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5월 09일 목요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근심은 기쁨으로 (요한16,16-20)
제1독서<바오로는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고, 회당에서 토론을 하였다.>(사도18,1-8)
1 바오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다.
2 거기에서 그는 폰토스 출신의 아퀼라라는 어떤 유다인을 만났다. 아퀼라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모든 유다인은 로마를 떠나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에 자기 아내 프리스킬라와 함께 얼마 전에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이었다. 바오로가 그들을 찾아갔는데,
3 마침 생업이 같아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다. 천막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생업이었다.
4 바오로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토론하며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5 실라스와 티모테오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온 뒤로, 바오로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고 증언하면서 말씀 전파에만 전념하였다.
6 그러나 그들이 반대하며 모독하는 말을 퍼붓자 바오로는 옷의 먼지를 털고 나서, “여러분의 멸망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민족들에게로 갑니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7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나 티티우스 유스투스라는 사람의 집으로 갔는데,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다. 그 집은 바로 회당 옆에 있었다.
8 회당장 크리스포스는 온 집안과 함께 주님을 믿게 되었다. 코린토 사람들 가운데에서 바오로의 설교를 들은 다른 많은 사람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
< 화답송>시편98,1.2-3ㄱㄴ.3ㄷㄹ-4(◎2) ◎ 주님은 당신 구원을 민족들의 눈앞에 드러내셨네.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
○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
복음<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16,16-2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16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17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서로 말하였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18 그들은 또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독서 (사도18,1-8)
"그 뒤에 바오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폰토스 출신의 아퀼라라는 어떤 유다인을 만났다. 아퀼라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모든 유다인은 로마를 떠나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에 자기 아내 프리스킬라와 함께 얼마 전에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이었다. 바오로가 그들을 찾아 갔는데, 마침 생업이 같아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다. 천막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생업이었다." (1-3)
사도행전 17장에서는 바오로가 유럽 선교의 시발점이었던 필리피를 떠나 테살로니카, 베로이아를 거쳐 아테네로 가서 복음을 전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렇게 유럽의 동부에 위치한 주요 도시들을 방문한 바오로의 제2차 선교 여행은 유럽 선교의 시발점이 되었다.
한편 본문은 바오로가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에 이르렀다는 간단한 내용이 나온다.
당시 코린토는 도자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 뿐 아니라, 북쪽 그리스와 필로폰네소수스 반도 사이와 지협을 통과하는 무역로를 관장하는 무역의 중심지로서,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호사스러운 생활을 영위하였고, 전반적으로 다 도덕적 타락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성채 아크로코린토(566m)의 북쪽에 세워진 이 도시에는 그리스 신화에 사랑의 여신으로 등장하는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었다. '사랑의 여신'을 숭배하는 자들이, 일천 명에 이르는 '히에로둘리'(신전 창녀)를 마음대로 희롱하는 이 도시는 성적 타락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인구 75만명의 거대 도시 코린토는 한 마디로 쾌락의 도시였으며, 육욕과 술취함과 강탈로 가득한 도시였다.
코린토의 비도덕성은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 '코린토 사람처럼 행동하다' 라는 뜻을 지닌
'코린티아조'(korinthiazo)란 말이 '음행하다'라는 의미로 쓰였으며, '코린토의 친구들'이란 뜻을 지닌 '코린티아이 헤타이라이'(korinthiai hethairai)나 '코린토의 아가씨들'이란 뜻을 지닌 '코린티아이 코라이'(korinthiai korai)란 말이 '매춘부'란 의미로 쓰였다는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런데 이곳이야말로 바오로가 복음을 전세계적을 전파하기 위해서 반드시 복음이 전해져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다. 즉 코린토는 그 자체가 발칸 반도 지역인 아카이아의 수도로서 최대의 도시였을 뿐 아니라 해마다 종교 순례자들이 수십만 명 방문하는 중교의 중심지였고, 또한 대규모의 체육 경기로 인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매우 잦은 곳이었다.
따라서, 코린토는 단순히 아카이아 지역 뿐 아니라 마케도니아와 로마 전 제국을 복음화 하는데 있어 주요 요충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교 전략상의 중요성 때문에 바오로는 제2차 선교 여행시에 이곳에서 1년 6개월 간이나 머문 것 같다.
