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19일 토요일
[연중 제6주간 토요일] 변모(變貌) 사건(마르9,2-13)

제1독서<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야고3,1-10)
1 나의 형제 여러분, 많은 사람이 교사가 되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2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누가 말을 하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온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3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복종하게 만들면, 그 온몸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4 그리고 배를 보십시오. 배가 아무리 크고 또 거센 바람에 떠밀려도, 키잡이의 의도에 따라 아주 작은 키로 조종됩니다.
5 이와 마찬가지로 혀도 작은 지체에 지나지 않지만 큰일을 한다고 자랑합니다. 아주 작은 불이 얼마나 큰 수풀을 태워 버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6 혀도 불입니다. 또 불의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혀가 우리의 지체 가운데에 들어앉아 온몸을 더럽히고 인생행로를 불태우며, 그 자체도 지옥 불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7 온갖 들짐승과 날짐승과 길짐승과 바다 생물이 인류의 손에 길들여질 수 있으며 또 길들여져 왔습니다.
8 그러나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혀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악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9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10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
화답송 시편 12(11),2-3.4-5.7-8(◎ 8ㄱ)
◎ 주님, 당신이 저희를 지켜 주소서.
○ 주님, 구원을 베푸소서. 충실한 이는 하나도 없고, 진실한 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져 버렸나이다. 저마다 이웃에게 거짓을 말하고, 두 마음 간사한 입술로 말하나이다. ◎
○ 주님은 간사한 모든 입술과, 허황된 말을 하는 혀를 잘라 버리시리라. 그들은 말하는구나. “혀는 우리의 힘, 입술이 우리 것인데 누가 우리의 주인이랴?” ◎
○ 주님의 말씀은 순수한 말씀, 흙 도가니 속에서 일곱 번이나 정제된 순은이어라. 주님, 당신이 저희를 지켜 주시고,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호하소서. ◎
복음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였다.>(마르9,2-13)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11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째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리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
13 사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엘리야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
연중 제6주간 토요일 제1독서 (야고3,1-10)
"나의 형제 여러분, 많은 사람이 교사가 되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1)
야고보서 3장 1-12절은 올바른 신앙생활에 필수적인 혀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 집중적으로 진술한다.
야고보는 1장 26절 "누가 스스로 신심이 깊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혀에 제갈을 물리지 않아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사람의 신심은 헛된 것입니다." 에서 짧게 언급하였던 성도(聖徒)의 바른 언어생활에 대한 주제를, 이제 본 장에서 구체적으로 새롭게 전개시켜나간다.
먼저, 야고보는 언어생활에 관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충고를 부정적인 측면에서 하는데, 우선적으로 <교회안의 교사>에게 적용시킨다.
'교사'로 번역된 '디다스칼로이'(didaskaloi)의 기본형은 '디다스칼로스'(didaskalos)인데, '가르치다'(마태4,25)란 뜻의 동사 '디다스코'(didasko)의 명사형으로, 글자 뜻대로 '가르치는 자'를 의미한다.
아마도, 당시에는 교사 직분을 많은 사람들이 선호했으며, 따라서 교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가르치는 자로서 소양과 자질이 부족한 교사가 됨으로써, 교회 안에 잘못된 가르침이 많아지고, 가르치는 자가 모범이 되지 못하는 등 다양한 문제가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야고보는 가르치는 직분을 가진 자들 및 그 직분을 탐내는 자들에게 주의 깊은 경고를 주고 있는 것이다.
가르치는 자(교사)는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 중에 사도들과 예언자들 다음, 세 번째 위치에 놓여진 사람들이다.(1코린12,28) 교회의 모든 직분, 예컨대 사도, 예언자, 복음 선포자, 목자, 교사들은 모든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사를 실천하는 통로이다.(에페4,11)
따라서 교회의 모든 직분이 다 그렇듯이, 가르치는 직분 역시 그 자리에 세워진 사람이 그 직분에 적절한 자격을 갖추었는지가 중요하지, 그 자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교사(敎師)가 비록 바로 가르치더라도, 자신이 그 가르침대로 행(行)하지 않으면, 배우는 자보다 훨씬 더 큰 심판(審判)을 당하게 된다.
