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9일 토요일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초대받은 자의 처신 (루카14,1.7-11)
제1독서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필리피 1,18ㄴ-26)
형제 여러분, 18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사실 나는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19 여러분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움으로 이 일이 나에게는 구원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21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22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3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24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25 이러한 확신이 있기에, 여러분의 믿음이 깊어지고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내가 남아 여러분 모두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26 그리하여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 가면,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할 거리가 나 때문에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화답송 시편 42(41),2.3.5ㄱㄴㄷㄹ(◎ 3ㄱㄴ 참조) ◎ 제 영혼이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
○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 가서 뵈오리이까? ◎
○ 영광의 초막, 하느님의 집까지, 환호와 찬미 소리 드높은 가운데, 축제의 무리와 행진하였나이다. ◎
복음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14,1.7-11)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7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8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제1독서 (필리1,18ㄴ-26)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살든지 죽든지 나는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20-21)
필리피 서간 1장 20절부터 23절까지는 자신의 생사를 초월하여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바오로의 성숙한 신앙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기적 야망에서 그리스도를 투기와 분쟁으로 전한 자들과 달리 바오로에게는 거룩한 열망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간절한 기대'로 번역된 '아포카라도키안'(apokaradokian ; my earnest expectation)의 원형 '아포카라도키아'(apokaradokia)는 세 개의 단어가 합성되어 이루어진 회화적인 단어이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예민한 기대감으로, 목(카라;kara)을 빼고(아포;apo) 앞을 바라본다(도케인;dokein)는 의미이다.
한자성어로는 '학수고대'(鶴首苦待) 라는 말이 적합하다.
바오로는 학수고대하며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통해 존귀하게 되기를 희망하였던 것이다.
한편, '희망'으로 번역된 '엘피다'(elpida)의 원형 '엘피스'(elpis; hope)는 '바라는 것'(사도16,19 ;로마4,18;1코린9,10;2코린1,7)과 '신뢰','신용' 이란 뜻과 아울러 '영원한 내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망덕' 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된다.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부끄러운 일' 로 번역된 '아이스퀸테소마이'(aischynthesomai)의 원형 '아이스퀴노마이'(aischynomai)는 '천함', '수치', '불명예'를 의미하는 '아이스코스'(aischos)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보기 흉하게 하다','추하게 하다', '불명예스럽게 하다','수치로 가득 채우다' 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는 미래 수동태로서, 부정어 '우데니'(udeni ; nothing)와 함께 쓰였다.
따라서 직역하면,'나는 어떤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이러한 본절의 선언은, 하느님을 신뢰하는 온전한 믿음 가운데서 나오는 표현이며, 자신이 중상모략으로 인해, 혹은 결박되어 있는 것으로 인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함께 해주실 것을 믿는 굳은 신앙의 고백이다.
바오로는 믿음으로 하느님을 기다리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신실하신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시편25,3; 이사50,7)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 아주 담대히'
'언제나'로 번역된 '판토테'(pantote)는 '항상','늘' 이라는 의미의 부사이다.
또한 '아주'로 번역된 '파세'(pase)는 '온전히','모든'(all)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 모든 담대함으로' 가 된다.
즉 바오로는 현재와 시간상으로 멀리 떨어진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서만 담대한 것이 아니라 늘 담대했던 것이다.
한편, '담대함'에 해당하는 '파르레시아'(parresia; boldness; sufficient courage)는 언변의 거침없음과 마음이 담대하고 용기로 가득 차있는 두가지 사실을 나타내는 말이다.
'살든지 죽든지 나는 이 몸으로 ~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본절에 나오는 '살든지 죽든지' 로 번역된 '에이테 디아 조에스 에이테 디아 타나투'(eite dia zoes eite dia thanatu; whether by life or by death)는 필리피서 1장 21절의 표현과 더불어 삶과 죽음을 초월한 바오로의 생사관을 잘 보여준다.
