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5월 01일 수요일
[노동자 성 요셉] 목수의 아들 (마태13,54-58)

요셉 성인은 성모 마리아의 배필이며, 예수님의 양아버지다. 목수였던 성인은 오늘날 노동자의 수호자로 공경받고 있다. 1955년 비오 12세 교황은 해마다 5월 1일을 노동자 성 요셉의 기념일로 지내도록 선포하였다.
제1독서<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1,26-2,3)
2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2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28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2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30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는 온갖 푸른 풀을 양식으로 준다.”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31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
2,1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2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3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콜로3,14-15.17.23-24)
형제 여러분, 14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15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17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23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
24 주님에게서 상속 재산을 상으로 받는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은 주 그리스도의 종이 되십시오.
<화답송>시편90,2.3-4.12-13.14와16(◎17ㄷ) ◎ 주님,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실어 주소서.
○ 산들이 솟기 전에, 땅이며 누리가 생기기 전에, 영원에서 영원까지 당신은 하느님이시옵니다. ◎
○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당신은 말씀하시나이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
○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소서.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으리이다. 돌아오소서, 주님, 언제까지리이까? 당신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당신 하신 일을 당신 종들에게, 당신 영광을 그 자손들 위에 드러내소서. ◎
복음<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13,54-58)
54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57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2024년 5월 1일(노동자 성 요셉) 제1독서 (창세1,26~2,3)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창세1,26)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우리와 비슷하게'로 번역된 '뻬찰르메누'(betsalmenu; in our image)에서 '비슷하게'에 해당하는 '첼렘'(tselem; 모상; 형상)은 '그늘지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일차적으로 '그림자'(시편39,7)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뜻이 확장되어 그림자가 그 실체의 모양을 반영하듯이 실체의 모양을 반영하는 '모상'(형상)이란 말로 주로 번역되었다.
또한 '우리 모습으로'으로 번역된 '키드무테누'(kidmuthenu; in our likeness)에서 '모습'에 해당하는 '떼무트'(demuth; 유사성; 모양)은 '닮다'에 해당하는 '따마' (dama)에서 유래하며 어떤 실체와 유사한 상태를 가리킨다(1역대4,3; 이사40,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모상'(형상; imago; image)과 '모습'(유사성; 모양; similitudo; likeness)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며 어떻게 양자가 구별되는지 알기는 매우 어렵다.
초대 교회의 일부 교부들은 '모상'(형상)을 외형적인 신체의 모습으로 보고, '모습'은 하느님께서 지니신 영원성이나 절대성, 성성(聖性)등과 같은 내면적인 성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 두 단어는 그 통례에 있어서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으로 구분되어 사용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순수한 영이신 하느님께서는 육체적인 형상이 없다는 점에서 위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히려 두 단어를 구별하여 이해할 것이 아니라 모두 하느님의 성품을 가리키는 용어이며, 이를 중복하여 사용한 것은 유사한 단어를 반복함으로써 보다 의미를 강조하려는 의도때문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본문 단어는 각각 분리될 수 없는 전치사 '뻬'(be)와 '케'(ke)가 그 서두에 붙어 있다.
이 두 전치사는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으나, 가장 일차적인 의미가 '뻬'(be)는 '~안에'(in)이고, '케'(ke)는 '~처럼'(as)이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이 매우 엄정하게 하느님의 모상(형상)과 모습 (유사성)을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본문은 인간의 영혼이 하느님의 성품을 이어 받아 창조되었으므로,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어야 하는 존귀한 존재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생물학적 진화론이 옳다면, 근본적으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별로 다를 바 없으며, 단지 빠른 진화 과정을 겪었다는 상대적인 가치만을 지닐 뿐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듯이,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과 유사성(imago Dei; similitudo Dei)으로 창조되었다는 창조론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는 절대 구별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녔음을 알게 된다.
역설적으로 눈에 보이는 인간을 연구할 때, 그 안에 하느님의 신적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지성, 자유 의지, 감성(정서), 기억, 양심 등과 같은 영혼의 정신성과 영혼의 불멸성이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성적인 동물로서, 지성과 자유 의지가 있는 실존으로서, 자신의 행위에 도덕적인 책임을 져야하는 인격적 존재(persona; personality)라는 것이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다른 유인원, 동물들에는 없는 고유하고 독보적인 것이 아닌가?
여기에 생물학적 진화론이 들어올 자리가 어디 있는가?