야고보는 교사가 되는 것을 신중을 기하여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며, 또 구원의 진리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확신을 가졌을 뿐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가르치는 은사를 부여받아, 그 직분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면, 애초부터 교사가 되려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2)
교사로서의 가르침은 다른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교사가 만약 그 책임을 충실히 실행하지 못했을 때는, 하느님의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알다시피'로 번역된 '에이도테스'(eidotes)는 '오이다'(oida)의 완료 분사로서 이러한 교사의 막중한 책임을 성도들이 이미 알고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특히 '우리는 ~ 받을' 로 번역된 '렘프소메다'(lempsometha)는 '람바노'(lambano)의 일인칭 복수형으로서, 야고보 자신도 심판을 받게 될 교사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부인(否認)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누가 말을 하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온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복종하게 만들면, 그 온몸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를 보십시오. 배가 아무리 크고 또 거센 바람에 떠밀려도, 키잡이의 의도에 따라 아주 작은 키로 조종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혀도 작은 지체에 지나지 않지만 큰일을 한다고 자랑합니다. 아주 작은 불이 얼마나 큰 수풀을 태워 버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혀도 불입니다. 또 불의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혀가 우리의 지체 가운데에 들어앉아 온몸을 더럽히고 인생행로를 불태우며, 그 자체도 지옥 불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2-6)
말이란 의사 전달의 수단이다. 그러나 이 말이라는 것은 항상 실수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야고보는 만약 혀로 범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가리켜 '완전한 사람'(텔레이오스 아네르 ; teleios aner)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실수를'로 번역된 '프타이오멘'(ptaiomen)의 원형 '프타이오'(ptaio)는 '걸려서 비틀거리다', '걸려서 넘어지다'는 뜻으로, 본문에서는 '잘못하다', '죄를 짓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혀로 실수(범죄)를 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거니와, 여기서 '완전한 사람'이란 표현도, 절대로 완전하여 죄가 전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그가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야고보는 이같이 말의 실수를 하지 않는 완전한 사람은 자신의 온몸, 즉 모든 행동을 스스로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당시 사람들이 잘 알고 있던 가축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계속해서 3-8절에서도, 이 비유와 의미가 동일한 일련의 비유를 들어, 혀의 큰 영향력과 그 혀가 잘못 사용될 때의 심각한 결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복종하게 만들면, 그 온몸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3)
'재갈을 물려'의 '재갈'로 번역된 '칼리누스'(chalinus)의 원형 '칼리노스'(chalinos) 는 말의 입에 가로 물리는 쇠토막을 가리키며, 이곳에 고삐를 맨다. 고삐를 매면, 말은 사람이 움직이고자 하는 방향을 따라 복종할 수 밖에 없다. 성질이 사나운 야생마라 할지라도 고삐를 사용해 다스릴 수 있다.
야고보가 이 비유를 말하는 이유는 혀의 기능 때문이다. 사람의 몸은 큰 데 비해, 혀는 그 크기가 매우 작다. 그럼에도 혀는 통제하기가 매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야고보의 비유는 말의 재갈처럼 혀를 통제하는 사람이 허물을 감출 수 있으며 성숙한 인격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말이 많은 데는 허물이 있기 마련 입술을 조심하는 이는 사려 깊은 사람이다."(잠언10,19)
"배가 아무리 크고 또 거센 바람에 떠밀려도, 키잡이의 의도에 따라 아주 작은 키로 조종됩니다." (4)
3절에서는 힘이 센 가축을 통제하는 재갈의 비유를 사용한 바 있는 야고보는 몸 전체를 조절하는 혀의 능력을 재강조하며, 두번째 비유로 배의 크기와 키의 크기를 비교하고 있다. 여기서 배는 바람에 밀려 움직이는 매우 큰 범선을 가리킨다.
배의 크기에 대해서 야고보는 '아무리 크고'란 뜻을 가진 지시사 '텔리카우토스'(telikautos)를 사용하여 표현하였고, 키의 크기는'아주 작은'이란 뜻을 가진 '엘라키스토스'(elachistos)를 사용하여 표현했다.