바오로는 필리피서 1장 13절-14절에 나오는대로,그리스도 때문에 1차로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던 기간중인 A.D.62-63년경 로마 황제 체사르의 재판 결과, 사형이 선고되든지 혹은 석방되든지 간에 상관없이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는 결과로 귀결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로 번역된 '메갈린테세타이'(megallynthesetai)의 원형 '메갈뤼노'(megallyno)는 '존귀하게 만들다','위대하게 만들다', '웅대하게 하다'(다른 사람들에게 일부러 보이다,드러내다; 마태23,5),'증가시키다' (커져가다; 2코린10,15),'찬양하다'(루카1,46; 사도5,13; 10,46) 라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본래 문자적 의미는 '수를 증가시키거나 옷에 매달린 장식의 크기를 늘리는 것' 을 말한다.
본문에서는 미래 수동태로 쓰여 바오로의 간절한 염원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바오로가 수동태로 쓴 것은 그리스도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자세로, 자신은 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도구(수단)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1코린6,20; 2코린4,10)
자신이 석방된다면, 자신의 전인격를 통하여(로마12,1; 에페5,28) 계속하여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의 임무를 수행해 나갈 것이지만,그렇지 않고 사형에 처해진다 하더라도, 확고한 신앙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으로 기꺼이 순교의 제물이 되어 주님께 가겠다는 말이다.
이러한 바오로의 고백안에는 하느님의 직분을 맡은 사도로서 자신의 안위에 집착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신을 통해 오직 주님만이 영광받으시고,주님만이 존귀하게 되시기를 바라는 성숙한 봉사자로서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한편,'이 몸으로'로 번역된 '엔 토 소마티 무'(en to somati mu; in my body)는 '감옥에 있으면서',혹은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채찍에 맞은 흔적으로' 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전존재로써' 라는 뜻이다.
바오로는 자신의 삶 자체가 오직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도구요 수단이 되기만을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21)
'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갈라티아서 2장 20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과 더불어 바오로 사도의 생사를 초월한 인생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유명한 구절이다.
여기에서 '삶'(사는 것)이라 번역되는 '젠'(zen)은 죽음에 대조 되는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살아 있다','생명력을 소유하다'(로마7,1-3; 1코린7,39)라는 뜻을 갖는 동사 '자오'(zao)의 현재 부정사로 쓰여,현재 지속되는 삶의 과정을 나타낸다.
'나에게는 삶이 그리스도이며' 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육신적인 삶이나(사도17,28) 혹은 영적인 삶(로마8,2-11; 2코린5,17)의 근원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삶의 의식과 체험이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그리스도가 그의 최대의 관심이라는 것이다.(갈라2,20)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삶의 영감과 지침과 목적과 의미를 제공한다는 이러한 바오로의 고백을 통해서 그는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바오로가 행하는 모든 것,말씀에 순종하고,사랑의 힘으로 형제를 사랑하며 돌보는 것, 복음을 전하는 것,복음으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리스도를 위한 것으로,자신의 일생이 전부 그리스도로 채워져 있고,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야말로 바오로가 존재하는 이유인 것이다.(필리4,13; 2,5-11; 3,9; 4,4; 2코린5,15참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죽는 것'으로 번역된 '아포타네인'(apothanein)의 원형 '아포트네스코'(apothnesko)는 '자연적 죽음을 죽다'(마태9,24; 루카16,22; 요한4,47; 로마7,2),'도덕적 죽음을 죽다'(로마7,10; 묵시록3,2), '죄에 대해 죽다'(로마6,2 ;콜로2,30)란 다양한 용례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육신적 죽음으로 죽는 것을 말한다.
상반절의 '사는 것'이 현재 부정사로 쓰인 반면,본문의 '죽는 것'은 부정(不定) 과거 부정사로 쓰여 죽음의 과정이나(1코린15,31; 2코린5,12)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일생에 단 한번 있는 육체의 일회적 죽음을 나타낸다.
한편,'이득입니다' 로 번역된 '케르도스'(kerdos)는 '이익', '이득'(필리3,7; 티토1,11)이라는 뜻이다.