대략 그 시기는 A.D.50년 말에서 52년 가을사이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8장 21절에 갈리오 총독이 부임한 후에 바오로가 코린토를 떠났는데, 그 시기가 델피의 비문에 의하면 51년 또는 52년으로 언급 되어 있고, 18장 2절에서 바오로가 코린토에 도착했을 때 로마 제국의 4대 황제인 클라디우스가 프리스킬라와 아퀼라를 로마에서 '최근에' 추방한 사실이 언급되는데, 그 시기가 50년 경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바오로가 인구 75만명의 거대 도시이며, 교역과 상업의 중심지인 코린토를 방문한 것은 그 도시의 특성을 이용하여 복음의 확장을 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제3차 선교 여행 때도 인구 50만명의 거대 무역 도시이자 아시아 종교의 중심지인
에페소에서 복음을 전하였는데(사도18,24-19,20), 이것 역시 복음의 확장을 염두에 둔
바오로의 선교 전략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처럼 바오로는 복음이 효과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전략을 개발하여 선교에 힘썼던 것이다.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에 온 바오로는 아퀼라를 만났다.
'독수리'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아퀼라'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소아시아 북동쪽 지방에서 흑해 남동쪽 연안에 있는 '폰토스'출신이었다.
폰토스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오순절 성령 강림때 폰토스에서 온 유대인들이 있었음이 언급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사도2,9)
이때 성령 강림을 목격한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살던 지역에 돌아가 복음을 전한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퀼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들어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만났다'로 번역되 '휴론'(heuron)은 '(우연히)찾아내다', '~을 만나다' 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휴리스코'(heurisko)의 과거분사이다. 이 동사는 특별히 어떤 것이나 다른 사람을 어떤 장소에서 우연히 만나는 것을 묘사할 때에 쓰인다.
바오로가 코린토에 들어가서 아퀼라를 우연히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둘 다 천막 만드는 일에 종사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의 섭리로 볼 때 우연한 만남이 아니며, 복음 전파를 위한 필연적 만남이었다.
18장 2절은 아퀼라와 그의 아내 프리스킬라가 로마를 떠나 코린토에 오게 된 이유를 보여준다. 클라우디우스는 A.D.41-54년까지 재위한 제4대 로마 황제인데, 그는 A.D.49-50년경에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는 이들이 쫓겨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원인이 있었다고 전한다. 유대인들은 크레스투스(chrestus)라는 선동가의 영향을 받아 끊임없이 폭동을 일으켰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크레스투스'는 그리스어로 '유용한'이라는 뜻으로 그 당시 노예들에게 흔히 붙여졌던 이름이다. 그러나 그 발음이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크리스토스'와 유사하다는 점에 따라, 이 당시 로마에서 일어난 폭동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가에 대해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로마의 유대인 박해 정책에 맞서 '크레스투스'란 사람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일어난 정치적 성격의 폭동으로 볼 수 있다.
둘째, '크레스투스'는 당시 로마 세계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었던 '그리스도' 즉 '크리스토스'(christos)의 변형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리스도'란 인물을 믿는 그리스도교 유대인들을 부르는 이름일 수 있다는 추정에서 출발하며, 비그리스도교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를 믿는 유대인들을 박해하여, 그로 인해서 발생한 종교적 사회 문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 로마에 살고 있던 약 2만명 가량의 유대인들 가운데,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추방이 이루어졌는데, 아퀼라와 프리스킬라도 이 때 로마를 떠나게 되었고, 떠나올 때부터 이미 그리스도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아퀼라의 아내 '프리스킬라'는 '프리스카'(Prisca)의 애칭으로 보인다.(로마16,3)
바오로가 그 여성을 존경한 이유가 로마의 귀족 가문의 귀부인이었기 때문인지, 교회내에서 유력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것은 교회내에서의 역할이 남편보다 더 컸음을 암시한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아퀼라에게는 기술이 있었고, 로마 귀족 가문에 속한 프리스킬라에게는 돈과 인맥이 있어서, 그들이 공동으로 천막 제조와 가죽 수공의 상사를 소유했을 것이며, 이 상사의 지점이 로마, 코린토, 에페소에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로마16,3 ; 1코린16,9 ; 2 티모4,19)
로마에서 이 일을 시작하였던 두 사람은, 당시 클라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추방 칙령으로 인해 코린토에 온 상태였고, 코린토에서도 천막 제조와 가죽 수공 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바오로를 만나게 되었고, 같은 직업과 같은 신앙을 가진 그와 여러모로 동역하다가 바오로가 코린토를 떠날 때에 함께 에페소까지 동행하였던 것이다.
