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5일 화요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루카13,18-21)
제1독서<둘이 한 몸을 이룸은 큰 신비입니다.> (에페5,21-33)
21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22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3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
24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5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26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말씀과 더불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7 그리고 교회를 티나 주름 같은 것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며,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8 남편도 이렇게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9 아무도 자기 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시는 것처럼 오히려 자기 몸을 가꾸고 보살핍니다.
30 우리는 그분 몸의 지체입니다.
31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32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33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화답송시편 128(127),1-2.3.4-5(◎ 1ㄱ 참조)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네 손으로 벌어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을 받으리라. ◎
○ 너의 집 안방에 있는 아내는,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너의 밥상에 둘러앉은 아들들은, 올리브 나무 햇순 같구나. ◎
○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듯 복을 받으리라. 주님은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너는 한평생 모든 날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리라. ◎
복음<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루카13,18-21)
1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19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21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에페5,21-33)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주인이신 것과 같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1-24)
에페소서 4장 17절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구성원으로서 각 성도의 새 생활에 대한 실제적 권면을 주고 있는 바오로는, 이제 5장 21-33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상호 순종 명령과 그 대표적 예로서 부부사이의 상호 순종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21)
여기서 '순종하십시오' 에 해당하는 '휘포탓소메노이'(hypotassomenoi)의 원형 '휘포탓소'(hypotasso)는 '~아래에' 를 뜻하는 '휘포'(hypo)와 '배치하다' 를 뜻하는 '탓소'(tass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문자적으로는 '~아래에 배치하다', '하위에 두다' 라는 의미이다.
이 동사는 본문에서 명령 분사 수동태로 쓰였으나, 이 수동태는 자동사의 의미를 나타낸다.
즉 상대방에세 순종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권위에 눌려 마지 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상대방보다 낮추어 섬긴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특히 소년 시절 예수님께서 그 육신의 부모를 '그들에게 순종하여 지냈다' 라는 진술에서도 쓰인 바 있다.(루카 2,51)
성도는 마치 예수님께서 그 부모를 자발적으로 공경함으로써 순종했듯이, 지체된 자들은 머리에게 자기 자신을 순종해야 한다.
바오로가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서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라고 한 말씀이나 본문에서 서로 순종하라고 한 말은 동일한 의미이다.
사랑의 최대 덕목은 섬김이고, 그것은 바로 종의 무조건적인 섬김이다. 게다가 그 섬김은 사랑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의 관계에서 순종과 사랑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에페5,22-6,9)
한편 그리스도를 경외함과 성도간에 서로 종처럼 순종하는 일은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고 한 루카 복음 10장 27절의 말씀처럼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종처럼 섬기지 않을 수 없고, 다른 사람을 제대로 섬기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경외하거나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위선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2)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상호 순종을 명령한 21절에 이어 본절 이하에서는 그 대표적 예로서 부부 사이의 상호 순종 권면을 주고 있다.
22절 원문에는 '순종하듯 ~ 순종해야 한다' 는 동사가 없다.
21절의 '서로 순종하십시오' 에서 동사 '순종하다' 에 해당하는 '휘포탓소메노 '(hypotassomenoi)가 본문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동일한 주제 아래 하나의 예로 제시되는 본문의 경우에는, 굳이 동일한 동사를 반복해서 기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편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여자는 사람의 수를 셀 경우에 제외될 정도로 남자와 동일한 인격체로 취급받지 못했다.(민수1,25 ; 마태14,21)
또한 본문 당시의 그리스 세계에서도 여자는 남자가 갖는 여러 가지 권리들을 누리지 못했다.
바오로 역시 본질적인 의미는 다르지만, 본문에서 여자를 향해 자신들의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다른 사실은 순종의 모델이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24절)이라는 데에 있다.
바오로는 남편을 그리스도로, 여자를 교회로 비유한다.(23,24절)
결국 아내와 남편의 관계는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매우 큰 유사점이 있다.