바오로는 무조건 살기를 원한 것도 무조건 죽기를 원한 것도 아닌,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살고 죽는 문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했다.
여기서 바오로가 죽는 것이 이득이라고 한 것은, 여러가지 육체적인 고통이나 삶의 무거운 짐들에서 벗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던 자신이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더 깊고 더 완전한 일치에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이란 표현이 나오는 23절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리스도와 맺었던 관계가 죽음으로 인해 파기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가깝게 되기 때문에 죽음이 이득이 될 수 있는 것이다.(로마 8,38.39)
결국 바오로가 죽는 것은 실제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23절), 바로 주님과 함께 본향에 있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2코린5,8)
이처럼 바오로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그리스도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바오로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쨌든 간에 자신의 몸으로 그리스도를 존귀 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2022년 10월 29일 토요일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오늘 복음 말씀의 핵심이자 루카의 신학을 압축적으로 반영하는 표현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부자와 가난한 이’, ‘권력자와 힘없는 이’, ‘교만한 자와 겸손한 이’ 등의 대조를 자주 활용하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로 기존에 형성된 가치가 완전히 역전되고 있음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만큼
사회에서 이미 충분한 보상과 위로를 누리는 부자나 권력자들보다,
변두리에서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이들이
오히려 하느님께 받아들여지고 그분 백성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낮아지는 것이 곧 높아지는 길’이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작동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 듯합니다.
현실에서는 높은 곳에 오르려는 사람이 좀 더 높은 곳에 다다르는 것 같습니다.
일부러 낮은 곳으로 내려가려는 사람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어쩌다 있다고 한들, 치열한 경쟁 시대에 미련한 짓을 한다고 손가락질이나 받지 않을까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현실에서 벌어질 법한 비슷한 상황을 하나 소개하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윗자리는 모두가 우러러보는 곳에 놓인 자리이고 그 잔치에서 가장 귀하고 존경받는 사람이 앉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잔치를 연 사람이 누구를 초대하였는지 잘 알지 못하면서
덥석 그 자리에 앉았다가는 망신당하기 쉽습니다.
차라리 끝자리에 앉는 것이 낫습니다.
초대한 사람이 직접 찾아와 맨 윗자리로 안내하게 될 때
다른 이들이 우러러보는 영광을 만끽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상황이 하느님 나라의 작동 원리와 꼭 들어맞는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조금이나마 이해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 원리를 가장 명확하게 실현하시고 삶으로 증명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없이 자신을 낮추셨던 그분을 하느님께서는 만물 위에 들어 높이셨습니다(필리 2,6-11 참조).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도 하느님 나라의 이 원리가 유효함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2021년 10월 30일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신앙의 목적은 자기부인, 버림이다. 그 비움으로 하늘을 받는다.
복음(루카14,1.7-11)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7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8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 꼭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씀일까? 그리고 그렇게 될까? 그리고 윗자리에 앉기 위해 낮은 자리에 앉는 것, 위선(僞善)이 아닐까?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꼭 그렇게 되는, 될 곳 이 있다. 하느님 나라의 혼인(婚姻)잔치다. 자신의 뜻, 욕망(慾望)을 위해 열심 했던 종교(宗敎)행위, 또 세상 힘의 원리로 살았던 자신의 의(義), 명예(名譽), 부(富), 그 자신의 힘이 구원의 가치 없음을 인정하는 자기 부인(否認), 자기 버림의 낮아짐으로 예수님께서 당신 대속(代贖, 목숨)으로 수종(水腫)병에서 살리신 머리(주인,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지체, 꼬리로 그분과 한 몸이 되어 들어가는 하늘의 혼인잔치, 하느님 나라임을 비유(比喩)하신 말씀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罪)로 죽으셨고, 그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 살아 나셨다. 그래서 죽을 우리의 머리, 신랑(맏물)이 되신 것이다.(1코린15,20참조)
(루가9,22-24)
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신 죽음(死亡)과 부활(復活)이다. 죄인들이 의인이 되는 부활이다.(로마4,25) 그래서 ‘버리라’ 하신 것이다.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명예, 義)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버리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하늘의 용서, 자유, 평화, 생명은 자신을 부인하는 그 버림으로 얻는다. 그러니 신앙(信仰)은 자기부인, 죽음의 연속(連續)인 것이다.