그후 이들 부부는(사도18,18-28) 에페소에 또 다른 지점을 냈다가 오래지 않아, 아마 클라디우스 황제가 죽은 후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이 완화되자 로마로 돌아와서(로마16,3) 그 일을 계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리스킬라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기에, 유대인 추방령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을 것이지만, 유대인인 남편을 따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코린토로 쫒겨 왔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신앙을 따라 산 그들의 기업을 크게 일으키시어, 바오로의 동역자로서 위대한 일들을 감당하게 하셨다.
한편, 그 당시 선교사들은 보통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할 때, 신도들로부터 물질적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따로 직업 활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바오로도 교회의 도움을 받았다.(2코린11,9 ; 필리4,16)
그러나 많은 경우, 자신이 스스로 선교 자금을 조달하였다. 즉 신도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 봉사함으로, 자신의 복음 선교가 훼방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오로의 선교 방침이었으므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술인 천막 만드는 일로서 경제 문제를 해결하였던 것이다.(1코린9,11.12)
특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크고 번창한 도시 코린토에서 생계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바오로는 코린토에서 우연히 만난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와 함께 거하면서, 스스로 일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 때 바오로가 했던 일은 천막을 만드는 일이었다.
'천막을 만드는 것'에 해당하는 '스케노포이오이'(skenopoioi)의 원형 '스케노포이오스'(skenopoios)는 일차적으로 '천막 제조자'(tentmaker)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리스에서는 이 단어가 단순히 천막을 만드는 일 뿐 아니라, 천막을 만드는 재료이기도 한 가죽을 다루는 모든 종류의 일을 가리켰다. 즉 가죽을 연결하는 일, 가죽으로 천막을 만드는 일, 신발을 만드는 일 등이 다 이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특히 여기서 '일을 하니'에 해당하는 '에르가제토'(ergazeto)가 행동의 계속이나 반복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으로 쓰인 것은, 바오로가 끊임없이 매우 부지런하게 이 일을 하였음을 보여 준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부유하든 가난하든 자식에게 직업 훈련을 시키는 것이 하나의 관습이었다.
또한 당시 서기관이나 율법학자들은 자신이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보수를 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도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 이외에 다른 직업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바오로는 이 천막 만드는 기술을 어렸을 때부터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사도22,3)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오늘 복음에는 “조금 있으면”(그리스 말 ‘미크론’)이라는 낱말이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이는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심판(호세 1,4; 이사 10,25; 예레 51,33 참조)이나 구원(이사 29,17 참조)의 때가 가까웠음을 예고할 때 쓰던 고유한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도 이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의 때가 가까웠음을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두 번의 “조금”의 시간은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 지내는 하루 남짓한 시간과, 죽음부터 부활까지 그분을 볼 수 없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 “조금”의 시간에 제자들은 엄청난 일을 겪습니다.
바로 주님과의 이별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붙잡히신 주님을 배신하고 외면한 일, 주님의 수난과 죽음, 슬픔과 후회 그리고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조금”의 시간 동안 사랑하시는 제자들이 마주할 극심한 혼란과 두려움을 아셨기에, 앞으로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승리와 영광을 바라보며 누리게 될 큰 기쁨을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우리의 한평생은 그날의 제자들이 살았던 그 “조금”의 시간과도 같습니다.
