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15일 토요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성령 모독 죄 (루카12,8-12)
제1독서< 그리스도를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에페1,15-23)
15 나는 주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전해 듣고,
16 기도 중에 여러분을 기억하며 여러분 때문에 끊임없이 감사를 드립니다.
17 그 기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18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19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20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21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22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화답송시편 8,2와 3ㄷㄹ.4-5.6-7ㄱ(◎ 7ㄱ 참조) ◎ 당신 손으로 지으신 작품들을 아드님이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 주님, 저희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크시옵니까! 하늘 위에 당신 영광 높사옵니다. 당신은 아기와 젖먹이들의 찬양으로, 요새를 지으셨나이다. ◎
○ 우러러 당신 손가락으로 빚으신 하늘하며,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바라보나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 ◎
○ 천사보다는 조금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당신 손으로 지으신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
복음<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루카12,8-1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9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10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11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12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에페1,15-23)
"그 기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17-18)
앞의 17절에서 성도 그리고 교회위에 부어진 지혜와 계시의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께 대한 참된 지식을 제공한다. 일찍이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였고(호세4,6), 하느님은 그 백성들에게 하느님 알기를 요청하였다.(호세6,6) 이러한 지식은 단지 사색하고 성경을 읽음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하느님께 대한 객관적 지식이 곧 하느님을 안다는 바른 지식이 될 수 없다.
17절에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에서, 하느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여기서 '알게' 로 번역된 '에피그노세이'(epignosei)의 원형 '에피그노시스'(epignosis)는 그 자체로 이미 '알다' 라는 의미가 있는 '기노스코'(ginosko)에 강조를 나타내는 접두어 '에피'(epi)가 붙어 '철저하고 정확히 안다' 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에피기노스코'(epiginosko)에서 유래한 명사이며, '정밀하고 정확한 지식' 을 의미한다.
특히 이것은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그 대상을 아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앎은 단지 성경을 읽거나 인간적 탐구를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역동적인 역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예레31,33.34)
그리고 그러한 지식은 결코 아는 것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데에로까지 나아가게끔 만든다.(예레36,26.27) 바오로는 바로 이러한 앎이 성도들에게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이제 18절과 19절에서는, 성령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① 부르심의 희망과 ② 그분 상속의 영광의 풍성과 ③ 믿는 이들에게 베푸시는 그분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사항에 대한 바른 깨달음은 하느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의 눈을 밝히실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된 '카르디아스'(kardias)는 일차적으로 신체 기관 중 하나인 '심장'(heart)를 지칭한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어떤 원문에서는 '카르디아스'가 아닌 '디아노이아스'(dianoias)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해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기능으로서의 마음' 을 의미한다.
특히 요한1서 5장 20절에서는 이 단어가 이해력을 뜻하는 '지각'(understanding)으로 번역되어 있어 그 의미의 이해를 돕는다. 성령께서 바로, 전에 알지 못하던 영적 부분에 대한 사실을 깨닫게 하는 영이라는 사실이 이러한 본문을 통해 보다 잘 드러나는 것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이런 통찰력을 통해 18절, 19절에 묘사된 세 가지 사항에 대한 깨달음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1)'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
바오로는 먼저 에페소 교인들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 하느님의 부르심의 희망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간구했다. 하느님께서 믿는 이들을 부르신 데에는,그리고 이방인을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로 불러 들이신 데에는 그에 상응하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 희망은 하느님께서 증표로 주신 성령으로 인해 미래에 있을 완전한 구원에 대한 망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으심을 통해 우리를 구속하신 하느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갖는 이 희망은 온전하며 부끄럽지 않다.(로마 5,5.6) 그리고 완전한 구원에 대한 이 희망은 곧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티없고 흠없는 거룩한 교회로 세우실 것에 대한 희망이다.(에페5,27)
2)'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바오로가 에페소 교인들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 깨닫게 되기를 간구하는 두번째 것은 하느님의 상속(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상속(기업)이란 말이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상속(기업)' 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하느님께서 '소유하시는 상속(기업)' 인지는 애매하다.
하느님의 상속(기업)을 '소유하시는 상속'으로 보는 견해는 구약의 문맥과 특히 관련을 갖는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상속(기업)으로 묘사되어 있으므로(신명4,20 ; 2사무21,3 ; 시편33,12) 신약에서는 교회가 하느님의 상속(기업)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견해이다.(에페1,11)
이런 관점에서는 본문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우리의 상속(기업)' 아니고, 하느님의 '상속(기업)이 되는 우리'를 나타내는 것이 된다.