이 두번째 비유에서 앞의 비유보다 더 직접적으로 크기의 대조적인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지극히 작은 것으로도 큰 것을 조절할 수 있다는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사공(키잡이)에 의해 키가 조종될 수 있다면, 배가 거센 바람(광풍)에 밀리지 않을 것이다. 배는 외부적인 광풍이 아닌 내부의 작은 키에 의해 진로가 결정된다.
야고보가 본문에서 '거센 바람에 떠밀려도'라는 외부 환경과 관련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독자들에게 배의 키와 인간의 혀는 외부적인 환경을 거슬러 이기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사람은 제 입이 맺는 열매 덕에 좋은 것으로 배부르고 인간은 제 손이 한 행실에 따라 되돌려 받는다." (잠언12,14)
'큰일을 한다고 자랑합니다'(5)는 '메갈라 아우케이'(megala auchei)의 번역인데, 이것은 '메갈라우케오'(megalacheo)와 같은 뜻으로, '과장하다', '호언장담하다', '언행에 있어서 거만하게 처신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오만불손한 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간사한 모든 입술과 허황된 것을 말하는 혀를 잘라 버리시리라."(시편12,4)
"하늘을 향해 자기네 입을 열어 젖히고 그들의 혀는 땅을 휩쓸고 다니네." (시편73,9)
"아주 작은 불이 얼마나 큰 수풀을 태워 버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혀도 불입니다. 또 불의의 세계입니다." (5-6)
야고보는 혀를 불의 이미지로 묘사하며 작은 것이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음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아주 작은'(헬리콘 ; helikon)과 '얼마나 큰'(헬리켄 ; heliken)으로 번역된 단어가 원형으로 볼 때 동일한 단어라는 점이다.
야고보는 이 두 상반된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로서 '헬리코스'(helikos)라는 한 단어를 사용한다.
수십만 헥타르의 광대한 숲이 작은 담배 꽁초 하나 혹은 작은 성냥불 하나로 다 타버리는 일이 있다. 처음에는 아주 작게 시작된 불이 바람을 타고 번지면서 삽시간에 산 전체를 다 삼켜 버리는 것이다.
야고보는 일상적 삶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화를 가지고, 작은 혀의 엄청난 파괴력을 극적으로 제시한다. 불과 같이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혀를 잘못 사용하면, 누구라도 인생을 망칠 수 있다.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으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 (잠언18,21)
혀는 '불'(퓌르 ; pyr)이란 은유법에 이어, 혀는 '불의의 세계'란 또 다른 은유법을 사용한다. 여기서 '세계'에 해당하는 '코스모스'(kosmos)는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계시는(마태23,22) '하늘'을 가리키는 '우라노스'(uranos)와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서, 죄악으로 타락한 상태의 세상을 의미한다.
특히 이 단어와 더불어,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다키아오스'(dikaios ; 요한17,25 ; 2티모 4,8 ; 묵시 16,5)에 부정 불변사 '아'(a)가 결합되어 의로움이 전혀 나타내는 '아디키아'(adikia)란 단어가 사용되어, '불의의 세계'는 곧 악의 세계', '사악한 세상'을 의미한다.
야고보는 지금 혀, 곧 말의 파괴성을 고발하기 위하여,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이 세상의 모든 악이 마치 악한 혀에서 비롯된 것임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혀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 악한 특성을 드러내며, 실제 그런 혀는 결과적으로 우리 몸의 지체 전부를 더럽히고, 우리 삶의 바퀴를 태워 버린다.
"이러한 혀가 우리의 지체 가운데에 들어앉아 온몸을 더럽히는 인생행로를 불태우며, 그 자체도 지옥 불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6)
여기서 '더럽히고'에 해당하는 '스필루사'(spilusa)는 '오염시키다'란 뜻을 지닌 동사 '스필로오'(spilow)의 현재 분사로서, 혀를 통해 내뱉는 말이 전인격을 오염시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 오염은 일시적이지 않고, '인생행로'를 망쳐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생행로'에 해당하는 '톤 트로콘 테스 게네세오스'(ton trochon tes geneseos)는 '인간 존재의 과정', '우리 생의 과정' 이란 의미로, 길흉화복이 교차하는 인생, 또는 흥망성쇠가 반복되는 변화무쌍한 인생 노정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다.