슬픔과 기쁨, 불확신과 굳은 믿음 사이를 쉼 없이 오가는 이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영원한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바오로의 코린토 선교 여정이 말하여 주듯, 실패한 듯 보이는 일에서도 승리와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을 신뢰하면서(제1독서 참조) 희망 속에서 함께 앞으로 나아갑시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사람을 의지(依支)하면 허무(虛無)만 남는다.
(요한16,16-20)
16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 예수님께서 우리의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흗날에 부활하시고 아버지께 가신 후, 하느님의 영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다시 오실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고 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그 사실을 알(믿을)수도 없다. 성령께서 아직 오시지 않으셨기에 말씀을 깨달을 수도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다.(1코린2,10참조)
17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서로 말하였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18 그들은 또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 세상은 자신들의 악한 뜻이 이루어 졌음을 기뻐하고 제자들은 육적 애통, 슬픔, 근심이 하느님의 뜻으로 이루어 졌음을, 영적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이다. 성령께서 그렇게 이끌어 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문 前까지 예수님께서 계속 성령을 약속하신 것이다.
* 예수님은 이제 곧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것이고, 또‘조금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이제 성령으로 내려오셔서 하실 하느님나라의 일에 대한 점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성령 하느님, 성자 하느님은 일체이십니다. 그렇다면 굳이 그렇게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시나 그냥 계시면 안 되나? 안 된다. 예수님은 승천 하셔서 내려온 곳으로 다시 올라가셔야, 예수님의 승리가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단죄하고 죽여 버린 세상이 틀렸고 당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길은 당신이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서 하느님의 오른쪽, 그 자리로 복귀를 하셔야 하기 때문에 하늘로 올라 가셔야 합니다.
만일 주님께서 부활하신 상태에서 이 땅에 보이는 육신을 갖고 살아가신다면 한정된 사람들에게만 나타나실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은 성령의 모습으로 내려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성령으로 오시는 중요한 이유는 이제 믿음의 시대가 와야 되기 때문이죠.
믿음이란 하느님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 선물입니다. 그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신비한 능력입니다. 14장으로 가면 예수님이 왜 보이지 않는 성령으로 오시는 것이 믿음의 시대를 여는 것인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14,16-19) 16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18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19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오늘 본문하고 흡사하지요? 그런데 거기에 하나가 첨가되었어요. ‘성령이 오시는데 세상은 보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못 보는데 제자들은 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믿음이라는 새로운 눈을 주시겠다는 것이지요. 그 믿음의 눈은 주님을 볼 뿐만 아니라 이 세상 현상들을 새로운 paradigm(패러다임,사례)으로 해석할 수 있는 탁월한 눈입니다.
세상을 육신의 눈으로 보게되면 모든게 근심거리고 염려밖에 없지요. 뭐 하나 제배로 되는게 없고,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없는 세상살이에서 근심과 염려뿐이지요. 보이는 것만 의지하고 그것을 성패를 판단하기에 근심은 당연한 것입니다.
제자들이라도 예외가 없지요. 하지만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볼 때 그들에게서 근심대신 기쁨이 있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이 아니라 하늘을 희망하는 눈으로 보게 될 때 세상일이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되어가고 있음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로마8,28참조)
하느님의 뜻대로 되어가고 있는 그 일이야말로 나를 살리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보증임을 깨달을 때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이 다행이지요. 믿음은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믿음을 근거로 성도와 세상을 가릅니다.
(2코린4,18) 18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2코린5,6-7) 6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몸 안에 사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7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로마8,24-28) 24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25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27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28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喜怒哀樂)이 함께 작용하여 선(용서, 구원)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 성령께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 하느님을 알고 체험할 수 있도록 언제나 우리를 이끄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께 믿음을 고백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희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시며 바라십니다.
(1코린2,10) 10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 성령님!
하느님의 뜻, 지혜의 말씀을 가르치시며 이끌어 주시니 감사 하나이다. ~아멘!!!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복음 (요한16,16-20)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16~17)
마르코 복음 16장 16절은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믿는 이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외적 표시요, 그리스도교의 입문 성사인 세례를 언급하셨다.
'세례를 받는'으로 번역된 '밥티스테이스'(baptistheis; is baptized)는 '밥티조'(baptizo)의 과거분사이다.