한편, 하느님의 상속을 '베푸시는 상속'으로 보는 경우에는 바오로가 기록한 콜로새서의 문맥과 특히 관련을 갖는다. 콜로새서 1장 12절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성도들이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주셨다. 이런 관점에서는 성도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풍성한 상속(기업)을 받은 자들이다.
원문으로 볼 때, 이 두가지 견해가 다 가능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이 두 가지 견해가 모순되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상속(기업)인 성도들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풍성한 상속(기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3)'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19)
바오로는 에페소 교인들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 깨닫게 되기를 간구하는 세번째 것은 하느님께서 믿는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능력의 크심에 대한 것이다. 하느님의 우리를 위한 사랑의 가장 큰 표현이 독생성자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라면, 우리를 위한 능력의 가장 큰 표현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의 부활로 이어진다. 즉 자신의 영으로 죽은 예수님을 일으키신 하느님께서 또한 자신의 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성도들을 다시 살리실 것이다.(로마 8,11) 우리를 향하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은 곧 부활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마지막 날 부활할 것을 가리킨다.
18절과 19절에 '그분의' 에 해당하는 '아우투'(autu)가 계속 나오는 것은 인칭대명사로서 강조를 위해 사용된 것이고, 이것은 부르심의 희망도, 상속의 영광도, 능력의 지극히 크심도 모두 하느님의 것이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알게 되기를' 에서 '알게'에 해당하는 '에이데나이'(eidenai)의 원형 '오이다'(oida)는 본래 '보다' 또는 '봄으로써 인식하다' 라는 뜻인데, 이론적인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인 지식으로서의 앎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즉 직접적인 삶의 체험을 통해 얻어진 지식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18절과 19절에 세 가지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느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체험적으로 얻게 되는 영적 지식들이다
2022년 10월 15일 토요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매일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오늘 복음의 분위기를 보면,
‘사람들 앞에서’ 또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서’ 예수님을 당당하게 증언하거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해야 하는 상황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겪었던 박해 상황을 투영하는 단락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사의 기로에서 순교가 아니면 배교를 선택해야 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이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또 다른 구절을 기억합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루카 9,26).
예수님께서는 현재의 생사 문제를 넘어서는 종말론적 시각을 지니도록 촉구하십니다.
제자들이 현세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세상 끝 날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대하실지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어제 복음은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와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대조하면서,
누구를 더 두려워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눈앞의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거나 그분을 부끄럽게 여기면,
종말에 있을 심판에 더 큰 공포와 두려움을 맞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를 모른다고 하시거나 부끄러워하시는 것만큼 두려운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박해 때문에 생사의 갈림길에 설 일도, 배교를 강요당하는 처지에 놓일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일상 가운데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야 할 경우가 때때로 생깁니다.
혹시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를 부끄러워할 때가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한 상황에 놓일 때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지 스스로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부끄러워하면 그분께서도 우리를 부끄러워하실 것입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 내 안의 성령께 모두를 맡기며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12,8-9)
예수께서는 이어 박해를 겪더라도 성령께서 해야 할 말을 알려주실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 비춰보면 우리 신앙의 목표는 주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곧 우리의 소명은 하느님의 말씀과 생명, 정의와 자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도 방향도 오직 주님을 따르는 것이지요.