'만들자'로 번역된 '나아세'(naase)는 '만들다'는 뜻을 지닌 '아사'(asa)의 일인칭 복수형이다.
히브리어 '아사'는 이미 있는 기존 재료를 사용하여 어떤 것을 만들지만, 그 결과는 전혀 새롭고 창조적인 것임을 가리킨다.
창세기 2장 7절에도 나오지만, 사람은 흙이라는 재료로 하느님에 의해서 만들어졌지만, 그 결과로 만들어진 인간은 그 이전의 어떠한 창조물과도 구별되는 완전히 새로운 창조물임을 암시한다.
한편 본문에는 '우리'라는 1인칭 복수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처럼 인간 창조에 있어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우리'라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최고 걸작품인 인간을 창조함에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느님의 밀접한 협의와 상호 협조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천지 창조 때에도 성부 하느님과 더불어 성령 하느님께서도 활동 하셨음이 밝혀져 있으며(창세1,2), 후에 요한 복음 저자도 성자 하느님께서도 창조 사업에 동참하셨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요한1,2.3).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마태 13,55)
여러분은 누구의 아들이고 딸입니까?
저는 '몰락한 지주의 손자요 일찍 작고한 교육자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할아버지, 아버지의 직업이 무엇이었냐를 아직도 우리 정체성의 일부로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오늘날의 직업가치 기준에 따라 부모 직업의 귀천을 따지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부모의 직업을 어떻게 여기시나요?
그 직업을 자랑스러워 하나요?
아니면 부끄러워 하나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내 부모의 직업이 챙피하다고 여긴다면 예수의 직업을 한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는 목수였고 그 육신의 아버지 요셉의 직업을 대를 이어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직업을 자랑스러워 했을 겁니다.
오늘 나의 직업에 대해 자랑스러워 합시다.
그리고 우리 부모의 직업도 자랑스러워 합시다.
나는 그 아버지의 자식입니다.
그 피를 이어받고 그 생명을 이어받을 뿐만 아니라 그 직업의 댓가로 양육되었기 때문입니다.
내 직업을 참으로 감사하는 사람은 그 '직업'(vocation)이 '성소'(Vocation)가 됩니다.
오늘 노동자의 날은 나의 직업에 감사함으로써 나의 성소를 경축하는 날입니다.
축하합니다~~^^
오상선 신부
축일 5월 1일 노동자 성 요셉
교황 비오 12세는 1955년 노동자를 보호하고 ’노동 축일’에 기독교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노동자 성 요셉‘축일을 제정하였다. 모든 나라에서 이 기념일을 5월 1일에 지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오늘날 이 기념일은 임의적인 것이 되었다. 나자렛의 겸손하고 위대한 노동자 성 요셉의 모습은 전 인류의 구원자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인간의 삶에 직접 뛰어들어 그 고난에 동참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렇게 하여 노동은 하느님의 창조 역사에 동참하고 완성케 하는 신비한 능력을 인간에게 주는 것이라고 노동관이성립되었고 이것은 인간의 진정한 노동가치에 눈뜨게 해주었다. 현대인들은 때로는 폭력을 사용하면서까지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와 인격의 존엄성을 주장하게 되면서 이러한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사회적 투쟁으로 인하여 자신의 이익에 손실을 보게된 일부 그리스도 신자들이 이러한 노동자들의 사회적 요구를 자주 외면해 왔다. 바로 이 점이 많은 현대인들의 눈에 5월 1일이 마치 교회에 대항하는 노동자 계급의 투쟁으로 비치게 된 이유이다.
이제 교회는 노동의 현실적 가치를 존중하며, 정의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몇 나라에서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투쟁 속에서 노동자 계급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옹호하기 위하여 ’노동 축일’을 중요시한다. 또한 신도들에게 성직자들이 최근 들어 교황 요한 23세의 교서(Mater et Magistra)나 바오로 6세의 교서(Populorum Progressio)를 통하여 끊임없이 일깨워주려 하는 내용에 대한 대답을 듣기 위한 까닭이기도 하다.
’노동 축일’ 기간에 우리는 노동자 성 요셉의 보호아래 구원의 상징인 성찬 예식을 갖는다.