'밥티조'(baptizo)는 '반복하여 담그다', '담가서 물로 깨끗히 하다'는 뜻을 가지는데,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의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되었음을(로마6,3) 공적으로 드러내는 그리스도교의 입문 성사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라는 거룩한 예식을 통해 이 땅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구원의 길을 보여 주셨다.
요한복음 3장 5절에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친히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다(루카3,21~22; 마르1,9~11; 마태3,13~17).
이것은 단순히 겸손의 모범으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며, 자연수를 축복하기 위해서만 요르단 강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세례가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는 것을 '아버지 하느님께 가는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 주신 것이다.
한편,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에서 '단죄를 받을 것이다'로 번역된 '카타크리테세타이'(katakrithesetai; will be condemned)는 '카타크리노'(katakrino)의 미래 수동태이다.
'카타크리노'는 보통 재판 때 사용되는 법적 용어로서 '판결을 받다', '죄에 해당하는 벌을 내리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로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지 않는 자들은 마지막 심판대에서 그에 대한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됨을 가리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믿는 이들에게 맡길 때에 일방적으로 선교의 의무만을 강요하지 않으셨다.
먼저 복음을 능력껏 전파할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을 주시면서 사명을 맡기셨다.
'표징'으로 번역된 '세메이아'(semeia; signs)는 '세메이온'(semeion)의 복수 주격이므로 여러가지 다양한 표징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세메이온'(semeion)은 '표적', '징조'라는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이 보낸 사람들을 보증하기 위해 행하시는 기적과 놀라운 사건을 뜻한다.
즉 표징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한 도구일 뿐 아니라 하느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이에게 내려오는 하느님의 능력인 것이다.
사실 이러한 능력은 새로운 것이 아닌데, 이미 12제자의 파견(마태10,1; 마르3,15)때와 일흔 두제자의 파견(루카10,17) 때도 주어지고 나타났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로 사도들과 제자들을 대상으로 제한되었던 능력이 복음을 믿고 전하는 모든 이들에게 확대되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복음을 믿고 전하는 이들에게 나타나는 표징으로 구마와 신령한 언어가 있을 것이 예언된다.
구마는 '공중을 다스리는 지배자'(에페2,2)들의 능력을 제어하신 하느님의 능력의 위대하심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마귀에게 종되었던 이가 복음이 전파되어 하느님의 종이 되어 자유롭게됨을 보여 주는 표징이다.
여기서 '쫓아내고'로 번역된 '에크발루신'(ekbalousin; they will cast out; they will drive out)은 '에크발로'(ekbalo)의 현재형이다.
'에크발로'는 어떤 이가 행하는 권세를 빼앗고 다른 장소로 쫓아낼 때 사용되는 단어이며, 여기서는 세상 권세를 잡고 있던 마귀의 세력들을 쫓아내는 것을 뜻한다.
즉 복음 전파시 이것을 방해하는 악한 영들의 세력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칠 수 있음을 약속하시는 말씀이다.
특히 현재형으로 기록된 이유는 이러한 표징이 오고가는 세대에 항상 현재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새로운 언어들'에 해당하는 '글롯사이스~카이나이스'(glossais~kainais; new tongues)는 오순절날 이후에 내려질 이적에 대한 암시이다(사도2,4; 10,46; 19,6).
'새로운 언어들'이라는 단어는 다른 복음서에는 언급이 안 되는 마르코 복음만의 독특한 표현이다.
'새로운 언어들'에는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외국어 방언(사도2,4)과 개인의 깊은 경건한 신심 생활을 돕고, 교회의 선익을 위해 잘 봉사하기 위한 하느님의 은사로서 천상의 방언이 있다(1코린12,10; 14,4).