이제, 인간의 전인격을 부패시켜 인생 전체를 태워버리는 혀의 해악성을 지옥(地獄) 아래에서 타오르는 불과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지옥불'로 번역된 '게엔네스'(geenes)의 원형 '게엔나'(geenna)는 본래 예루살렘 남쪽의 좁은 골짜기인 '힌놈의 골짜기'(게 힌놈)을 말한다. 이 골짜기는 흔히 지옥, 또는 악마가 거주하는 곳으로 비유되었다. 또한 그곳은 최후의 심판 후 악인이 들어가는 곳으로 비유되었다.(마르9,43)
여기서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는 지옥의 이미지로 쓰였으며, 특히 혀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 사악한 독의 근원이라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온갖 들짐승과 날짐승과 길짐승과 바다 생물이 인류의 손에 길들여질 수 있으며 또 길들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혀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악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7-8)
인간은 창세 후에 하느님께로부터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의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리도록'(창세1,28) 권한을 위임받은 존재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인간이 동물의 세계를 인간의 통치권 아래에 두고 지배해 오고 있지만, 정작 혀는 길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대조시켜, 후자의 안타까움을 강조하고 있다.
"혀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악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8)
동물이나 새는 우리나 새장에 안전하게 가두어 둘 수 있지만, 혀를 활동하지 못하게 가둘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혀를 쉬지 아니하는 악이라고 하는 의미는, 혀가 언제나 쉬지 않고, 악을 내뱉는 불안정한 존재라는 것이다.(야고4,8)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는 것은 '죽음을 초래하는', '치명적인'이란 의미이다. 마치 강한 독을 가진 독사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혀는, 선한 말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불의하고 더럽고 독기 가득한 말들만 뿜어내기를 더 좋아한다.
"거짓을 일삼는 자야 너는 파멸을 꾸미고 네 혀는 날카로운 칼과 같구나. 너는 선보다 악을 의로움울 말하기보다 속임수를 더 사랑하는구나 거짓을 꾸미는 혀야 너는 온갖 멸망의 언사를 사랑하는구나." (시편52,6)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됩니다." (9)
야고보는 이제 한 입으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고', 동시에 그 입으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저주' 하는 모순된 삶을 사는 자들을 책망조로 말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선과 악, 둘 다를 말할 수 있는 혀의 이중성과(마태12,34-37) 더불어 혀를 악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모순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은 혀의 가장 아름다운 기능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것은 창조주 하느님께 찬양을 부르게 하기 위함이다.
"이들은 내가 나를 위하여 빚어 만든 백성 이들이 나에 대한 찬양을 전하리라."(이사43,21)
그런데 하느님을 찬양하는 그 입으로 형제를 저주한다. 이것처럼 심각한 자가당착이며 모순도 없다. 하느님을 찬양한 입으로,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루카6,28 ;로마12,14) 왜냐하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그 사람을 창조한 하느님을 저주하는 것과도 같은 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찬미하기도 하고 ~저주하기도 하니'에서 쓰인 '율로구멘'(eulogumen)과 '카타로메다'(katarometha)는 '율로게오'(eulogeo;찬양하다)와 '카타라오마이'(kataraomai;저주하다)의 현재 시제가 쓰임으로써, 교회 안에서 한 입으로 두 가지 말을 하는 일들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2022년 02월 19일 토요일
연중 제6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제자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셔서 그들 앞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십니다.
엘리야와 모세도 그분 곁에 나타납니다.
베드로는 이 놀라운 장면을 보고서 그들에게 초막을 지어 드리겠다고 제안합니다.
뜬금없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 베드로의 이 제안은 이스라엘의 초막절 배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보호 아래 광야에서 지냈던 천막생활을 기억하는 초막절은,
마지막 때가 오면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초막에서 살게 되리라는
종말론적인 기대도 반영하는 축제였습니다.
이제 베드로가 왜 초막을 짓겠다고 하였는지 이해가 됩니다.
베드로는 자기 눈앞에서 펼쳐지는 눈부신 광경을 보고
지금이 바로 그 종말의 때임을 직감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영원히 함께 머무를 초막을 지어 드리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놓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가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수난을 강조하셨는데(마르 8,31 참조),
종말의 때에 이르기는커녕 아직 수난의 때도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눈앞의 놀라운 광경에 정신이 팔려 이를 잊었던 모양입니다.