따라서 남편과 아내는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하여 각자의 역할을 배울 수 있으며, 반대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통하여 교회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 (23)
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에 있는 비밀은 인간 사이의 부부 사이를 통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다' 에 해당하는 '아네르 에스틴 케팔레 테스 귀나이코스' (aner estin kephalle tes gynaikos ; the husband is the head of the wife)에서 동사 '에스틴'(estin)은 '~이다' 라는 뜻의 현재 직설법으로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항상 그러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가 만물과 교회의 머리되심에 대해서는 바오로가 본서의 서두에서부터 강조해 온 것으로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도에 대한 주권을 보여준다.(에페1,22)
또한 그리스도는 성도가 자라가야 할 성장 모델로서의 머리이시기도 하다.(에페4,13)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가정 안에서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된다는 것은 남편의 주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의 모습을 일방적으로 닮아가야 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남편의 영적 수준이 아내의 수준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훌륭한 아내라면 자신보다 낮은 영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 남편이라고 할지라도, 그를 무시하거나 자신이 남편의 머리가 되려고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잠언31,10-12)
왜냐하면, 훌륭하고 현숙한 여인의 기준은 주님을 경외함에 있고(잠언31,30),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그분이 자신에게 주신 남편을 존경하고, 그의 권위를 세워주며 살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고,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1코린11,3)
이제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은 그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사건을 통해서이기(콜로1,18)때문에, 교회와 성도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바오로는 본절을 통해 교회가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철저하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순종의 정도'를 보여준다고 한다면, 이에 나오는 24절의 '모든 일에서' 라는 말은 '순종의 범위' 를 보여준다.(1코린11,5)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25)
아내가 남편에게,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이 모든 일에 있어서 철저하게 순종해야 한다는 22-24절의 내용은 극심한 남녀 차별의 내용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바오로는 결코 비인격적 남녀 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은 부부 사이에 있어서 아내가 남편에 대한 순종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의무 역시 강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본절부터 30절에 이르는 여섯 절에 걸쳐 남편을 향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하듯이 아내를 철저하게 사랑해야 함을 명령하고 있다.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의무는 철저히 강조되고 요구했으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의무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한 사회에서 바오로는 남편들에게 단호하게 명령한다.
자신의 몸을 내어줄 정도로 자신의 아내를 사랑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사랑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아가파오'(agapao)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타인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로서, 이성인 상대방에 대한 깊은 성적 욕망을 나타내는 '에라오'(erao)라는 동사와 가정 및 친구에 대한 인간적 사랑을 나타내는 '필레오'(philleo)라는 동사와 질적으로 다르다.
남편들이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듯이, 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을 해야할 것을 명령하면서 하느님의 무조건적이고 절대적 사랑을 나타내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말씀과 더불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6)
그리스도는 교회를 씻어 거룩하게 하시려고, 또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시려고, 자신을 내어주셨음을 밝히고 있다.
본문에서 '씻어'에 해당하는 '루트로'(lutro ; with washing)는 문자적으로는 '목욕'을 뜻하는 단어이다.
마찬가지로 본문에서 '물로 씻어' 라는 표현을 몸을 씻는 육체의 행위로 보기보다는 죄를 정결하게 하기 위한 영적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물로 씻는 바로 이 행위는 세례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된다.
구약 성경의 에제키엘서 16장 9절에서도 "나는 너를 물로 씻어 주고 네 몸에 묻은 피를 닦고 기름을 발라 주었다." 는 구절에서, 물로 씻는 행위를 속죄를 위한 세례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말씀이 나온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 (1베드3,21)
그런데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문에서 물로 씻는 행위를 말씀을 깨끗하게 하는 행위와 관련짓고 있다는 것이다.
본절에서 '말씀'에 해당하는 희랍어로 '로고스'(logos)가 아닌 '레마'(rema)이다.
이 둘을 비교하자면, '로고스'는 말씀 자체 또는 말씀을 비유되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반면에, '레마'는 입 밖으로 나온 진리의 말씀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특히 세례를 베풀 때에 행해진 말씀을 염두에 두고 쓰인 표현이다.
이 말씀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누구)에게 세례를 준다'는 세례 예식의 기도문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세례 때 행하는 강론 말씀을 의미할 수도 있다.
비오 12세 교황께서는 '남편은 가정의 머리, 아내는 가정의 심장' 이라 하셨다.
머리는 지성의 주체로서 권위를 말하고, 심장은 애정의 주체로서 모성애를 말한다.
그리고 그 권위는 가족 구성원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는 권위가 아니라 가족공동체를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 권위를 말한다.
