 여자를 사들였다.

= 호세아와 예수는 같은 이름이다.(아람어, 헬라어) ‘은 열다섯 세겔, 그리고 보리 한 호메르와 한 레텍’은 예수의 몸값인 ‘은돈 서른 닢’이다.(루가26,15)

민족을 위한 자기 의(義)의 ‘독립투시였던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값이다.

 

화답송(시편103,1-4) 1 내 영혼아주님을 찬미하여라내 안의 모든 것들아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여라. 2 내 영혼아주님을 찬미하여라그분께서 해 주신 일 하나도 잊지 마라. 3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는 분. 4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로 관을 씌워 주시는 분.

= 다윗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신의 영혼에게 명령한 말이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우리의 죄로저주로 죽으신 신랑 예수님을 잊지 않게 하소서그분을 주인으로 얼마나 믿고 의지하며 사는지 보게 하소서오늘 다시그 주님께 돌아와 다시 그분과 결합되게 하소서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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