(로마6,4-8) 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5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
6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7 죽은 사람은 죄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8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1코린15,35-44.53-54.57) 35 그러나 “죽은 이들이 어떻게 되살아나는가? 그들이 어떤 몸으로 되돌아오는가?” 하고 묻는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36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37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체가 아니라 밀이든 다른 종류든 씨앗일 따름입니다. 38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창조)하시는 대로 그 씨앗에 몸체를 주십니다. 씨앗 하나하나에 고유한 몸체를 주시는 것입니다.
39 육체라고 다 같은 육체가 아닙니다. 사람의 육체가 다르고 집짐승의 육체가 다르고 날짐승의 육체가 다르고 물고기의 육체가 다릅니다. 40 하늘에 속한 몸체들도 있고 땅에 속한 몸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몸체들의 광채가 다르고 땅에 속한 몸체들의 광채가 다릅니다. 41 해의 광채가 다르고 달의 광채가 다르고 별들의 광채가 다릅니다. 별들은 또 그 광채로 서로 구별됩니다.
42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43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44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53 이 썩는 몸은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 54 이 썩는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으면, 그때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아멘!
매일미사 사제의 묵상글로 마무리한다. ~
우리는 그렇게 세상 논리를 더 익숙하고 편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논리의 옷을, 예수님 말씀의 옷으로 갈아입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당신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것처럼, 우리도 부끄러움이 아닌 영광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희망이요 선물입니다.
☨보호자 천주의 성령님! 몰라서, 깨닫지 못해서 슬퍼할 줄도, 아파할 줄도 모르는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흙인 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2022년 10월 29일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초대 받은 당신
독서(필리1,20-23)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21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22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복음선포 일 때문에)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3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죄악이요, 허무요, 헛것임을 깨달은 사도의 고백이다. 곧 가장 낮아진 이의 신앙고백이다. 자기 버림, 부인의 삶에서 나올 수 있는 고백이다.
복음(루카14,1.7-11)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 율법의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을 법의 행위로 철저히 지키려는 이들이다. 그래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을 몰라봐, 지켜볼 뿐이다.(마태12,8)
곧 법으로 지키는 안식일을 부인하는 그 낮아짐으로 예수님께 돌아와(회개) 그분 안으로 들어가 그분 안에서 참 안식을 누려야 하는데, 그들은 부인을 할 줄도 모르고, 할 생각도 없다. 자신의 뜻, 의를 높이는 신앙을 살기 때문이다.
7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8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어제도 확인 했듯이, 자신이 죄인 중에 첫째가는 죄인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그 회개의 낮아짐이다.(1티모1,15) 그래야 자연스럽게 끝자리에 앉게 되고 그것이 곧 윗자리로 올라앉게 됨이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진리로 받아들이면 그분의 지체로 한 몸이 되어 윗자리의 주인이신 그분과 함께 그분의 윗자리, 그 앞자리로 올라앉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집회10,14) 14 주님께서 통치자들의 권좌를 무너뜨리시고 그들의 자리에 양순한 이들을 앉히신다.
= 우리 모두는 통치(統治)의 자리에 앉아있다. 내 뜻, 소원을 위해 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우리의 높은 윗자리를 부수시어 양순한 양으로 만드시어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신다.
(에페2,1-6) 1 여러분도 전에는 잘못과 죄를 저질러 죽었던 사람입니다. 2 그 안에서 여러분은 한때 이 세상의 풍조에 따라, 공중을 다스리는 지배자, 곧 지금도 순종하지 않는 자들 안에서 작용하는 영(말)을 따라 살았습니다. 3 우리도 다 한때 그들 가운데에서 우리 육의 욕망에 이끌려 살면서, 육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본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4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십자가로), 5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은혜)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6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아멘!!!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