그럴 때 남편은 아내와 자녀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또한 심장에서 혈관을 통해 온몸의 피가 하루에 지구의 두바퀴 반을 돈다고 한다.
그만큼 아내는 남편과 자녀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공급해야 한다.
가정 안에서 남성이 남성다움을 구현하는 것은 가장, 남편, 아버지로서 세 가지 역할을 다 잘할 때이다.
가정 안에서 여성이 여성다움을 구현하는 것은 주부, 아내, 어머니로서 세 가지 역할을 다 잘할 때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예수님처럼 마지막 피 한방울, 물 한방울 다 쏟기까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는 희생과 헌신이 있는데, 왜 가정이 망가지고 해체가 되겠는가?
특히 이 시대 갈 곳없는 아버지들을 보면서, 아내는 밥상에서 자식보다 남편의 밥을 먼저 퍼주고, 남편이 출근할 때 자녀들로 하여금 아버지께 인사를 시키고, 한달동안 고생하여 번 월급이 통장안으로 들어왔을 때, 식탁이 달라지는 조그마한 사랑의 반응을 통해, 잃어버린 가장과 아버지의 권위를 살려주는 것이 가정의 심장으로서 아내가 성모님처럼 할 일이다
2022년 10월 25일 화요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놀라운 성장이라는 공통 주제 안에서 서로 밀접한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두 비유에는 각각 남자와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남자는 겨자씨를 자기 정원에 심고, 여자는 누룩을 밀가루 서 말 분량의 반죽에 집어넣습니다.
정원에 심은 겨자씨는 어느덧 자라서 하늘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됩니다.
겨자 나무의 크기는 보통 1미터 내외지만, 예외적으로 2미터 이상 자라나기도 합니다.
밀가루 반죽에 들어간 누룩은 반죽 전체에 영향을 미쳐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밀가루 서 말은 무려 50리터가 넘는 분량인데, 이는 성인 150명이 거뜬히 먹고도 남는 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마치 겨자씨, 그리고 누룩과 같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아주 작은 크기 또는 적은 양 속에 숨어 있는 이들의 강력한 잠재력에서,
하느님 나라의 미약한 시작 속에 숨어 있는 놀라운 힘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의 연속성 안에서도 하느님 나라의 성장 과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시작에는
초라한 구유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와 그 탄생을 목격한 가난한 목자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루카 2,1-20 참조).
메시아로 기대되었던 그 아기는 커서 실망스럽게도 비참한 십자가 죽음을 맞이합니다(루카 23장 참조).
그러나 곧 반전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그가 외치던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사그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제자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퍼져 나갑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복음이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유다와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그리고 세상 곳곳에 퍼져 나가는 모습과 더불어 나날이 성장하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그렇게 이천 년의 세월을 거쳐 우리에게까지 다다랐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그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끊임없이 복음을 전파하며 성장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좁쌀보다 작은 겨자씨가 1.5-3미터 크기의 큰 나무로 자라나 새들이 가지에 깃들이듯 미소한 것이라 해도 하느님을 품고 있습니다. 또 백 명이 먹고도 남을 만큼의 많은 빵을 구울 수 있는 밀가루를 부풀리게 하는 누룩처럼 생명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통치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극히 사소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하느님 뜻이 드러날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가 썩어 없어지고, 누룩이 밀가루를 부풀리고 흔적 없이 사라짐으로써 성장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돌아봅니다. 스마트폰에 눈과 손을 고정하며 살아가는 디지털 정보사회에서 사람들의 뇌도 깊은 성찰과 분별없이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팝콘 브레인’이 되어간다고 하지요. 내 이익과 관련되거나 자극적인 것들이 아니면 그냥 지나쳐버리기 십상입니다.
이런 피상적 관심 속에 평범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삶이나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가시적인 능력이나 성과를 내지 못하면 불만을 표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는 아무것도 없지요.