아마도 여기서 나타난 '새로운 언어들'은 언어가 통하지 않던 지역의 문화적 차이를 뛰어넘어 '새로운 언어들'로 복음이 전해질 수 있음을 가리키는 것 같다(사도2,4).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예수님의 이러한 약속은 몰타(Molta) 섬에 있었던 바오로에게 일어났으며(사도28,3~6), 독을 마셨지만 해를 입지 않은 경우는 성경에는 없지만, 교회 역사가 에우세비우스 (Eusebius, 교회사,Ⅲ, 39)의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누리게 될 놀라운 권능과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상징하는 표현이지,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거나 개인의 공명심을 위해 이러한 시험을 해 보라는 뜻이 아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사도행전에서 바오로에게 일어났던 것이 일치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약속이 정확하게 바오로에게서 성취되는 것을 보여 주어서, 하느님의 약속의 엄정성과 더불어 바오로가 진실한 복음의 사도임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기간 중에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행하셨던 대표적인 표징이었다(마르6,5; 7,32; 루카4,40).
예수님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러한 표징을 행했으며, 이러한 표징을 행한 대표적인 제자는 바오로이다(사도28,8).
여기서 '손을 얹으면'에 해당하는 원문은 '케이라스 에피테수신'(cheiras epithesousin; they will place their hands on; they will lay on by hands)이다.
2024년 05월 09일 목요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오늘 복음에서 유독 눈에 띄는 문학적 기법이 있습니다.
두 개의 대조되는 낱말을 조합하여 주제를 두드러지게 하는 방법입니다.
“조금 있으면”과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 대조되고, ‘보지 못하다’와 ‘보다’가 대조되며, “근심”과 “기쁨”이 대조됩니다.
“조금 있으면”이라는 구문은 무려 일곱 번이나 나오는데, 그리스 말 본문을 그대로 옮기면 “조금 있으면(‘미크론’) …… 다시 조금 있으면(‘팔린 미크론’)”입니다.
이 구절은 ‘보다’라는 동사와 연결되어,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하지만 다시 조금 있으면 보게 될 것’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내용을 만듭니다.
제자들조차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며 술렁이자 예수님께서 그 의미를 설명하여 주십니다.
조금 있으면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되니 ‘근심’스럽겠지만, 다시 조금 있으면 볼 수 있으니 ‘기쁨’을 누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때 언급된 기쁨은 인간적 쾌락이나 즐거움과는 구별되는 매우 깊은 내적 감정으로, 지식이나 이론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깨닫는 역설적 신비를 일컫습니다. 상실을 체험하고 견딘 뒤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영적 기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빛나는 순간을 체험합니다.
이것은 은총입니다.
그러나 그 뒤 다시 어떤 사건을 만나면 이내 하느님의 부재를 느끼며 버려진 듯한 느낌에 좌절하기도 합니다.
이것 또한 은총입니다.
슬픔에 고통스러워하기도 하겠지만, 조금 더 있으면 그 슬픔이 다시 진정한 ‘기쁨’의 원천이 된다는 모순적 진리를 번갈아 체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어떤 순간에 체험한 가슴 아픈 ‘상실’이 조금 뒤에 지나고 보면 깊은 ‘기쁨’의 원천이 된다는 역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여정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 바로 ‘진리의 영’이십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먼저 말씀을 깨달아야 참 기쁨, 진리의 길을 갈 수 있다.
복음(요한16,16-2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6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 조금 있으면? 내일, 다음날, 곧 세상의 모든 죄(罪)를 짊어지고 십자가(十字架)에 죽으실 그날이다.
(히브8,8-13) 8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결함을 꾸짖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으리라. 9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그들이 내 계약을 지키지 않아 나도 그들을 돌보지 않았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10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1 그때에는 아무도 자기 이웃에게, 아무도 제 형제에게 ‘주님을 알아라.’ 하고 가르치지 않으리라. 그들이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2 나는 그들의 불의를 너그럽게 보아주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 13 하느님께서는 “새 계약”이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첫째 계약(율법, 계명)을 낡은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낡고 오래된 것은 곧 사라집니다.
= 그래서 조금 있으면 당신이 죽으실 것이기에 ‘보지 못할 것이다.’ 하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보게 될 것’은 부활(復活)하신 당신을 말씀하심이다. 부활 후 승천(昇天)으로 다시 못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7 ㄱ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서로 말하였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18 그들은 또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고 말하였다.
= 제자들이 모르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으니 얼마나 큰 복(福)인가.