성찬 예식은 육일간의 창조 속에서 일하신 하느님께서(창세 1-2장)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이루기 위하여 제7일에도 그의 일을 계속하시기 때문에(요한 5,17) 그리고 이제 새로이 하느님의 아들이 된 우리가 동참하는 이 새 창조는 근본적으로 성찬 예식을 통하여 완성되기 때문에 이 성찬 예식은 자연적 가치이상의 더욱 고귀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성찬 예식은 현대의 기술 사회 속에서 그 목적이나 동기에 있어서 초자연적인 가치를 나타내주기 때문에 ’노동 축일 ’속에서 그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 새 창조를 이루기 위한 이 ’새’ 일은 자연적인 법칙을 따르지만, 우리를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느님의 아들의 자리까지 이끌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하느님을 위한 일(요한 6,27-29;골로 3,23-4,1;1고린10,31-33 비교) 또는 하느님에 대한 감사의 행위(성경적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성찬’이 된다)에 대하여 말한다면 신약에서는 인간의 노동은 은총과 그 은총에 활기를 더해주는 사회적 의미에 의하여 이미 ’새 세계’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사도 18,3;20,33-35;에페 4,29 비교)
우리들이 성찬 예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시작하신 일에 우리가 더욱 밀접히 참여하도록 허락해줌과 동시에 그것이 하느님의 창조 역사에 동참하는 길이며 모든 노동의 목적은 새로운 왕국의 건설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면서 우리가 인간적인 노동에 헌신하는 것조차 성화시켜 주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에서
우주 안의 인간 활동
인간은 자기 노력과 재능을 다하여 자신의 생활을 발전시키려고 언제나 분투해 왔다. 현대에 와서 인간은 특히 과학과 기술의 도움을 받아 그 지배권을 거의 자연계 전체에 확장했고 또 계속 확장하고 있다. 또 무엇보다도 국가들 사이의 여러 가지 교류 수단이 증가함에 따라 인류 가족은 점차 전세계의 한 공동체임을 자각하며 그렇게 형성되어 가고 있다. 여기서 인간은 한때 초인간적인 힘에 의존하던 많은 혜택을 이제는 스스로의 힘으로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전인류에게 퍼져 가는 이 거대한 노력 앞에서 인간들에게는 많은 문제점이 생긴다. 인간 활동의 의의와 가치는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은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 개인적 내지 사회적 노력은 도대체 무슨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가?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위탁받아 보존하며 거기서 종교적 내지 윤리적 분야의 여러 원리를 찾아내고 있으므로, 개개의 문제에 언제나 즉각적인 해답은 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근에 인류가 걷기 시작한 행로를 비추어 주기 위해서 계시의 빛을 모든 사람의 경험에 결부시키고자 한다.
인간이 세기를 통하여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노력해 온 이 거대한 노력은 그 자체가 하느님의 계획에 부합한다는 것이 신자들에게는 명백한 일이다. 과연,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며 의롭고 성스럽게 우주를 통치하고, 하느님을 만물의 창조주로 인식하며 자신과 전우주를 하느님께 바쳐 드리라는 명을 받았다. 따라서 인간은 만물을 인간에게 복종시킴으로써 하느님의 이름이 전우주에 빛나도록 해야 한다.
이 명령은 또한 일상 노동에도 적용된다. 자기와 가족들의 생활 유지를 위하여 노동하면서 동시에 사회에 적절히 봉사하는 남녀는 자신의 노동으로 창조주의 사업을 계속하고 형제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며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성취시키는 데에 개인의 노력으로 이바지한다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인간이 스스로의 재능과 힘으로 만들어낸 것을 하느님의 권능에 배치된다거나 이성을 가진 피조물을 창조주의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인류의 승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증거요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의 결실이라고 확신한다. 인간의 능력이 커질수록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간의 책임도 더욱 확대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우주 건설에서 인간들을 외면시키거나 동료들의 복지에 무관심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위하여 노력하도록 강력히 촉구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2024년 05월 01일 수요일
[노동자 성 요셉]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예수님의 고향 방문 이야기는 공관 복음서의 각기 다른 부분에 배치되어 있고, 예수님을 소개하는 문구도 서로 다릅니다.
루카 복음서는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4,22)라고 하고, 마태오 복음서는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13,55)라고 하며,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을 “저 사람은 목수”(6,3)라고 소개합니다.
교회는 성모 성월 첫째 날에 ‘노동자 성 요셉’ 기념 미사를 드리며, 모든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기억합니다.