이미 한 번 심하게 꾸지람을 들었음에도(마르 8,33 참조)
여전히 수난과 십자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지지 않은 모습을 보며,
베드로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이 가르침을 멀리하고 싶은 유혹이 얼마나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 영광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서 드러내신 영광은
수난의 여정 끝에 궁극적으로 맞이할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곧 십자가의 승리를 암시하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묵상하며,
그분께서 초대하신 십자가의 길이 결국 패배가 아닌 승리의 여정이라는
우리의 확신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복음(마르9,2~13)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아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2~4)
마르코 복음 9장 2절에서 13절까지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마르9,2~8)과 그것과 관련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이 대화를 나눈 사건(마르9,9~13)에 대한 기록이다.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앞의 마르코 복음 8장 29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 고백('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을 성부 하느님께서 확인해 주신 사건임과 동시에, 예수님의 구원 사업이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이 성취된 것임을 보여 주는 의미도 지닌다.
뿐만 아니라 마르코 복음 8장 31절에 나오는 첫번째 수난 예고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이 힘이 없어 받는 것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수난이며, 단순히 수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영광을 회복하실 것을 예표하는 의미도 지닌다.
예수님의 공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뜻을 갖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마르8,29)과 첫번째 수난 예고 (마르8,31) 이후에 있는 거룩한 변모 사건은 예수님 생애의 중대한 전환적 의미를 지니기에 공관 복음서 저자들은 이 사건을 다 기록하고 있다(마태17,1~8; 루카9,28~36).
마르코 복음 9장 3절에서 천주 성자 제2위 하느님이신 예수님께 내재하고 있던 충만한 신성 (콜로2,9)의 표출로 말미암아 주님의 옷은 광채로 빛나며 새하얗게 되었다.
여기에서 '빛났다'로 번역된 '스틸본타'(stilbonta; shining; dazzling)는 여러 차례 문지른 금속 따위가 번쩍이며 빛나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 '스틸보'(stilbo)의 현재 분사형이다.
변모산에서 주님의 옷은 마치 금속이 번쩍거리는 것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또한 '새하얗게'로 번역된 '류카'(leuka; white)의 원형 '류코스'(leukos) 역시 '빛나는', '찬란한'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마태오 복음 5장 36절과 요한 복음 4장 35절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천상적 존재에서만 볼 수 있는 찬란하면서도 흰 색깔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도 천상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신비롭고 영광스러운 사건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마르코 복음의 기사에서는 마태오 복음(17,2;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과 루카 복음 (9,29;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의 기록에 있는 기사는 빠져 있지만, 정황으로 볼 때 주님의 얼굴도 찬란하게 빛이 났을 것이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9장 4절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는데, 원문에는 마르코 복음 9장 3절과 4절이 등위 접속사 '카이'(kai; and)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나타나'로 번역된 '오프테'(ophthe; there appeared)는 '보다'는 뜻을 지닌 원형 '호라오'(horao)의 직설법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이렇게 신약 성경에서 부정과거 수동태로 쓰였을 경우에는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이나 성령님, 또는 천상적 존재가 사람들 앞에 나타나 보인 것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 구약의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유다인들에게 '모세'와 매우 특별한 인물이다.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자로서(2열왕2,11) 유다인들이 다시 올 것을 대망했던 예언자이며(마르9,1), 모세는 비록 죽었지만(36,5) 유다인들은 하늘로 산 채로 올라갔다고 믿고 있던 인물이다.
이들은 율법과 예언자의 대표적인 인물이므로, 이들이 예수님께 나타나 그와 더불어 말씀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로 대표되는 구약 성경을 결코 부정하거나 없애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해 주며,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바로 그 메시야이며, 율법과 예언서의 약속의 말씀과 예언들을 성취하실 분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마태5,17참조).
2022년 2월 19일[연중 제6주간 토요일]
*더러, 안에 들게 하소서.
복음>(마르9,1-13)
1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2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 성경(聖經)은 왜 바로 ‘일곱째 날에’ 라고 하지 않고 ‘엿새 뒤에’라고,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弟子)들 중 셋만 데리고 가셨을까? 성경은 숫자로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숫자6은 사람의 몸(肉身)을 뜻하며, 숫자3은 하늘(三位)을 뜻한다.