제자의 길은 결코 내 힘으로 홀로 수행될 수 없는 어려운 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그분의 전 인격에 동화되려는 몸짓 없이 신앙을 고백하거나 실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떠나 주님과 온전히 일치할 때,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나를 도구삼아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데는 반드시 고통과 박해가 따르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을 모시고 있기만 한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통해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자체가 강력한 복음선포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과 사랑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과 일치하여 성령 안에 머무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참 제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언제나 내 안에 예수님을 모시지 않고, 예수님과 동화되지 않고 그분을 안다고 증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두려움 없는 신앙고백은 주님과의 일치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오늘 잠시 자신을 돌아보며 과연 나의 시선과 마음의 지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되돌아봐야겠습니다. 내 영혼의 주파수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행동방식에 맞춰져 있는지 성찰해봐야겠지요. 자신을 다른 것들로 채우며 만족해 하는 태도를 바꾸어 발걸음을 주님께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며 겪는 고통과 박해 앞에서도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 자신을 맡기는 ‘거룩한 여유’를 지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참 신앙은 늘 고통과 시련 중에 빛을 발합니다. 어려움 가운데서 그 사람이 참된 주님의 자녀인지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성령의 이끄심보다는 ‘더러운 영’의 유혹에 쉽게 휘말려 주님을 등지고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마저도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한 채 세상 금력과 권력에 굴복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오늘도 어떤 어려움 중에도 주님께서 함께 해주심을 믿으면서, ‘그분이 원하는 선택과 결단’을 하고 꿋꿋이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2022년 10월 15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짝을 하나로 보아, 하나로 갖는 것을 진리가 되었다 한다.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복음(루카12,8-1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 안다고(야다-함께 눕다) 증언하면 - ‘그리스도와 하나, 한 몸이라 증언(證言)하면’이다.
9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 하느님을, 말씀을 생명나무(계약)로 받으라 하셨는데 사람(아담)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선악의 나무(계약)로 보고 먹어, 생명에 이르는 길, 하늘 문이 막혀 버렸다. 하느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막으신 것이다.(창세3,24) 그 천사들을 통과해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
사람의 죄를 대속하신 새 계약의 그리스도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 들어가는 것이다. 하느님의 계획이셨다.
(에페1,10) 10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 그런데 아담이 받았던 선악과(善惡果 도덕과 윤리), 그 옛 계약의 주님으로 안다고, 하나라 하면, 또한 인간들의 뜻, 소원을 들어 주시는 기적과 능력의 예수님과 한 몸이라 말하면 통과할 수 없다.
독서(에페1,21-22) 21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말, 존재)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22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우리)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10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 육(肉)을 입으신 예수님을 거슬러 말하는 것은 용서 받느다. 애? 모든 인간은 아담이 하느님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받아 드렸듯이 보이는 기적과 능력의 예수님으로는 참 생명인 하늘의 대속, 그 구원의 진리를 깨닫지 못할 수 있으며, 예수님은 용서를 위해 오신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요한12,47)
그래서 하느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 성령을, 영원한 보호자로 보내시어 그리스도 예수님을 선(善)과 악(惡)을 생명 하나로 갖은 하느님의 외아들(모노게네스- 하나로 갖은 이)을 영원한 생명, 진리(眞理)라고 증언하셨다.(요한15,26 1코린2,9-10)
그런데 그 성령의 증언을 듣고도 ‘모른다’고, ‘아니다’라고 하면 모독(冒瀆)이 되어 용서(容恕)가 일어나지 못한다.
독서(에페1,17-18) 17 그 기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18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11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 너희의 생각, 곧 인간의 말로 준비하지 마라 하심이다.
12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 인간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宣布)하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선과 악, 거짓과 진리, 생명나무와 선악의 나무, 예수님과 그리스도, 육(肉)과 영(靈), 구약과 신약, 하늘과 땅, 밤과 낮, 남자와 여자,
하느님은 모든 것을 짝하여 하나를 설명하신다. 나쁘다, 좋다. 판단하여 나누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로 다른 하나를 깨달아 하나로 보라고....
‘짝을 하나로 보아 하나로 갖는 것을 진리가 되었다.’한다. 곧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아 간직하는 것이다. 믿는 것이다.
(마태19,6)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 인간들의 질서인 ‘이혼하지 마라’는 정도의 말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 말씀을 둘로 분리하지 마라’는 것이다. 말씀을 선과 악으로 받아 도덕과 윤리에 멈춘 신앙을 살게 되면, (법(法)이 되어 심판(審判)이 되기에)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죽음이 된다. 그것이 이혼(離婚)이다.
‘그리스도 안에 나’가 되어야지 내 밖에 예수님으로 계시면 안된다.(마르3,31-35) 내 생각의 머리를 죽이고, 부인(否認)하고, 그리스도께 들어가 그 안에 하나 되는 것, 곧 그리스도 안에 내가 한 몸으로 있는 것, 하느님을 아는 것이며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자유를 누리는 것이 믿음, 신앙이다.
(1코린7,22-23) 22 주님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종은 이미 주님 안에서 해방된 자유인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르심을 받은 자유인은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23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사람의 종이 되지 마십시오.
☨ 영원한 보호자 천주의 성령님!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