특별히 오늘 성경 본문은 노동이 왜 신성한지 그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밝히는데, 하느님께서도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독서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시는 일(노동)’을 엿새 동안 하신 뒤 일곱째 날 쉬셨음을 선언함으로써 ‘노동하시는 하느님’을 선포하고 동시에 인간에게도 노동을 ‘사명’으로 주셨음을 선언합니다.
노동은 하느님께 받은 사명이기에 거룩하고, 하느님께서 하신 일의 연장선 위에 있기에 거룩하며, 이를 성가정에서도 그대로 실천하였기에 거룩한 것입니다.
근대화가 시작된 뒤로 노동에 대한 담론은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습니다.
인간의 도구화, 노예화, 고용 박탈과 분배 불균형이 쉼 없이 고발되었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는 여전히 안타깝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문제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애쓰고 있습니까?
과연 정부와 사법 체제, 기업들은 노동의 가치와 품위, 노동자들의 생명을 보호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요?
그리고 우리는 노동 현실을 하느님께서 주신 거룩한 사명으로 인식하고, 그 가치를 올바로 구현하고 있는지요?
그 가치를 하나둘 세워 갈 때 우리의 노동 현장의 상황은 더 이상 후퇴하지 않고 조금씩 나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노동자 성 요셉] 복음 (마태13,54-58)
옛 계명으로 새 계명을 깨달아야(간직해야)
(마태13,54-58)
54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태복음 13장 전체의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으로 하느님의 지혜, 기적의 말씀이셨던 것이다.
오늘 본문은 그 결론으로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보여주신다.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 유대인들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의 아들이라 한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그의 자녀라 함은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56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57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 예수님의 말씀, 가르침을 자신의 것, 곧 구원의 믿음으로 연결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문 앞 절로 가서 믿음을 얻고자 한다.
(마태13,47-52)
47 “또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48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 그물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바다 곧 시련, 풍랑뿐인 세상에서 사람들을 건져 올리는 구원의 말씀이다. 세상에 던져진 그물(말씀)을 하느님의 뜻으로 깨달아 믿음으로 간직한 것, 좋은 것이며 자신의 뜻, 욕망을 위한 말씀으로 간직한 것이 밖으로 던져 질 나쁜 것이다.
49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 말씀을 인간의 계명으로 받아 의롭게 산 이들이 하늘의 대속, 그 구원의 의로움을 무시한(죽인) 악한 것이다. 땅(사람)의 의로움은 하늘의 생명이 아닌 땅의 죽음으로 맺을 뿐이다. 의인은 모든 죄를 대속하신 하늘의 의로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피), 그 새 계약으로 깨끗하고 거룩한 의인이 된다.(히브10,10~참조)
50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 하늘의 양식인 말씀(씨- 새 계약)이 없으니 씹을 것이 없어 이만 갈게 된다.
51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5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 율법(제사와 윤리), 그 옛것으로 새것을, 곧 옛 계약(계명)으로 새 계약(계명)을 깨달아야(간직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히브8,7-13)
7 저 첫째 계약에 결함이 없었다면, 다른 계약을 찾을 까닭이 없었을 것입니다. 8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결함을 꾸짖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으리라. 9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율법-제사와 십계명)과는 다르다. 그들이 내 계약을 지키지 않아 나도 그들을 돌보지 않았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10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새 계약)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 새 계명, 새 계약 곧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 의롭게(거룩하게) 하시어 하느님 당신의 백성(자녀)으로 하시겠다는 것이다. 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의 신앙을 떠나 십자가의 대속, 그 새 법, 새 계약으로 돌아와 간직했을 때 이다.
11 그때에는 아무도 자기 이웃에게, 아무도 제 형제에게 ‘주님을 알아라.’ 하고 가르치지 않으리라. 그들이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말씀을 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구원의 일은 말씀이, 곧 하느님 당신이 하시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12 나는 그들의 불의를 너그럽게 보아주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 13 하느님께서는 “새 계약”이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첫째 계약을 낡은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낡고 오래된 것은 곧 사라집니다.
= 새 계약은 대속의 죽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다.
(루가22,20) 20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 예수님의 피, 몸을 하느님의 새 법, 새 계약으로 먹지 못한다면 헛된 신앙이 된다. 그러면 새로운 피조물 곧 새 창조로 하늘의 것, 새것이 될 수 없다.
☨은총이신 성령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피, 그 구원의 새 계약, 계명, 말씀을 저희 생각과 마음에 새기시어 새 피조물, 새 사람, 새 하늘의 새것이 되게 하심을 믿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