그러니까 육신(6)을 입고 죄(罪)와 고난(苦難)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엿새 뒤, 곧 칠(7, 안식)을 주시기 위한 셋(3), 하느님 나라의 일을 보여 주시겠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온갖 죄와 고난의 인간들에게 자유, 쉼, 안식을 주시기 위해 오셨고, 하실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이다.
앞장에서 예고(豫告) 하셨던 당신의 구원의 모습을 보여 주시려는 것이다. 복습해보자.
앞 8장30절 이하에서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했고, 예수님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주셨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 말씀에 반박했다. 왜? 자신의 뜻, 소원을 아직 이루지 못했는데, 기적과 능력의 스승 예수님께서 죽으신다니 아직 때가 아니라고 반박한 것이다. 그래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예수님께서 꾸짖으셨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일, 욕망(慾望)의 자신(自身)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을 하셨고,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시며 그 땅의 것을 버리고(부인하고) 일어나 “서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를 볼 것이다.” 라고 하신 것이다.
다시 9장1절로~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 이 세상 나라 안에 감추어져있는 하느님 나라를 보는 것, 깨닫는 것이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 이 세상이 낼 수도 없는, 이 세상의 빛이 아니라는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 하늘의 빛이시라는 것이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 엘리야는 우상(偶像)을 섬기며 양다리 신앙(信仰)으로 무너졌던 12지파(교회)를 다시 세웠고, 모세는 강대국 이집트에서 노예(奴隸)살이 했던 이스라엘을 탈출(脫出)시켰다. 모두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모형(模型)한 인물이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를 원(願)하며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들이 세상의 명예(名譽), 재물(財物)로 만족, 안식하기 위해 세상의 논리(말)에 노예가 되어, 양다리 신앙으로 죄와 고난의 삶을 사는 오늘 날 우리들을 그 죄와 고난의 삶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참 자유, 참 만족, 안식을 주시기 위한 하느님나라 완성에 관한 논의(論議)를 하신 것이다.
아직 성령(聖靈)을 받지(믿지) 못한 베드로는 알 수가 없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 구름은 하느님의 현존(顯存)을 뜻한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힘, 논리는 구원의 진리가 아니니 부인(否認)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구원의 진리로 ‘들어라(믿어라), 따라라’ 하신 것이다.
오늘 독서(牘書)에서 말씀 하셨듯(야고3,1-10) ‘사람의 말은 실수(失手)로 독(毒)이 가득하다 그러니 온 몸을 더럽혀 행로(行路)를 바꿔 하늘이 아닌 땅(지옥)으로 이끄는 화(禍), 불이 되지 않도록 자신의 말(입)에 재갈을 물리라.’ 는 말씀이다.
사람의 말로 하느님 나라를 전(傳)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구원의 길, 진리로 전(傳)하라는 것이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 우리는 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질병)로 죽으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다시 되살아 나셨다는 것을....
그러니까 보이는 기적(奇蹟)과 능력(能力)의 예수도 아니고, 우리의 죄(罪)로 죽으신 예수도 아니고, “죽으셨다 부활(復活)하신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말하라”는 것이다. 죽었다 살아남. 그 모든 것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그 창조주(創造主)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구원의 일’이라는 것을 전(傳)하라는 말씀이다. (1코린15,35-38참조, 꼭 보시기를)
11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째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리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 13 사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엘리야에 관하여 성경(말라기)에 기록된 대로 그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
= 구약의 마지막 예언서(豫言書)인 ‘말라기서’의 끝장, 절에서 말씀하신 엘리야가 세례자 요한이었고, 그들이 전(傳)한 하느님을, 그분의 뜻(말씀)을 예수님께서 고난(苦難)과 멸시(蔑視)의 죽음(대속)으로 하늘의 빛, 하늘의 생명을 주실 것을(이루실 것을) 오늘 보여주신 것이다.
(요한1,4) 4 그분(말씀-예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실수로 독을 주는 선악의 말, 그 사람의 말이 아닌, 악을 선이 대속하고 용서, 생명을 주는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말하게 하소서. 그래서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더러는 볼 사람이 있다.” 하신 그 ‘더러’ 안에 들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