1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 조금 있으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근심하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좋아한다. 기쁘다. 왜? ‘세상이 말하는 의(義)와 죄(罪), 심판(審判)이 그릇되다.’고 예수님께서 고소, 고발했기 때문이다.(요한16,8)
그러나 조금 더 있으면, 곧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신 뒤 다시 오실,’ 약속하신대로 다른 보호자 성령(聖靈)으로 다시 오셔서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하실 것이기에 기쁨이 된다.
(요한14,18-19) 18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19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세상은 예수님의 죽음을 끝으로 그분의 부활과 다시 오실 성령으로 오심을 보지 못하지만, 믿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살아있을, 곧 ‘새 생명의 시작인 새 계약의 완성, 승리를 봐야 한다.’는 말씀이다. 세상은 죄의 선고를 받을 것이나, 믿는 제자들은 무죄의 선고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잊기 쉬운 ‘알레떼이아’ 그 진리(眞理)의 말씀을 (말씀은 믿음으로 자라나기에)~
(로마8,1-2.9-12.16) 1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새 계약)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9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믿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믿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믿으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믿음)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11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1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16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피의 새 계약이 모든 죄, 더러운 양심까지 깨끗하게 하셨기에 ‘육(肉)의 법(法)에 빛이 없다’는 것이다.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믿는다는 많은 신자들이 ‘성령의 증언을 듣지 못해 믿지 못한다.’ 왜 일까? 믿는다면서 말씀을 모르거나 말씀에 머무는 기도(祈禱)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사를 내 뜻, 소원을 위한 제사(祭祀)로 드리며~ *제사, 구원을 위한 그 ‘피의 새 계약의 제사’를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다”하신 그 예수님께, 그리고 그 새 계약의 속죄 제물로 사랑하는 독생자(獨生子)를 내어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을 돌려 드리는 예배(禮拜), 그 영(靈)의 예배를 몰라, 드리지 못한다.(이사43,7 요한3,24 참조)
모르니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나누는 그 미사(파견)의 삶인 이웃 사랑도 살지 못한다. 그래서 행위 이전에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 곧 말씀에서 하느님의 은혜(恩惠), 자비(慈悲), 사랑 받았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요한8,30-32) 30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그런데)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 진리(眞理),- 성령(聖靈)이시다.(1요한5,6). 성령 ‘푸뉴마’-호흡, 숨, 바람. 누군가가 그 ‘깨진 독에 물을 채우려면 그 물에 깨진 독(항아리)을 담그면 된다.’ 했듯이 내가 말씀(바람)에 담기면 된다. 그러면 물인 말씀이 진리로 이끌어 가신다.
매일 묵주기도(黙珠祈禱) 100단씩 받쳤어도, 고해성사를 자주했어도, 온갖 전례에 열심을 부렸어도, 매일 성체를 모셨어도, 진리가 무엇인지, 구원의 의, 자유가 무엇인지 몰랐었다. 그래서 오히려 신앙이 무거운 짐일 뿐이었다.
세상의 죄와 의, 심판을 진리로, 헛된 신앙을 살았기 때문이다. 말씀에 머무는 기도를 하고서야 알았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영으로 언제나 어디서나 늘, 나와 함께 하심을 느끼며, 이끄심으로 참(오른) 진리를 깨닫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모든 것에서 자유하게 되었다. 나의 의(義), 명예, 죄의식, 목숨(건강), 그 모든 것에서 풀려났다는 것이다. 세상의 영, 말이 줄 수 없는, 하늘의 영, 말씀만이 줄 수 있는 자유, 평화다.
(1코린2,12-15) 2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13 우리는 이 선물에 관하여, 인간의 지혜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말로 이야기합니다. 영적인 것을 영적인 표현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14 그러나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15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않습니다.
= 성령을 입은 영(靈)의 사람은 세상의 그 무엇도,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믿고, 말하기 때문이다. 곧 오늘의 모든 말씀을 진리로 믿고, 말하는 것이다.
(에페2,8)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영원한 보호자이시며 진리이신 천주 성령님!
우리의 삶속에서 저희 와 늘 함께 하시며 생명의 길, 진리로 이끄시니 감사합니다. 저희 모두의 마음을 붙들어 주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내버려두지 마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