우리 삶에서 겨자씨와 누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작은 배려, 보이지 않는 선행, 부드러운 말씨, 고통 받는 이들 곁에 함께 있어주는 것, 불평등과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들의 절규에 함께하는 행동 그런 것들이겠지요. 그런 마음과 손길이 모아질 때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눈에 가치 없어 보이고 사소한 것을 이용해서도 엄청난 선과 사랑을 이루시며, 그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사소한 일상, 나의 작은 생각, 하찮아 보이는 사람, 평범한 말과 행동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른 한편 겨자씨가 자라나 하늘의 새가 깃들일 정도의 큰 나무가 되려면 씨는 땅에 묻혀 썩어 없어져야 함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변화와 성장은 희생과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헌신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내가 죽어 모두를 살리고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오늘도 사소한 일상사와 하찮아 보이는 이들 안에 숨어있는 하느님의 씨앗을 소중히 여기며,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의미와 희망을 발견하고, 자신이 변화되고 희생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누룩이 되도록 힘쓰는 창조의 날이 되길 희망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22년 10월 25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나라는 ?
복음(루카13,18-21)
1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19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의 눈에는 겨자씨와 같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을 자기 정원, 곧 자기 뜻대로 심어(받아) 커다란 나무로 심었다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악과(善惡果)로 먹은 사람(아담)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 대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이름을 날리려는 바벨의 사람이다.(창세11,3-4)
본문이 사탄에게 묶여 허리가 굽어 땅만 바라보는, 곧 삶의 중심이 땅(세상) 나라의 것만을 바라며 살도록, 그래서 자기 나라를 구축하려 선악의 가르침으로 스스로 자신의 뜻, 의(義)를 위한 신앙에 시달리던 여자가 씨(말씀)로 하느님의 나라로 오신 예수님의 손(진리)의 덮으심으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 똑바로 일어서다. - “아나스타시스”(부활), 곧 부활의 삶을 살았다는 어제 복음 말씀에서 이어진 오늘 말씀이다.
겨자씨(말씀)를 내 나무로 키우면, 내가 높은, 푸른 나무로 자라면 절대 안 된다.
(에제17,22-24) 22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 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리라.
= 짐승들의 먹이통에 어린 아기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이다.
23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어 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 24 그제야 *들의 모든 나무가 알게 되리라.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시든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이가 나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
= 들, 인간들의 뜻, 방법으로 심어 키운 높은 나무는 낮추고,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신다. 곧 세상의 힘을 부수신다는 말씀이다. 왜? 살리시려고, 그대로 높고 커진 상태로 있으면 영원한 죽음이니까.
선악의 가르침, 인본주의는,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 속에 겨자씨로 출발해서 자라나 새들이 깃드는 커다란 나무로 발전 된다고 인간의 뜻, 의로움을 위한 가르침을 준다.
오늘 비유 말씀이 앞에서 본 에제키엘 17장의 말씀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 대조로 에제키엘 31장1절 이하에서 세상의 힘을 갖은 높은 나무, 푸른 나무를 베어 버리게 하신다.
(에제31,13-14) 13 그 쓰러진 등걸 위에는 하늘의 모든 새가 살고 그 줄기들에는 들의 모든 짐승이 자리를 잡았다. 14 이는 물가의 어떤 나무도 다시는 키가 높이 솟아 그 꼭대기를 구름 사이로 뻗지 못하게 하고, 물(말씀)을 흠뻑 먹으며 자라는 어떤 나무도 높아져서 구름과 마주 서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사람들 사이에 끼여 구렁으로 내려가는 이들과 함께 죽음에, 저 밑 세상에 넘겨졌다.
= 인본주의에 빠지면 그들과 함께 저 밑, 지옥(地獄)에 넘겨지게 된다는 말씀이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21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 밀가루 서(3)말 속에, 곧 밀이 갈아져(죽어) 생명의 빵, 양식이 된 그리스도의 몸 안에, 하느님의 생명, 하느님 나라가 드러나야 한다. 힘의 원리인 세상의 목숨을 위한 것으로 드러나는 그 헛된 부풀림이 되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하느님 나라에게 우리(나)가 점령당해야지 내 나라를 구축하기 위해 하느님 나라를 이용하는 것이 되면 안 된다. 이 세상 나라도 구축하고 하느님 나라에도 갈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 점령당하지 않으면(커진 내가 죽지 않으면) 하느님 나랑네 들어갈 수 없다. 곧 내 뜻, 의로움, 영광을 드러내는 신앙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의로움, 영광이 이루어지는 신앙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다음 23절 아하, ‘많은 사람들이 원하며 추구하는 높고, 푸른 나무의 반대의 길인 ’좁은 문(門)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으로 이어진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저희에게 이루어 주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